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변수
오늘은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C는 그들을 흩어보며 말했다.
"기술자들은 어떻게 했나요?"
그러면 피부가 검은 남자가 대답했다.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현재 세뇌를 계속 진행중입니다.
36%는 이미 교리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좋아요. 이제 내일모레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니까
확실히 마무리를 해 줬으면 좋겠네요.
마법진은 어떻게 했죠?"
"그것도 회로파 기술자들을 다독여 연결시켜 두었습니다.
바로 가동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즉시 대장간을 과거의 대장간과
교체해버릴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요... 정말 잘 했어요."
교체? 대장간을 교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고
수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광경에 소름도 돋았다.
이전에 내가 보고싶어서 상당히 애를 썼던 편지와 글을 볼 기회가 있었다.
소미에르의 목숨을 바꿔 보았던 만큼 그리 쉽게 잊을수야 없었다.
글은 보고서 비슷한 형식이었다. 대부분은 일기와 비슷했는데,
크게 어렵거나 문제되는 부분은 없었는데, 그 중 하나.
독특한 형태로 써진 것이 하나 있었다.
[다르말록의 기록인가...]
다르말록에 대해 적어둔 그 일지로 보이는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조사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 같았다.
-기록에 대해서.
다르말록은 기록을 손에 넣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끝까지 기록을 얻지 못했다.
그의 반뿐인 기록은 그가 유일신으로 남지 못하게 하였다.
아주 예전에 그를 적대하던 자들이 기록을 숨겼다.
다르말록이 가진 기록은 모두 흩어졌고 이제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존재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원의 존재로 남을 기록을 남김없이 잊어버리는 일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 되는지 알지 못한 자들 때문에
인류는 아직까지도 완변해지지 못했다.
그럼 완전한 존재인 기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기록은 완전하고 또 영원한 것인데,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기록에 대해서? 기록이 대체 뭐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방을 돌아다니면 에리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체헤게, 거기는 어때?]
[다행히 아직은 뭔가를 직접적으로 실행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마법진의 위치는 파악했어?]
[그것도 잘 모르겠군.]
[그래? 그럼 일단 집단의 규모 정도만 말해줘.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기술자들을 제외하고서 수백은 되어보인다.
물론 이들 모두가 열성적인 신자인 것 같지는 않지만
불려온 이들이나 잡혀온 이들이나, 하나같이 희망은 없는 것 같다.
말한대로라면 이들은 모두 제물로 쓰인다는 거겠지.]
[아마 그렇겠지. 이쪽은 조력자를 찾았어. 혹시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화산은 건드리지마.
그걸 건들면 큰일이 날 테니까.]
[건드린다? 나는 유령이다. 애초에 물건을 집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 그래. 그럼 됐고.]
[그나저나 궁금하군, 그새 조력자가 생겼나? 대장간 내에서는 우릴 도울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뉴페이스라도 나타난 건가?]
[그래,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라는 남자야.]
[그건 분명 살인자 아니었나?]
[나도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신용해도 될 것 같아.]
[신용해도 된다? 그건 또 어떤 기준이지? 내가 할 말도 아니다만
너무 무방비한 것 아닌가? 우리가 나쁜 놈들만 만나긴 했어도
대체적으로 정도를 가려가며 만나지 않았었나?]
[모르겠어.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편안한 느낌이 들어. 어딘가 그리운 느낌.
그리고 이 남자는 나를 알고 있어.]
[마녀 에리아 말이냐?]
[아니, 그 이전의 나. 엘라 세리타인을 알고있어.]
[엘라 세리타인? 아, 그 살인자가 찾고 있다던 그 여자인가...
뭐? 엘라 세리타인? 그게... 맙소사...]
[나도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 이 남자가 하는 말을 전부 믿을수는 없어.
하지만 왠지 그게 사실이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그 남자가 뭐라고 말했지?]
[내가... 오래전에 헤어진 자신의 애인이래.]
[.....]
[나도 당황했었어.]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지...? 그 말을 믿을건가?]
[솔직히, 그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가... 더 조사를 하고 나면 다시 연락하겠다.]
[그래. 알겠어.]
대화가 끝나고 왠지 나는 어딘지 모를 허탈감을 느꼈다.
그녀가 내게 의지하던 것처럼 나역시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새로운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더욱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관계의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한심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다닌 그 여자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은 화가 났다.
이제껏 버려두고 있다가 나타나서는 애인이었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리아에게도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대뜸 나타난 자를 신용한다고?
나에게 전한 그 말투에서 서운함을 느꼈다.
아니, 내가 내까짓게 뭐라고. 애초에 장난감으로서 불려온 존재일 뿐인데.
전에 콜린에서 겔을 보면서 조소어린 시선으로 그를 동정했다.
그런 생각이 나자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나는 단순히 집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감정은 단순한 집착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둘 다 서로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그 절대적인 신뢰의 전제가
지금 눈 앞에서 금이 가 버렸다.
억지로 진정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가... 느껴졌다.
[하아...]
생각은 억지로 밀어두고 자리를 옮겼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왠지 좀 기분이 이상한데."
"너도? 나도 그러네. 뭔가 불쾌한 느낌?"
이교도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현상의 원인이 나일 거라고
나는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유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유령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내가 더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으로서의 나에 집착했고
또 그런 나를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마녀로서의 그녀에게 집착했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나보다 훨씬 순수한 인간이었다.
죽지 않는 인간과 죽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사념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에이 씨발... 왜 이렇게 추워..."
그렇게 말한 신자 하나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어...? 저거 뭐야?"
그 순간이었다.
내가 보이지 않아야 할 그 허공을 바라보며
그 신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다가갔다.
"어...? 어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섰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진정하지 못하는 동공으로 나를 훑었다.
"다...다르말록...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허리춤에 묶인 구슬을 바라보았다.
보급형으로 대충 만들어진 오브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럴리가 없는데. 보일리가 없어야 하는데.
내 얼굴이 붉은 빛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검붉은 것이 천천히 구심점을 향해 돌아가는 그 사이로 나는 존재했다.
"다르말록이시다!!!"
그가 그렇게 외쳤다.
그 찰나의 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르르 방에서 인원들이 딸려나온다.
나는 수많은 인간들 앞에 발가벗겨진 것처럼 홀로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둘러싼 인간 가운데서 한 명의 여자가 걸어나왔다.
그건 C였다. C는 나를 바라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당신이... 다르말록이십니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벽 사이로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군중은 나를 따라왔다.
내가 도망치고 싶어 달릴 수록 그들은 나를 뒤따랐다.
나는 신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멈출 수 없었고 내가 보인 순간 그들에게 나는 불청객일 뿐이니까.
어떻게든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 숨겨진 방으로 들어왔다.
첼의 시체가 숨겨진 곳이었다. 신도들은 이 공간을 몰랐다.
하나둘 숨겨진 방의 존재를 지나쳐갔다.
단 한 명만 빼고.
C는 언제 그랬냐는 것 처럼 몰래 방에 뒤따라 들어오고 홀로 날 향해 독백했다.
"당신이야... 당신이 나를 구원해주기 위해서...
아아... 그런거죠? 제가 계획을 멈춰버려서... 그래서 나타나신거죠?
이 병신같은년을 용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그녀의 독백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기도했어요. 당신이 어떤 존재로 강림하든 우린 기다릴 수 있었어요.
타오르는 불로 강림할거라고도 했고, 죽음으로 다가올 거라고도 했어요.
우리가 결국 틀리지 않았다는걸 알려준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답니다."
그렇게 말하고 C는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그 너울거리는 수녀복을 하나씩 정갈하게 벗어내려가는
그녀의 눈에서 나는 아주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데. 그녀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나는 그저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일 뿐인데.
미친 여자. 이 여자는 미친게 분명했다.
멋대로 자신의 구원에 나를 끼워맞추고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멋대로 판단을 마쳤다.
신은 구실일 뿐이었다.
이 여자에게 신이라는 것은 그저 자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요,
구원을 빙자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면죄부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겹쳐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미쳐있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어요. 당신을 만나면 반드시 나를 돌아보게 하겠다고.
내가 얼마나 많은걸 준비했는지 알잖아요.
날 봐줘요... 이 몸은 당신을 위해 준비된 성배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상당히 육감적이었다.
그 위로 보이는 흉터들이 눈에 들어온다.
에리아와 다른 여체. 어쩌면 이게 정말 나와 더 가깝지 않을까.
나는 그 흉터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물론 닿지 않았다.
그저 빛이 그 위로 스치는 것처럼, 어쩌면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것처럼
내 영혼은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날... 봐주는군요..."
그녀는 제단에 불을 올렸다.
그 위로 죽은 첼을 올리고 불태웠다.
시체 타는 냄새가 방을 한가득 메우고 연기가 자욱해진다.
그녀는 아까보다 차분해진 눈으로 말했다.
"난 영혼을 붙들어두는 주술을 오랜 시간 연구했어요.
그게 다 고서 덕분이지만요. 선대의 누군가가 남긴 술서...
얼핏 보면 소설책같지만, 사실 그 가치는 애너그램에 있었죠.
종치는 자들의 기억... 그게 금서로 지정된 이유....
일생을 흑마술에 들이부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의 집대성이기 때문이죠...
멍청한 사람들은 그걸 예술적 가치로 판단하곤 했어요.
난 그 책을 외울 정도로 읽었으니까 알아요..."
그리고 그녀는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외설적인 몸을 한껏 드러내며 그녀가 바닥에 드러누워 말했다.
"난 당신을 맞아들일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은으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진품이랑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그걸 자신의 처녀에 꽂아넣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오면 그녀는 바닥에 누워 말했다.
"이 초라한 몸뚱이가 영원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끌려갔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바닥에서 일렁이고 있던 마법진이 나를 끌어당겼다.
천천히 나는 그 사이로 이끌렸다.
녹아드는 감각? 어쩌면 스며드는 감각?
정신을 아득히 놓아버릴 것 같은 쾌감과 고통이 동반하는 기억이
내 몸을 녹여버릴 것 같았다.
"내 가치는 완전해졌어요..."
그 말이 머릿속으로 울렸다.
"난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나의 것이에요."
고통이 느껴졌다.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