〈 89화 〉광신도
C는 첼의 시체를 한가운데 던져두고 한참이나 주문을 외웠다.
그건 기도 같기도 했고 저주 같기도 했다.
확실한건 그렇게 해서 그녀가 원하는 구원을 받을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기도하다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구슬을 제단으로 보이는 위에 올렸다.
그러면 미미하지만 분명히 그 위로 녹갈색의 빛이 깃들었다.
구슬에서는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시하신 물건의 주문을 마쳤습니다."
"그래요? 잘 했어요. 아주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요. 그쪽 물량은 생각해 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분노의 사막 초입에서 방황하던 자들 4명을 죽이고 번제했습니다."
"좋아요. 분명 그들 역시 다르말록의 곁으로 가게 되어 기뻐할거에요.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여러분은 위대한 부활을 선도하고 있으니까요."
"네, 린아가씨."
"하아... 린이라니요. C라고 말했잖아요."
"아, 실례했습니다 C님."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기분이 좋은듯 웃었다.
어딘가 약간은 소름끼치는 음침함이었다.
분노의 사막... 분명 유레크로스 서쪽으로 이어진 사막이다.
[에리아, 새로운 정보다. C의 본명은 린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분노의 사막 초입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죽였다는군.]
[린?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야. 일단 알겠어.
그리고 분노의 사막? 그건 갑자기 왜 나오는데?]
[나도 모른다. 하지만 물건의 주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아서
실크로드를 통해서 물건을 들여올 생각인 것 같다.
그 주변을 지나는 이들을 살해할 이유가 없잖나.]
[유레크로스의 실크로드라... 그래, 계속 수고해줘.
한동안은 나도 바쁜 일이 생겨서 연락하기 어려울 것 같아.]
[바쁜 일이라고?]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거든.]
[그래, 고생해라.]
상황은 계속 살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있는 위치도 알아내야 한다.
제일 유력한 것은 미리타엔이었다. 이들이 원래 미리타엔에서 건너왔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어쩐지 공기가 미리타엔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미리타엔제국에서는 이렇게 깨끗한 공기는 느낄 수 없었으니까.
어딘가 맑은 공기는 서늘한 풀냄새가 섞인 것 같았다.
지금 시각은 아마 조금 이른 저녁일 것이다.
나는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올라섰다.
점차 방의 형태와 벽의 질감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나는 이곳이 지하임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하고 창문이 없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위쪽으로 빛을 따라 나아가면 조금 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있는 공간으로 보아 동굴 내부로 추정된다.
동굴 중앙에 굴을 따로 뚫어 만든 거처로 보였는데, 이런걸 여자 혼자서 만들었을리 없었다.
동굴은 너무 깊었기 때문에 순순히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다시 방으로 별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
방에 돌아오면 아까 있었던 C는 사라져 있었고 첼의 시체 주변으로 붉게 타오르는 양초가 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나는 주변을 조사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하나같이 고서적들이었는데, 내가 읽어본 서적도 있었고,
처음 보는 서적도 있었다.
<왜 신은 우리를 버렸는가>
<우주의 근원>
<신학과 죽음, 그리고 영생>
<종치는 자들의 기억>
그런 서적들 사이에 꽂힌 작은 편지와 노트 두 권을 발견했다.
저걸 꺼내서 읽고 싶었지만 영체라 그런지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낡은 만년필이 잉크통에 꽂힌 채로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까딱하면 쓰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그 펜은 마치 방금 전까지 사용한 것 같았다.
에리아라면 이걸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저 책들을 모두 알고 외웠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은근히 그런데에 흥미가 많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어서 더 무능함을 곱씹어야 했다.
편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와 소통을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 편지는 뜯은 흔적이 없다.
깔끔히 접혀 그 위로 왁스가 뭉쳐져 있고, 그 위로 기분나쁜 마른 손의 모양이 찍혀있다.
아마 이 여자가 찍은 인장일 것이다.
인장이 아직 뜯기지 않았다는 것은 곧 받은 편지가 아니라 보낼 편지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기한이 머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편지에 진하게 묻은 불쾌한 비릿함의 원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편지를 어떻게 빼내야 하는가. 그것만이 중요한 문제였다.
손을 뻗어 편지를 열려고 해도 내게 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나의 존재는 편지를 뚫고 사라졌다.
손이라는 것은 단순히 부위가 아니다. 존재하는 육체로서의 이름이다.
그 몸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손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영혼체에 손이니 발이니 하는 개념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아... 하여튼 같이 다니는 중에 이상한 것만 배워선.
더럽게 재미없는 둘이 다니려니 퍽퍽해서 말이야.'
분명히 에리아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꾸준히 노력하면 사물 정도는 들 수 있을 거라고.
들어야 하나? 아니다. 어차피 저걸 들어도 열지 못하면 의미가 없을 테니까.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저 편지의 내용을 아는 것이니까.
저 노트를 열어보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당신이 여길 오는건 처음이겠죠."
"나에게는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지도 않았으니까."
"알려준다고 해서 바로 온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알려줄 의리도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면 굳이 그렇게 불필요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을텐데.
아직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부족하신가봐요?"
"그 놈의 가치. 질려버리겠군. 그래서 대장간에서 칼데라를 고의적으로 일으키는 이유가,
고작 금품 때문이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군. 아주 놀랍도록 비효율적이야.
그리고 더럽고 잔인하지."
"비효율? 저희 입장에서는 이렇게 남는 장사도 얼마 없다고요."
그 말에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벽에 붙어있던 거울을 비집어 열고 나오면서 C와 남자 하나가 나왔다.
긴 머리의 남자는 머리를 뒤로 묶었고, 몸이 전반적으로 거칠어 보였다.
한쪽 눈은 허여멀겋게 빛을 바래 시각이 없는 것 같았고 한 손에 든 지팡이로 계속 더듬어가며
앞을 겨우 딛고 있었다. 쉼 없이 탁탁대며 앞을 쳐대는 팔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희끗한 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해 허리가 기울어진 남자였다.
우스갯소리라고 해도 외모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은.
"그래서 여길 찾아오게 된 소감이 어때요?"
"소감... 소감이라. 그런게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
자네나 나나 일이나 마치고 성공적으로 원하는 것만 찾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요.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먼저 접근해도 괜찮은건가요?"
"내가 접근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런건 아니에요. 다만, 우스워서 말이에요.
왜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건지 알려주겠어요 소미에르씨?"
"큰 이유는 없지. 다만 오래 전에 빼앗긴 걸 다시 받고 싶었을 뿐이야.
클클... 르미에르가 내 자리를 빼앗은건 알고 있겠지."
"제가 알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걸 제가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뭐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이뤄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계약 내용은 기억하시죠?"
"내 아래에 있는 회로파 기술자들을 팔아달라...였나?
미리타엔 제국에서 이미 신분 우회 문제는 해결했다고 했었지."
"그 말대로에요. 저희는 기술자를 당신에게서 사고, 당신은 돈을 받아가고.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의외네요.
회로파의 수장, 르미에르의 형인 당신이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C2 지역에서 나는 구조되지 못했었지. 매몰되어 지하굴을 헤매이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것 기억하나?"
"네. 저희도 놀랐었답니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같은 사람에게 들켜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죠.
놀랍게도 우리를 불러세우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목적을 물었고요."
"그때 대답했던게 아마 돈이었었나? 기술자들 고용하고 싶다고.
그떄 생각했지. 아마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거라고 말이지.
돈을 위해서 화산 지반을 침식시키는 이들이 대장간에서 기술자를 구한다.
그를 위해서 기술자들을 대거 매몰시켜 죽인다. 모순적이었어.
분명 합법적인 일은 아니리라 생각했지. 여전히 그 목적은 모르지만 말이야,
난 지금의 대장간이 썩었다고 생각한다. 르미에르 그 녀석부터,
호색광 네버브레이크, 다 늙어서 노망이 나버린 헤세리티.
씨발... 내가 만들었을 대장간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텐데."
"흐음...? 당신의 눈이며 팔이며 기술자로서 활동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아닌가요? 뭐, 자세한 이야기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으셔도 돼요."
"르미에르... 그 놈 때문이지."
"그래요. 좋은 선택이 되길 바랄게요."
"나는 뭘 하면 되지?"
"따라 오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 C는 제단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 뒤에서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병신같은 년. 그렇게 대장간에서 보석과 금을 캐 놓고서 저렇게 뻔뻔하게 나온다니.
여기있는 돈은 모두 내가 실례하지. 아, 그 목도 같이 말이야. C구역의 원흉과 더불어 보석이라니.
그것만 있으면 나도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장로들께 인정받을 수 있겠지... 크크크....
르미에르... 그 건방진 자식이 주제도 모르고 형을 쳐내..?
그 자리는 내 것이었는데... 아니, 아니지. 이젠 내 것일테니까."
소미에르라고 소개받은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빼냈다.
"이보게 C! 준비는 되어 가나?"
"네, 들어오세요."
그를 따라 나 역시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화려한 방 한가운데에는 첼의 시체가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그려진 육망성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빠르게 정리를 마친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안경 사이로 보이는 눈이 어딘가 오싹했다.
이 광경 하나하나가 단서로만 느껴졌다.
"냄새가 영 좋지 않은데. 아주 썩는 냄새가 나. 뭔가 부패하는 냄새 말이야."
"부패한것 뿐이니까요. 당신이 이 자리에서 제일 부패하지 않았나요?
정신도, 인격도. 아 어쩌면 몸도 그렇겠네요."
"농담은 이쯤 하지."
"어머, 농담이라고 생각했나요? 나는 그런 농담은 잘 하지 않는 주의인데.
당신이 원하던대로 돈은 준비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회로파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게 넘겨주세요. 약속한대로... 말이죠?"
"그래, 분명 내 그리 말했지. 좋아."
서류를 내미는 여자의 손 끝에는 붉은 핏기가 묻었다.
소미에르는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를 받아들고 그곳에 이름을 휘갈겼다.
그리고 그걸 C에게 건네주었고, C는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분하게 숨을 죽이고 소매에 숨긴 단도의 날을 손끝으로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방심한 틈을 노려 그 뒤에 예리한 칼끝을 내리쳤다.
그녀가 더 예민하지 않았다면 아마 누워있는 것은 그녀였겠지.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그가 내리친 칼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막혔다.
노인의 힘없는 팔은 그녀가 꺼낸 거울 속에 들어가있었다.
"어머나~ 혹시나 해서 준비했던 위상거울인데, 이렇게 공격을 하신다니...
그래도 저 안심했어요. 저만 배신할 생각은 아니었나봐요.
까딱 실수해서 거울을 꺼내들었는데도 공격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탕.
딱 한발. 이마를 관통당한 노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고,
책상에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쳐박았다.
치켜뜬 두 눈은 아직도 충격이 생생해 보였다.
머리가 터지면서 흩뿌려진 피와 뇌수가 질척하게 묻었다.
덕분에 더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내려보던 C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완전히 선반이 더러워졌잖아. 편지 다시... 써야겠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노인의 머리 뒤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피는
어쩐지 생동감도 없는 것 같았다.
마른 노인의 팔다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게 욕심을 부리면 안되잖아요. 뭐, 테팔레스 화산을 터트릴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분명 아무 것도 몰랐겠죠 당신은. 그냥 회로파 기술자만 바치면 끝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면 약속했던 돈을 줄거라고 생각했나본데... 이미 그 돈은 내 손에 없거든요.
멜로디 속으로 묻혀버렸답니다."
여자는 그렇게 웃으며 노인의 시체를 제단 뒤로 끌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