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장로
아침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장간으로 출근하면 헤세리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부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나와 친해질 생각은 없어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크게 신경쓰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를 따라 레인을 내려갈 뿐이었다. 대장간 지하 5층, 그녀의 공간에서 나는 체헤게의 몸을 발견했다.
"오, 상당히 빨리 진행됐네?"
"나는 다른 기술자들과는 다르니까...말이오."
"생각보다 대단하네."
"생각보다? 나는 최고요. 저런 스팀 로봇보다 위대한 체헤렌도 완성했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반짝이는 은빛으로 마감이 된 매끄러운 여성체의 모습을 한 로봇이 있었다.
기계에는 일자무식인 내가 보더라도 분명히 상당히 공들여 만들었음을 알 것 같았다.
"자가 발전을 어떻게든 이룩해내려고 노력했지. 모터를 돌리기 위해서 말이네.
체내 배터리를 교환할 수도 있고, 태양열에서 에너지를 생산해낼수도 있소.
아아, 정말 위대한 녀석이지. 이름은 말했다시피 체헤렌이네."
"기어이 완성했네."
"아직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아 조금 더 손 볼 예정이지만,
이정도면 적어도 내 머신으로는 모자람이 없지.
이제 나는 기계파의 수장직을 겸허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네.
미련이라는 것이 사라진게야."
"다행이네."
"그리고, 이 로봇. 완성했소. 어차피 대장간이 비상시였기 때문에
모든 인력을 투자해서 만들었지. 원래 황동이 들어가던 자리는 별 수 없이 교체했지만,
더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니 문제 없을거요."
"그래, 고마워. 그래서 황동은 여전히 없는 상태야?"
"그렇소. 추가적으로 인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지.
아무래도 분노의 사막 초입에서 강도를 만난 것으로 추정중이오.
그러지 않고서는 그들이 아직도 유레크로스에서 황동을 구해오지 못했을리 없으니까.
하다못해 엠페레스로 갔다고 하더라도 연락하나 없을 위인들이 아니오."
"그렇겠지... 그래서 이번에 파견한 인원은 뭐야?"
"단순 러너로는 강도를 막을 수 없을거라 판단해 성연께 경호를 의뢰했소.
그리고 협상에 능한 니더와 러너 둘을 붙였지.
이대로라면 적어도 2일 안에는 돌아올거라 생각하고 있소."
"성연을 보냈다고?"
"대장간에 전사란 존재하지 않소. 그저 우리는 영기술 조금,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정도의 능력이 있을 뿐이오.
죽이거나 싸우는 것과는 계를 달리하는 집단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게 눈을 살짝 흘긴다.
내 손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용건은 그게 다요. 로봇은 가져가시오."
"아냐, 아직은 준비가 덜 됐거든."
"준비가 덜 됐다?"
"그런게 있어. 내가 여길 떠나기 전 까지만 맡아줘.
겸사겸사 대장간의 기계파 꿈나무들에게 보여줘도 좋고."
"흠... 알겠소.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큰 로봇이 우그러진 거요?
저런 크기에 강도라면 아무나 흠집을 낼 수는 없었을 텐데, 기술적으로 당한거겠지?"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 자기 무게에 눌린거지."
"그런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군.
아, 맞다. 네버브레이크가 자네를 찾았다네."
"네버브레이크..? 불길한데."
"불길할 것 없소. 아마 시덥잖은 고백 아니겠는가? 하하하!
아~ 너무 부럽소. 나도 사랑고백 정도는 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거늘..."
"그런 말은 사람 눈을 보고 해줄래? 가슴이 아니라."
"가슴이 말해주는 진실이라는거요."
"후우..."
나는 누워있는 체헤게의 몸체에 강화부를 사용했다.
그리고 나서 헤세리티를 보고 말했다.
"저거 1층으로 올려줘. 역시 내가 보관할게."
"그러시오 그럼."
나는 체헤게의 몸체를 뒤로하고 1층으로 올라왔다.
체헤게의 몸체는 수레에 실려 수많은 기술자의 손에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1층으로 밀려 올라왔다.
나는 그 수레를 옮긴 기술자들에게 사례를 했다.
가방에서 페킷 지폐를 여러 장 꺼내 건네면
그들은 히죽이며 이런 것은 받지 않게 되어있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마지못하는 척 주머니를 열었다.
나는 이후로 네버브레이크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 방 문 너머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문을 두어번 두드리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에리아."
그 말을 하면 잠시 안쪽에서 정적이 일다가도 빠르게 문이 열렸다.
네버브레이크는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는 듯 달려나왔고,
그 안쪽에서는 용병들이 앉아서 맥주나 마셔대고 있었다.
"아...어,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부른거죠? 헤세리티가 그러던데요.
여러분이 저를 찾았다고."
"네...? 저희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요."
"그래요! 저희는 여기서 게임이나 하고 있었다구요."
"그래요? 헤세리티는 여러분이 저를 찾았다고..."
"그건 헤세리티의 흉계요!"
"흉계...? 뭐... 그래요... 그나저나 왜 여기서 카드 게임을 하고 계시죠?
땜장이파 사람들은 어디로 갔고요?"
"아, 그들은 오늘 완성된 170여대의 캐럴본을 팔러 갔습니다.
의뢰주께서 이 근방까지 오시겠다고 하신지라."
"그래...?"
"에, 금방 돌아올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네버브레이크는 아주 후련해보여서
어떤 걱정도 없는 것 같았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이네요?"
"이제 공식적으로 한동안 휴가이니 말이오.
이번에 대장간에서도 장로님께서 공식적으로
대장간 내 모든 서비스 시스템에서 일시적으로 화폐를 배제하셨으니."
"대장간 내 모든 시스템에서 화폐를 배제해?"
"그렇소. 본래 니더들과 러너, 샵은 기본적으로 기술자들의 수입을 기반으로
상생하며 존재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대장간에서 기술자의 수입이 사라지면
이들의 수입 역시 자연히 줄어들기 마련이오.
그래서 장로께서 이번 비상에 대비하여 모든 재화의 유통을 멈추자고 하셨다네.
반발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 알고 있었던게야. 기술자가 멈추면 안된다는 걸.
그리고 대장간의 사태 자체가 워낙에 심각하다는 것도 말일세.
다른 국가에서는 불가능했겠지만 대장간은 국가 외 지역이잖소?
그리고 사실, 대장간 내부의 인원은 넓게 보면 전부 가족이니 말이지.
가족이길 포기한 자들은 이미 대장간을 떠났다네.
다들 메카닉이나 모험가로 전직을 해버리고 말았지."
"그런게 가능할 수가 있나...?"
"그러니 장로님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장로님께서는 그만큼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시지.
뭐니뭐니 해도 대장간의 위기를 세 번이나 넘겨오신 분이시니."
"대장간의 위기?"
"그렇소.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장간의 3대 위기라는 것이 있소."
그 말에 용병들도 흥미로운지 내 옆에 놓인 소파에 나란히 착석했다.
그런 우릴 보며 네버브레이크는 말을 이었다.
"C1지역 폭탄 테러 사건,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사건, 공공의 적 사건이지.
원래같으면 대장간 외부로는 나가서는 안되는 정보이지만...
자네들은 이제 가족이고, 무령께서는... 들으셔야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환영 주술 효과 한 번 확실하네.
"C1지역은 폭탄테러로 만들어졌소.
처음에는 아무도 그 지역에 칼데라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치 않았지.
대장간으로 편지가 날아왔소. 구역에 폭탄이 설치되었으며,
지정된 시각에 여지 없이 터질 거라고. 방지하고 싶다면 대장간의 기술자를
각 분야에서 50명씩 차출해서 미리타엔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소.
당연히 우리는 철저히 무시했고, 첫 번째 C구역이 탄생했지.
당시 그 구역에서 일하던 니더들과 기술자들이 무더기로 폭발에 휘말렸소.
사상자는 130명에 육박했고, 당시 대장간은 기술자의 부족으로 1달간 문을 닫아야 했소.
그때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던 건 장로님 뿐이었지.
장로님께서 막 취임하시고 그들에게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네. 그 당시에는 막 취임한 장로보다 수장을 신뢰하던 이들이
텃세아닌 텃세를 부렸으니까. 그리고 일이 터져버렸지.
그떄 장로님이 아니셨다면 통제되지 않은 이들이 휘말렸을걸세.
추정치일 뿐이지만 장로께서는 그 날 60명 가량의 목숨을 구하셨다네.
이후 복구에 누구보다 힘쓰신 것도 장로님이시고."
"그 분은 유난히 대화가 잘 통하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맞아, 대장을 존중하는게 느껴졌다고."
용병들이 말을 하나씩 얹자 네버브레이크도 흐뭇한듯 웃어보였다.
"두번째는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사건이지.
사상자는 세 위기 중 제일 적지만 장로님이 대처를 유연하게 하셨기 때문일세.
어느 날 밤 찾아온 남자가 엘라 세리타인을 찾는다며 무자위로 기술자를 죽였던 사건이지.
그 남자가 피를 다룬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네. 죽은 기술자들이 하나같이
피가 뽑혀나가 죽어버렸으니까. 그때 우릴 지배한건 깡마른채 비틀려버린 존재들에 대한 공포였지.
당시 장로님께서 그 자를 따로 불러 협상을 시도하셨고,
대장간에 그녀가 나타난다면 반드시 알려주기로 하고 그를 되돌려 보내셨지.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이야.
그날 밤 서른 남짓의 기술자가 죽었네.
그리고 장로님께서는 수백의 기술자를 살리셨지.
장로님은 그날 그에게 작은 벨을 하나 받으셨다네.
그 벨은 작은 돌기가 붙어있는 것이었고, 누르면 둔탁한 소리가 나지.
그 소리가 크지 않아 우리는 잘 듣지 못했다네.
그러나 그 남자만큼은 귀신같이 그 소리에 반응했다오.
자기를 만나고 싶다면 그 벨을 누르라고 말이야.
그 벨이 있는 동안 대장간을 믿고 습격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럴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 벨은 질병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살덩이처럼 생겼지만 피로 가득찬 것이었소.
그건 장로님의 책상 안 금고에 들어있다네.
장로님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는 건 그런 의미요.
그 자는 장로님의 몸에 강제로 자신의 피를 주입했소.
장로님께서 그 벨을 울리면 어디서든 장로님 앞으로 찾아올 수 있다고 선언했지."
"피를 그렇게 쓸 수 있다고...?"
피는 생명이고 자신의 생명을 품으니까, 마력이 있다면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도 같다.
대단한 수준급의 실력자라는 의미겠지.
"마지막은 공공의 적 사건인가.
유레크로스, 미리타엔 제국, 엠페레스 삼국이 모두 대장간의 기술자와 거래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버린 사건이네. 수입이 전무해졌지.
그때 대장간에서도 자체적으로 농사를 시작한 것이기도 했고.
한 2년 정도 이어졌던가?
그때 장로님은 처음으로 탈 화폐정책을 시작하셨소.
앞으로도 위급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시행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고 말이지.
그 성과가 이거라네. 도토크 장로님은 어디가서 무시받을 정도의 남자가 아니시네.
오히려, 그렇게 능동적이고 박애적이셨던 분도 없었지.
그때 과감히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멸했을지도 모르오.
정확히는 기술자중 누구도 대장간에 남지 않았겠지. 버티지 못하고 말이오.
2년감 식량없이 살 수는 없으니까. 비록 그 당시 굶는 날이 많았다지만
우리는 버텨냈소, 이 목축도 불가능한 척박한 오지에서."
"대단한 분이네요."
"그렇지... 그렇기에 우리도 믿고 맡길 수 있는 거고."
대장간의 모든 이들은 도토크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 헤세리티 마저도 장로님을 친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니 말일세."
"헤세리티가...?"
"헤세리티는 C1 구역 폭발사고때 양친을 잃었소.
그 아이를 먹여키우고 보살핀게 장로님이시지."
"아...."
"헤세리티에게 장로님은 전부였다네. 아무리 그녀가 억지를 부려도
장로님은 그녀를 밀어주셨소. 의지할 벽이 되어주셨지.
그녀를 이해해준것도 장로님 뿐이었고. 장로님께서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렇군요."
"허어... 말이 길었군. 밥시간이 되었소. 나가서 식사들 합시다!
내가 사지! 하하하!"
"영감님, 무료라면서요! 무슨 생색이야!"
"아...! 역시 대장! 우린 방금까지 고마워할 뻔 했다고!!"
"식사들 맛있게 해요. 난 좀 바빠서."
나는 행복해보이는 땜장이파 바보들을 두고 그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