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기억에 없는 연인 (96/303)



〈 96화 〉기억에 없는 연인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도토크가 내 몸에 박혀있던 48번째 총알을 뽑아내고 있었다.

"정신이 드셨소?"


"아...네..."

"천만 다행이었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오.
이렇게 총을 맞고도 살아있다니, 천운이 따랐나보군."


"하하... 그러네요."


"가만히 누워계시게. 내 지금 총탄을 뽑아내고 있으니까."


그는 핀셋으로 상처를 살짝 열고 그 안에서 총탄을 째냈다.
아무리 봐도 저가는 아닐 약품을 상처위로 뿌려주면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대장간을 위해 수고하다 총을 맞은 자를 버려둘 만큼 나는 박정한 인간이 아니오.
조금 더 쉬고 계시게."


나는 가방을 뒤적이다 그 안에서 RIC-9호약품이 든 플라스크를 꺼냈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걸 마셨다.
안정효과가 몸을 빙 돌기 시작하면 나도 거리낄 것 없이 회복을 시작했다.
이미 상당수의 총알을 뽑아내서인지 회복이 듣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그걸 보고 도토크씨는 대단한 회복포션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 그런게 있으셨군."


"총알을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좀 살겠네요."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군. 총알을 대강 뽑아내기는 했지만,
아직 남은 총알이 있을걸세."

"네, 왼팔에 하나 남았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핀셋을 받아들어 팔에서 총알을 뽑아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자 고통은 금새 아물었다.

"여기서 쉬게. 금방 붕대를 가져와 감아주지."

그렇게 말하고 도토크는 붕대를 가져와 잘라내고 소독약을 환부에 바른 뒤,
 위를 붕대로 감아주었다. 그리곤 풀리지 않게 잘 묶어주고 말했다.


"그나저나 왜 거기 쓰러져 있었던거요?"


"대장간을 공격하려고 한 자가 1대1로 대면을 요구했습니다.
협상을 하자고 하더군요. 더 정확하게 그들의 목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의 요구조건을 거부했더니 바로 벌집으로 만들더라고요."

"정말 빚만 늘어가는군. 그래서 그들의 목적은 뭐요?"


"대장간의 기술자를 희생해서 테팔레스 화산을 분화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분화한 화산의 영향으로 유레크로스를 덮으려는 거고요."

"화산으로 유레크로스를? 그렇다는건 우리는 그 수단으로서 희생되어야하는 존재다 이건가?
미쳤군! 분명 이교도라고 했으니 노리는 것은 유레크로스의 테르도어 대성당일거고.
고작 그런 이유로 기술자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테팔레스 화산의 분화에 대비해
우리 기술자들도 오랜 시간 준비를 해왔소. 두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았지.
그래서 지하에 공동을 두고 그곳으로 용암을 흘려내기도 했고,
화산 분화구에 별도로 억제용 방지턱도 설치했소. 일부러 바다에서 물을 바로 퍼 올릴 수 있도록
급수탱크와 호스도 마련했다오."

"그런 걸로는 막을 수 없어요. 과거 테팔레스 화산의 분화했던 기록을 재현하는 거에요.
화산, 아마 어쩌면 대장간 정도의 규모를 모두 과거로 돌려버릴지도 모릅니다."

"생명체는 어쩌고 말인가...?"

"그건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그정도까지 가려면 소모전이 될테니까 비효율적이기도 하죠.
아마 지형과 사물만 그렇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은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참담한 결과가 있을거에요."


"그런걸 하루 안에 할  있단말인가..."

"오랜 시간 준비해온 걸로 보여요. C1 구역부터 이번에 일어난 C3 구역까지.
모두 그들이 한 거에요. 대장간에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급수전이든 방지턱이든 전부 사라지고 나면 막을 수는 없어요."


"과거에 테팔레스 화산이 폭발했던 이력을 조사하면 말이네.
비정상적으로 활발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네. 저 화산은 살아있는 존재일세.
분노의 사막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막...? 그러고보니... 화산이 바로 옆인데 사막이 존재할 수가 있나...?
땅이 비옥해서 식물이 자라지 못할 환경이 아닌데, 내륙지역도 아닌 분노의사막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이유...?"

"약 400년을 주기로 테팔레스 화산이 분화하면  주변에 있는 지역 일대를 모두 날려버린다네.
원래 식물이 살던 구역이라도 싸그리 불태우고 씨를 말리지.
그렇게 되면 의도적으로 불에 탈 수 있는 식물과 불씨를 옮길 수 있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라네. 고대의 분지와 석굴지라는 유적은 아나?
화산 분화로 인해 쳐박혀 생명이 지워진 곳이라네.
그래서  위로 과거의 인류는 지형을 세웠다네.
자연적으로 용암이 흐르지 못하고, 분출된 화산탄이 날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석산으로 둘러싸여 안카 수림은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서지스도 그래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산 뒤로 도시를 구축한 것이지. 대장간에서 방지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유레크로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걸세.
화산의 영향권 안이니까."

"그런..."

"지금도 테팔레스 화산은 분화구에서 뜨거운 용암을 질질 흘려대고 있다네.
그건 의도적으로 분화를 막기 위해 내부에 축적된 마그마를 빼내는 것이지.
압력과 함께 말이네. 그걸 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테팔레스 화산은 터져서는 안되네. 부탁하네, 아니, 부탁입니다. 그들을 반드시 막아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팔을 꾸욱 붙들었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다. 붕대를 적시는 피가 손에 닿자 그도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미...미안하네... 아팠겠군."

"괜찮습니다."


그의 손도 붉게 물들어 축축해보였다.
한숨 돌리고 시계를 보면 아직도 새벽 5시 47분.

"일단 오늘 내일은 별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대비를 확실히 해둬야 합니다."

"별 일이 없다?"

"직접 담판을 짓고 왔으니까요."

"그렇군... 조금 쉬어도 되겠는가..."


"그래, 잘 해주셨습니다. 조금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요."


 뒤에서 들린 싸늘한 목소리에 도토크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다...당신이 여기에...왜...?"


도토크가 뒤로 나자빠지면 내 어깨 위로 턱 하고 손이 올라온다.
서늘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감각. 묘하게 익숙한 것 같았다.
곧 어깨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남았다.

"말했잖습니까? 엘라 세리타인을 찾으면 연락을 달라고.
당신은 아주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모를 수가 없었다.
빠르게 뒤로 물러나 그 손을 털어내고 돌아보면 내 키를 아득히 뛰어넘는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미로에서 나타난 환영.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는 잊을 수 없었다.
칠흑같은 머리칼이 가볍게 휘날렸다.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그는 내 말에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뭐...? 아...! 못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 헬브람이야.
환생의 저주를 받은 헬브람이라고. 지금은 이렇지만."


"저는 당신을 몰라요. 좀 떨어져주시겠어요?"

 말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하아... 그래요. 그럼 엘라, 대장간에는 어떤 이유로 오셨습니까?"


"엘라?"


"네, 엘라 세리타인. 당신의 이름이잖아요?"

"아니...난, 에리아...에리아에요. 내 이름은 내가 정해요."

"에리아? 그 이름이 좋으면 그렇게 불러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합니다. 당신의 본명은 엘라 세리타인이에요.
어쩌면 내가 지금의 당신보다는 당신을 더  알고 있겠죠.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무능력한 당신을 구제한 것도, 마력을 다루게   것도.
 몸에 피를 불어넣은 것도 나니까 알고 있죠."

"이 피가 전부 당신것이라고요? 그런... 왜...?
나는 왜 그런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죠? 난 누구였지?
아니, 그 전에... 당신은 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거죠?"


"어떻게 알다니. 음, 그건 정말 어려운 질문인데,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존재니까 라고 해두죠."

"같은 어머니?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나요? 당신이 내 형제인건가요?"


"음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같은 존재의 다른 기원에서 태어났어요. 너무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그걸 당신이 몰라야 하니까. 너무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또 눈 앞에서 사라지면 상당히 골치아플 것 같으니까.
나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술자들은 살인자라던데요.
대장간에서 손짓 한번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고요.
당신은 불길한 기운이 난다고 했는데, 이제 알겠어. 대체 당신은 누구죠?"

"참, 이걸 알려줄 수도 없고. 다르말록이 사람 여럿 피곤하게 한다니까."


"다르말록?"


"오, 다르말록은 기억하는건가? 그러면 정말 아슬아슬할지도 모르겠는데?
거기까지 알면 내가 아는 엘라 세리타인이 맞아. 미안하지만 말은 편하게 할게.
괜찮지? 마음같아서는 너도 나한테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날아간 너를 마주보는 것도 이제 익숙해서 말이야. 네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게.
그래서 말이야. 궁금해서 묻겠는데 너한테 다르말록은 어떤 의미야?"


"나는 다르말록에 좋은 기억이 없어요.
덕분에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했었고, 쫒긴 시간도 길었으니까.
이번에도 다르말록이  앞을 막기도 했고."


"호오...? 다르말록이? 영감님,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도토크를 바라보면 도토크는 우물쭈물하다가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대장간을 한번 헤집었던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리라.
조용해진 도토크를 보고 에스트로는 다시 말했다.


"나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엘라를 불편하게 한건지
아는대로 전부 말해주시죠. 한번 더 대장간을 뒤집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만, 지금 사람을 또 죽이려고 하는 건가요?"

"난 널 위해서 그런거야 엘라."


"에리아에요. 날 위해서라는 헛소리 말아요.
기분나쁘니까. 내 눈앞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해요.
보아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한 것 같은데, 수틀리면 바로 자결할겁니다."

내 목숨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값을 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이러면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너무나 간단하게 무너졌다.
어쩌면 허무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거짓말까지 안해도 돼.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 수도 없잖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거니까."

"네...? 대체 당신은 무슨 소릴 하는거죠?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니..."


"연인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미움받고 싶은 남자는 없으니까."


"무슨 소릴 하는거죠..? 당신의 연인이라면 분명히 망각의 미로에 갇힌 탈린일텐데요?"

"뭐야, 벌써 거길 다녀왔다고?"


"망각의 미로가 왜요? 거기서 당신을 봤어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걸 기억해요.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당신의 연인은 내가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따로 자리를 내야  것 같은데.
내 연인은 네가 맞아. 난 널 사랑했고 너는 날 사랑했으니까."


"그럴리가 없어요.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설득력이 없잖아요?"


이 남자는 확실히 매력이 다분했다.
살인자라는 이야길 듣지 않았다면, 혹은 내게 이상한 친근감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혹은, 망각의 미로에 버려진 탈린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의 눈은 오직 나를 대할때 감정이 느껴졌다.
어딘가 먼 아득함. 그리고  사이에서 느껴지는 깊은 슬픔이
왠지 모르게 이 남자는 나를 해치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내게 전했다.
내가 피의 마녀라는걸 말한 적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왜? 알수없는 불안감도,
그에 따른 두려움도 생겨났다. 하지만 제일 의아한건 그걸 뒤덮고도 남을
아주 편안하고 따스한 감정이 그의 품에서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음, 많은 일을 함께 했고, 그러다 사랑하고, 아주 전형적이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게 진실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설명할  없어. 다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말해줄게.
편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요? 여기서 말하시죠!"

"음,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럼 다시 물어볼게 엘ㄹ...아니, 에리아... 이번에는  년째 살고 있어?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한 걸로 봐서 못해도 300년? 400년? 그정도 지난  같은데."


"이...이번...에...?"


"기억이 잘 안나? 그러면 지금 말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뭐야?
이번에도 어디 대륙 한가운데? 아니면 버려진 마굿간? "

"뭐...뭐야...? 당신 누구야...?"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따로 자리를 만들자.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눈치보지 않고 대화할 기회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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