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태초의 저주
내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끌고 나왔을때 그는 저항없이 나를 따랐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거칠어졌네."
"후우... 일단은 내 숙소로 가죠."
우리는 네네미의 여관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갔다.
"대체 당신은 누구죠?"
"그걸 알려주는건 어렵지 않아. 오히려 내가 알려주고 싶을 정도지.
하지만 그러면 안돼. 너는 저주에 걸려있으니까."
"저주?"
"자세한 내용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네가 진실을 알게 되면 발동하는 저주야.
벌써 난 너에게 이걸 4번째 설명하고있다고.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네...번째?"
"잠깐, 내 말을 들으면서 뭔가 추리하려고 하지마.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분명 금방 알게 될거야. 그랬다간 의미가 없다고.
제발 부탁이야. 내가 지금 이걸 몇 백년째 하고 있는지 넌 모를거야."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내게 거짓말을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 날 해칠 생각이 없어요?"
"영원히."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거죠?"
"응... 하나만 물어보겠다고 해놓고 예전처럼 억지부리는건 똑같네."
"예전처럼..?"
"아냐. 난 그냥 너의... 음... 친구니까?"
"친구..."
"그래."
"그럼 말 놔도 되겠네. 나만 존대하기도 억울하니까."
"후후... 그래."
"왜?"
"그 말도 네 번째 들었거든."
"대체 언제?"
"그건 비밀."
"짜증나."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싱글대며 웃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내게만 살갑게 대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한다는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그립고 아득한 감정으로 다가왔으니까.
다만 그 의도가 내가 믿기에 너무 어려웠다는 점이 하나 걸렸다.
내게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모든 현실에 한방울 의구심을 흩뿌렸다.
친구도 아니고 애인? 게다가 가족? 이해가 갈리가 없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나는 그의 말을 차분히 듣기로 했다.
"그래서 대체 저주가 뭔데."
"그걸 알려줄 수 없다는게 안타깝네.
내 이야기를 좀 할까?
나는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지금은 말이야.
보다시피 뱀파이어로 태어났지.
원래는 뱀파이어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어. 저주의 영향이거든.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알기 이전까지는 상당히 절망했었어.
모든 존재는 수명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 굴레를 벗어나는 존재는 몇 없어. 너도 알다시피.
육체가 마모되거나 정신이 닳아 피폐해지거나.
그 두 가지를 모두 거절할 수 있어야 하잖아.
그런 의미에서 뱀파이어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어.
그 이전까지의 '나' 라는 정체성을 슬슬 잊어갈 때였으니까.
뱀파이어는 비교적 자유로웠어. 피만 있다면 무한정 생명을 늘릴 수 있었거든.
너도 알지?"
"피는 곧 생명."
"그래, 피는 곧 생명이야. 그 사람의 기록, 신체 구성. 살아온 이력 모두가 남지.
아무리 인정하기 싫다고 해도 피 한방울이면 그 사람 전체를 알 수 있지.
게다가, 뱀파이어잖아. 피에 관해서는 활용도가 높다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 피를 전해줬다는 의미야?"
"그래. 너는 껍데기에 불과할 정도로 텅 비었으니까.
분명 그렇게 놔둬서는 영생이 의미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
"영생, 그래! 내 영생에 대해 알고있어?"
"간단하지. 그건 너의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이야."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래. 네가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만 않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아, 이거 또 너무 많이 가르쳐주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너 그러면 날 모른다고 했지?"
"그래."
"그럼 아직 괜찮겠네. 마지막 그 녀석에게 이어지지만 않으면.
너 망각의 미로에 간 적이 있다고 했었고?"
"탈린 맞지? 그 여자 이름."
"그래. 탈린이야.
그 미로는 탈린이라는 존재가 가진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
다른 존재의 기억은 그 안에서 소멸해버리고 말아.
가까운 기억부터 먼 기억까지 서서히 말이야.
그래서 빠르게 돌아간 사람은 미로에 대한 기억을 잃는 반면,
오래 갇힌 사람은 모든 기억을 잃고 그 안을 헤매다 아사하거나, 존재가 버려지거나,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되지."
"탈린도 그렇게 미로에게 당한거야?"
"아니, 그 미로와 안개 자체를 탈린이 만들어낸거니까.
탈린에게 걸린 저주가 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거지."
"또 저주라고? 그 저주가 대체 뭐야?"
"궁금해 하지 마. 그런 조건으로 말해주는거잖아.
사고를 연결하지마. 생각이 떠올라도 그냥 무시하고 지내.
그러지 않겠다면 말해줄 수 없어."
"알았어. 계속 말해줘."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감을 잡았다.
묘비로 보이는 비서게 분명히 적혀있던 영원한 망각의 탈린이라는 글.
다르말록을 증오하는 이 남자의 태도로 보아, 다르말록이 아직 건재하던 때에
탈린과 이 남자에게 저주를 걸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저주가 아마 환생의 저주와 망각의 저주일 것이다.
이 남자는 환생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뱀파이어라는 건,
아마 능력과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망각의 저주는 미로의 능력처럼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결국 그렇게 홀로 존재하는 거겠지.
"너, 그 눈을 보면 알아. 지금 생각하고 있는거지?"
"아니?"
"하아... 그걸 믿으라고? 나 헬브람이야. 네 얼굴만 몇 년을 봤는데."
"내가 한 말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가려낼거지?
얼굴가지고 그런걸 구별해낼 수 있다고?
거짓말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누가 가지고 있는데?
누구도 증거없는 거짓말을 판단하고 재단할 권리나 능력은 없어."
"날 아직도 못 믿는다는건 알겠어. 이건 참 슬프네."
에스트로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허탈하게 웃었다.
올백으로 뒤로 넘긴 머리가 참 잘 어울렸다.
"올백머리 잘어울리네."
"알아. 네가 그렇다고 말해줬으니까."
"그...그래...?"
"응. 아주 예전에."
"그래서 망각의 미로에서 널 본건가."
"잠깐, 뭐? 망각의 미로에서 날 봤다고?"
"그래. 아까 말했었던 것 같은데.
탈린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환영처럼 흐릿하게 나타나서 말했어.
'여전히 날 사랑해?' 라고."
"오... 맞아, 그랬지..."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가만히 앉아서 날 바라봤다.
그리고 무표정한 그대로 눈물을 한방울 흘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붉은 피가 흘렀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알려줘."
"당신을 기억하고 있잖아요. 이렇게나 선명하게.
라고 대답했어. 탈린의 기억에 네가 있었다는 건, 탈린이 널 잊지 못했다는 의미잖아.
그래서 넌 탈린의 연인이라고 생각했어."
"아냐..."
"뭐?"
"탈린은 망각의 저주를 받았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건, 네가 가진 기억이야...
네가 저주를 불완전하지만 이겨내고 있다는 의미야..."
"내 기억이라고?"
"탈린의 미로에서 날 봤다니..."
"잠깐, 탈린의 미로는 탈린의 기억을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잖아?
그래서 미로에 안개가 자욱히 끼고 사방이 혼란스러운 거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지울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거라면서.
그런데 왜 내 기억이 미로에 투영되었지..? 그건 내 기억이 아니...
어...? 그러고 보니까 미로에서 왜 마르커스가... 체헤게는 왜...?"
"아냐...! 진정해 엘라! 생각하지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나도 그를 끌어안고 물었다.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말해줘 헬브람. 난 누구야?"
"안돼... 알려줄 수 없어..."
"......"
"미안... 미안해...."
"나는 탈린과 무슨 관계야?"
"아냐, 미안해. 더는 생각하지 말아줘."
"하아... 그래..."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 남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많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이 남자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기만을 빌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내 존재의 끝은 아마 그 탈린일 거라고.
나는 탈린과 이어져있을 것이다. 아마 같은 존재로.
그러나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는 건 없다.
그 미로에는 아직 내가 알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아르간티아, 탈린, 헬브람, 그리고 아마 도르테우스.
이들이 태초에 만들어낸 이야기 어딘가에 내 흔적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그래! 다른 이야기를 하자.
어떤게 궁금해?"
그렇게 말하며 에스트로는 손으로 눈물대신 흐른 피를 슥 닦아냈다.
흘렀던 핏방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손으로 흡수한 것 같았다. 역시 뱀파이어는 확실하다.
"그 피의 능력말인데."
"아, 이거 말인가? 어렵지 않지.
너는 빈 그릇과 같은 존재였어.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전부 비운 상태의 그릇이었지.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너에게 피의 마력을 선물했어.
다행히도 아직까지 본능적으로 잘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그릇이 훌륭해서 그런거겠지."
"그릇이라니? 오히려 그렇게 따지면 뱀파이어가 더 대단하지 않을까?"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꺼져가는 불꽃과 기름을 넣은 랜턴중 어떤게 밝을 것 같아?"
"랜턴이겠지."
"그래, 하지만 불은 장작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어. 장작만 충분하다면
랜턴따위와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화려하고 강력하게 타오르겠지.
비를 맞으면 사그라들겠지만 가림막으로 하늘을 가리면 결국 언젠가는 안전하게 커질거고.
하지만 랜턴은 달라. 아무리 에너지를 많이 넣어주려고 해도, 그 이상 빛날 수는 없어. 결국 심지를 끊을 뿐이야.
그렇게 되면 두번 다시 쓰지 못해. 새로운 심지를 찾아야 하지."
"내가 불이라는거지? 네가 랜턴이고?"
"그래, 그러니까 함부로 하늘을 가린 막을 치우지 말아줘.
그걸 치우지 않아도 태양은 늘 거기 하늘위에 있으니까."
"내 눈으로 태양을 보면 다음날 비가 오더라도 난 행복할 것 같은데."
"아냐! 넌 몰라... 그 저주는..."
"그렇게 말하니까 망각의 저주를 받은게 마치 나인 것 같은데.
같은 말을 여러 번 한다고 하기도 했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거야?"
"아마 아니겠지. 나는, 탈린이야?"
"그래, 말해줄게. 넌 탈린의 본체야.
탈린은 너에게서 떨어져나온 일부... 아니, 이제 네가 일부일지도 모르겠네."
"내 그릇을 채우고 있던게 탈린이라는 이야기지?"
"하나의 존재를 둘로 나눈다는건 엄청난 일이야.
더욱이 저주는 몸에서 쉽게 떼어낼 수 없었어.
그래서 너는 존재라는 껍데기만 남기고 대부분의 능력과 기억을 탈린에게 넘겨야 했고.
원래 죽지 않는 존재니까 탈린도 죽을리가 없었지.
그래서 아르간티아는 영원히 탈린을 가둘 공간을 만든거야.
우연히 그 입구를 찾은 인간들이 거기 들어가게 된건 예상 외였지만."
"그럼, 나는 뭐였어?"
"이미 그런 말을 하기에는 많이 늦었겠지만, 이 이상은 알려줄 수 없어.
더는 추론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의 눈이 완고하게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런 너에게 내 능력을 나눈거야. 이제 말해줘.
왜 여기서 다르말록에게 발목이 잡힌건지."
"다르말록의 추종자들이 이 대장간을 없애려고 해.
정확하게는 유레크로스지.
테팔레스 화산을 폭파시킬 생각이야. 3일 후에."
"미친놈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거지?"
"다르말록의 짓이라고 말할거래. 영향력을 키우겠다고 말이야."
"아르간티아가 한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생각인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 좋아, 내가 도와줄게.
저 화산을 폭파시킨다라... 아예 마그마를 쫙 빼버리면 되나?"
"소용 없어. 테팔레스 화산을 지정해서 과거로 시간을 돌려버릴 심산이야."
"그런게 가능할리가 없을텐데... 비슷한걸 본 기억은 있어. 잠시만... 아, 기억났다.
하아... 나름 체계적인 조사를 하셨군. 기록을 건드리는 마법을 꺼내다니.
유레크로스가 문제가 아니겠는데?"
"뭐가 더 있다고?"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시간은 단순히 복사해서 옮겨오거나 재연하는게 아냐.
생각해봐. 과거를 재연하는 능력이라면 화산은 적어도 몇십년 이전의 화산이 된다는건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앞으로 시간이 흐를 때마다 우리의 시간에 비해서
화산의 시간은 몇 십년씩 뒤쳐진다는 의미잖아? 그런게 가능할리 없지."
"그럼 무슨 의미지?"
"과거로 통하는 초대형 포탈을 열겠다는 의미지.
그 범위 대상을 대장간으로 하겠다는 의미고.
과거의 화산을 현재로, 현재의 화산을 과거로 일시적으로 뒤바꾸겠다는 말이야.
과거의 화산이 여기서 터진다면, 과거에 화산이 터진 일이 없던게 되어버려.
그랬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게 과거가 변해버린다.
국가 하나 정도는 갈아넣어야 가능할 마력량인데..."
"막을 방법은?"
"열지 못하게 하거나, 화산이 터지기 전에 포탈을 닫아버리거나."
"하나같이 어려운데."
"화산을 분화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돼.
그러면 과거로 돌아간 테팔레스 화산이 터지지 않게 되니까.
화산을 건드리는건 뭐가 됐건 금지일거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마법진에 간섭해서 마법 자체를 뭉개는게 좋겠지."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이 남자를 여기서 만나게 된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막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