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0화 〉작은 연합 (90/303)



〈 90화 〉작은 연합

"자꾸 왜 멍하니 계시는 거에요... 저랑 이야기를 하기 싫으신 거라면 갈게요.
그렇게 굳이 무시하지 않으셔도..."


"아냐, 이건... 그냥 요즘 좀 피곤하더라고. 하하...
지금 시간도 늦었잖아? 졸린가봐."

그렇게 둘러댔다. 체헤게와 전음을 하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내 말을 그닥 의심하지 않는 것 같은 마카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대장간을 떠나려고 해요. 오브를 만들어 달라고  거였는데 큐브를 받았으니까요.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생각했던 것보다 소득이  크기도 했고.
오늘까지만 여기서 보내고 내일은 떠나려고요.
본부에서 연락이 오기도 해서요."

"연락이 왔다고? 사성한테도 본부에서 연락이 가고 말고 할게 있어?"

"아, 이번에 새로운 성제가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나름 까다로운 임명일텐데
성연으로서 가서 축하해주려고요. 아마 먼 길이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무사히 돌아가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런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짐을 챙기고 마카를 배웅하러 나왔고, 그는 차분하게 나를 기다리며
어디서 구한건지 모를 에스테리카를 한 손에 쥔 채로 홀짝이고 있었다.


"정말 와 주셨네요."


"간다고 하니까 배웅 정도는 나와도 괜찮겠다 싶어서. 나도 그닥  일이 없거든.
그래,  가고. 어디 보자, 벌써 11시네."

"그러게요. 천천히 가면 약속에 늦을 수도 있겠어요.
사실 가는 것도 가지 않는 것도  선택이지만요.
그나저나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회로파 기술자들이 대거 실종되었다고 하던데요."

"회로파 기술자들이?"


"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고 하는데, 숙소부터 집합장소까지
하나하나 다 찾아봐도 사라져서 보이질 않는대요.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르는데, 일단 그렇다고 해서
오늘 작업중이던 공방이나 의뢰들 중에 회로작업이 들어가는 것들은 전부 무기한 중단되었다고 하네요."

"수장은? 회로파에 수장 있을  아냐?"


"아, 그 사람도 살짝 맛이 갔더라고요. 사라진 기술자 사이에 수장님의 친형이 있었다는 모양이에요.
궁금하시면 한번 찾아가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야겠네. 고마워."


나는 그렇게 마카와 대화를 마치고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어제  것보다 기술자의 수가 명확히 적었는데,
 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부탁했던 체헤게의 바디 프레임은 기계파 기술자들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수리가 가능한 형태였기 때문에 난 상대적으로 다행인 편이었다.


내가 레인을 향해 가고 있으면 자늑 화가 난 목소리로 헤세리티가 날 불렀다.
그녀는 담배를 되는 대로 구겨서 입에 물고 연기를 흩어내며 걸어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멈춰서서 내게 물었다.

"기술자를 어디로 데려갔나?"

"무슨 소리야?"


그 말에 그녀도 울컥한듯 내게 소리쳤다.

"시치미 떼지 마라! 다 알고 왔으니까!"


눈에 잔뜩 선 핏발이 금방이라도 터질  처럼 일렁였다.
까딱 잘못하면 주먹부터 날아올  같은 그녀를 진정시켰다.


"나도 방금 전에 이야기 듣고 막 도착했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다짜고짜 사람을 몰아가면 어쩌자는거야?"

"회로파 기술자들을 데려간게 네가 아니라고 할 셈인가?"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사라져버린 이들은 누가 했다고 할 생각이지?"

"그걸 나한테 묻는 저의가 뭐야?"

"저희랄건 없네. 다만 나는 이전에도 말했듯 생명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을 인간이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소.
그리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여전하지.
결정적으로 아침에 찾아본 그들의 작업레인에서 발견된게 이거요."


그녀가 내게 내민 종이에는 검은 바탕에  글씨로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협박인지 경고인지 모를
이상한 글이 쓰여있었다.


-미리타엔의 추방자


 글씨를 보자마자 나는 바로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대장간에 보내는 협박이 아니다.
대장간을 시작으로하는 이 대륙 전체에 보내는 경고였다.
회로파 기술자들을 데리고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실종된 기술자는  명이야?"


"하아... 이걸 알려주는게 맞는 건지 모르겠군. 우선 자네도 같이 가지.
이쪽으로 가면 회로파 수장, 르미에르가 있을거요. 따라오시게."


"그럴 생각이야."

"하아..."


르미에르의 방에서는 들어가기 전부터 달큰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안에서 어딘가 심각한 침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에 우리도  앞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망설임이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헤세리티는 과감하게 그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나 헤세리티요. 들어가겠소."

"돌아가주시게. 지금은 조금 심란하군. 아무도 만나고 싶지가 않아."

"결정권은 없소. 장로님께 허가를 받았으니까."


"씨발.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가!"

그런 소리가 들리고 덜컹 문이 열렸다.
 너머에 있는 남자는 피골이 상접한 것으로 보이는 깡마른 자였다.
두 눈이 퀭하니 들어가서 침침했고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다.
세로로 긴 얼굴은 그저 뼈 위에 거죽을 씌워놓은 것 같았고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는것 까지는 신경쓰지 않겠지만, 언제부터 이런 꼬마를 데리고 다니게 되었나 헤세리티."

"꼬마? 이 여자가 제국의 무령이오. 몰랐는가?"


"무령..? 아 이 여자인가. 마르커스의 유품을 가지고 왔다는 여자는."

"그렇네. 자리를 내 주게."

"마땅히 내 줄 차는 없지만 들어오게."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르미에르는 길다란 다리를 위로 걸치듯 접어 불편하게 의자에 구겨앉았다.
다리를 꼬았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양쪽 팔로 그 다리를 감싸안았다.
보기만 해도 불편해보이는 자세였지만 그는 그 상태로 물었다.


"형도 사라졌고 기술자들도 사라졌네.
이제 내게 남은 거라고는 허울뿐인 수장직 뿐이군.
날 따라주던 제자들과 장인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네.
 많던 기술자들이 말일세. 26%야. 고작 26%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고!"


"그렇다는건...98명 정도 남은겐가?"


"정확히는 97명이지. 회로파의 기술자는 376명이니까.
이름, 얼굴, 실력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고.
인생을 팔아넘겨? 그게 대체 씨발 무슨 소린가...
미리타엔의 추방자라니..."

"무령으로서 아는 것은 없는가?"

헤세리티는 나를 보고 물었다.


"아마 그건 노예로 팔려갔다는 의미겠지.
수장도 모르는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있었던거야.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의 인물이 말이지.
그래서 계약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제국으로 팔려간 거겠지.
제국에서 신분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은 노예가 되니까.
그 때부터는 인권을 보장받지 못해.
아마 기술자라고 떡하니 쓰인 것으로 봐서는 죽이거나 하진 않겠지.
기술자들이 필요했던거야. 회로파 기술자들이니까
280명 정도의 기술자가 필요한 대형 회로 작업이겠지.
솔직히 말할게. 범인이 누구인지 알  같아. 목적은 모르겠지만."

"뭐라고?"

"미리타엔의 추방자라는  아마도 다르말록의 신봉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전에 C3구역 사고가 일어났을 때, 구조했던 광부들 외에 땅 속에 매몰된 인원이 더 있었거든.
나는 그 사람들을 찾아 그 아래로 내려갔어.
거기서 내가 발견한 게 다르말록의 신봉자들이었어.
다르말록은 미리타엔에서 주신으로 오랫동안 내려온 신이었으니까.
유일신이기도 했고. 신봉자 자체도 많았지. 그러다가 아르간티아에게 봉인당해 사라지면서
다르말록의 신봉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어. 그래서 미리타엔에서도 점차 다르말록의 입지는 줄었고
마침내 다르말록을 믿는 이들은 미리타엔을 떠나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이 테팔레스 화산의 지하에서 교원을 모아 집회를 하고 있는걸 봤어."

헤세리티가 책상을 쾅 소리가 나게 내리치며 말했다.

"그걸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 자들이 C3구역을 만들었는지도 모르잖은가!
바로 그들을 잡아들였으면 이럴 일도 없지 않았겠소! 그대의 실책이잖소!"

"내 탓이라고 생각해?"


"그럼 누구 탓이오!"


헤세리티가 언성을 높이자 조용히 앉아있던 르미에르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녀를 탓할 수 없소, 그녀는 어디까지나 외부인.
그 사실을 이제껏 몰랐던 것은 우리잖은가. 외부인에게 도움을 받아 정보를 얻는 상황에서
그녀를 다그쳐서 좋을것이 하나도 없다는걸 왜 모르는가.
그러다 그녀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득은 커녕 손실만 늘어난다네.
우리는 기술자고 그녀는 제국의 무령이라고 했으니 애초에 대등한 관계도 아니오.
대체 무엇이 그대를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하시오.
제일 열불이 터지는 건....나니까. 잘한 것 하나 없는 우리가 누굴 탓한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중요한건 누가 그들과 거래를 했기에 기술자들이 팔려갔는가.
그것 아니오?"

"그러네요. 누군지 저는 알 방법이 없어요. 원래 대장간 사람이 아니니까."

 말에 가만히 눈을 가고 생각하던 르미에르가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또각거리는 구둣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앞뒤로 요란하게 걸어다니기를 반복하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 소미에르일 거라고 생각하오."

"소미에르? 그대의 친형 아닌가?"


"하아... 일단 내 생각은 그렇소.
오래  형은 회로를 다루던 도중 팔에 튀어버린 용암으로 인해서
손에 들고 있던 연장을 놓쳐버렸다네. 그 뜨거운 인두를 눈에 맞아 형은 한쪽 눈을 잃었소.
보호장구를 착용하라고 한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실력을 과신하던 탓이지.
덕분에 형은 차기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네. 실력만 따지면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었지.
나에게... 열등감을 가진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 날 이후로  나를 곱게 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어떻게 보면 부정한 방법으로 수장이 되었지. 헤세리티 자네는 마르커스와 서로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받았고
실제로 겨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할 정도였으니 수장이 되고도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네. 이제 생각해보니 지금 사라진 기술자들은 형의 측근을 포함해서
형과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군."

"르미에르... 그 말은 곧... 대장간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의미인가...?"


"그런  같군. 이 책임은 내가 지겠네. 사라진 형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그러나 에리아 양. 대답해 줄수 있겠는가? 그들이  사라져야 했는지."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   같아요. 그 인원이라면 분명히 더  일이 터질겁니다.
C4구역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내 말을 듣고 있던 르미에르가 일어나서 말했다.

"헤세리티, 아직 성연께서는 대장간에 계시는가?"


"아마... 그런데, 곧 가실 것 같네. 어쩌면 늦었을지도."

"내가, 가서 설득해 보겠네.
그대는 에리아 양과 먼저 C구역을 탐색해주게."

"장로님께 보고는 드려야 하지 않은가?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걸 먼저 듣고..."

"아까 이야기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종사건에 대해 추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잖나!"

"미안허이. 공공을 위한 거짓말이었소."


"하아... 내가 아주 예전부터 나는 자네가 싫었어 헤세리티.
마르커스가 자네보다 나은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이백 육십하고도 여덟개나 댈 수 있다네."

"세 가지만 들어주겠나?"


"어려울 것 없지. 첫째는 자네가 인격적으로 옳은 지도자가 아니기 떄문에 그렇다네.
둘째는 자네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자질이 부족하기에 그렇고, 셋째는 자네는 씨발년이라 그렇다네."


"아주 화끈하군. 다녀오지."

헤세리티는 장로에게 보고하기 위해 나가버렸고 르미에르는 성연을 데리러 갔다.
나는 혼자 남아서 당연히 체헤게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체헤게, 혹시 거기 소미에르라는 사람이 있어?]

[아, 그런 이름의 노인이 있었지.]


[아, 그래?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


[불타서 사라져버렸다. 번제물이 되어버렸지.
어제부터 기술자들을 거울에서 수없이 빼오더니 하나같이 복종의 각인을 새겨넣고
큰 천에 거대한 회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천? 철이나 철판이 아니고?]

[그래.]


[이거 위험하겠는데...]

[위험하다고?]

[종이나 천에 그리겠다는  회로가 아니라는 이야기야.
그건... 대형 마법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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