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백화요란 (100/303)



〈 100화 〉백화요란

시간은 6시 53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체헤게와 연결이 사라진 것처럼  끊겨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량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기가 좋은 이들이 하나 둘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곧장 나는 도토크와 만났다.
이미 도토크도 상황을 파악하고 수장들을 불러놓은 상태였다.
내가 에스트로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그들의 눈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충격이었다.
헤세리티가 충격에 소리쳤다.

"에리아!! 기어이 대장간을 배신한거냐!  저번에 역시 네 년을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네 옆에 있는 자가 어떤 괴물인지 알면서도 데려온 것인가!"

"오? 저번에 봤던 그 건방진 여자분이시군요. 좋은 판단이네요.
화산에 휘말려 죽는 것보단 지금 곱게 죽어서 제 생명연장의 꿈에 일조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주 차분하게 대답하는 에스트로의 말에 헤세리티는 금새 꼬리를 말았다.
그런 그녀를 따로 불러 장로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장로님! 그렇다는건  여자가 그 엘라 세리타인이라는 말이잖습니까!
그게 면죄부가 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저 분들이 아니라면 대를 잇지 못하게 되네.
잠깐의 수모와 대장간 수백의 목숨을 저울질할 수는 없잖은가.
그리고 지금은 무령님이 계시네. 무령께서는 정말 우리를 살리려고 노력하셨던  봤잖은가.
그게 아니라면 대장간을 구할 계책이 아직 남았는가?"

"그건..."

상황은 겨우 정리되었다.
르미에르는 빠른 상황판단을 마치고 처음부터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고,
네버브레이크는 이미 나와 에스트로 양쪽 모두에게 대들 여력이 없었다.

"무령님, 분명 내일까지는 별 일이 없을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는데... 하아..."

"저 놈들이 약속도 지키지 않는 이들이었다는 소리지."

에스트로가 거들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렇게 일자를 단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소.
왜 이런 일이 생긴거요...?"

헤세리티가 그렇게 말을 얹었다.
그 말대로였다. 게다가 내게는 짚이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체헤게가 모종의 이유로 들켜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존재가 사라졌거나, 다시 영혼이 돌아가버렸다거나.
그렇게 따지면 이건 내 잘못이 맞았다.

"일단 지체할 시간이 없어. 마법진의 위치는 내가 찾아볼게.
바로 인원을 대피시켜줘."

내가 그렇게 말하면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버브레이크와 헤세리티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게, 기술자들도 포함해서.
르미에르는 지금 남아있는 회로파 기술자들을 데리고 무령님을 따르게나.
회로파 기술자들의 실추된 영예를 되찾을 기회를 주는걸세.
나는 성연을 모셔오도록 하겠네. 그... 혹시 자네는 어쩔텐가...?"

장로의 시선을 받은 에스트로는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어보였다.
그걸 보고 장로는 내게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명령을 받은 수장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면 도토크는 내게 말했다.

"저희는... 살  있습니까?"

이제껏 수장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나약한 모습이었다.
아마 지휘를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없었던 거겠지.
나도 그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달리는 그의 뒷모습이 유독 더 작아 보였다.
나는 에스트로와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콜로세움에서는 그래도 적이 앞으로 찾아오기는 했었는데..."

곧장 화산으로 향하는 고속 광차를 타고 테팔레스 화산으로 출발했다.
이미 멀리서 보아도 평소의 화산과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은 모습에
나는 타는 목을 겨우 침으로 적셔야 했다.
테팔레스 화산에 도착해서 나와 에스트로가 멈춰서있고,  뒤로 르미에르와 기술자들 일부가 남아있었다.
분명 회로파 기술자들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기계파와 땜장이  사람들도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라면 스팅우스 정도였다.

"하하! 미안하게 됐소. 난 아무래도 헤세리티와 얼굴 마주보는게 어려울 것 같아 말이오.
안그래도 저 살인귀가 돌아온 마당에 우리 수장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가 보오.
몇 주 전부터 꼬장 피우는 횟수가 팍 늘어서 이제 갱년기인 줄은 알았건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에는 감당이 안되더군."

"조용! 면전에서 살인귀라고 말하는건 무슨 생각이오!"

르미에르가 다그치면 그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살만치 살았기도 하니 나도 옛 친구나 만날까 했지 뭐요."

그들이 만담아닌 만담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화산 앞에서 마력의 기운을 찾아야 했다.

"어때, 뭐가 좀 느껴져?"

"아니, 전혀. 그렇게나 큰 마력반응이 있는데도 진원지는 전혀 모르겠어."

"저쪽이다."

에스트로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나를 휙 안아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으, 왜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안는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싫어?"

"달리기나 해."

로봇이 아니라 사람에게 안긴다는건 꽤나 감촉이 달랐다.
온기가 느껴진다는 점이 제일 달랐고, 딱딱한 감촉 없이 편해서 엉덩이나 허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나를 안은채로 화산을 무시하고 달렸다.
화산의 지하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법진을 찾아낸 것은
당장 어제까지도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사막의 지하였다.

"여기라고?"

"분명해."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바닥을 툭툭 두드리더니 내게 말했다.

"이 바닥에 있어. 모래만 싹 걷어내면 되겠는데, 그정도는 할 수 있지?"

"날 뭘로 보고."

바닥의 모래들을 보고 유사를 일으켰다.
많던 모래들이 한점으로 일제히 빨려들어가면서 바닥이 꺼지기 시작한다.
그 내부로 쏟아지기 시작한 모래는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밑을 메우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바닥에는 큰 공간이 생겼다.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거요?"

르미에르가 내게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입구로 보이는 작은 철문이 있었다.
철문은 굳게 닫힌 것 같아 보였는데, 방금 전까지도 사용한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었다.
열쇠 같은게 없이도 근력으로 당기니 열렸기에 다들 그곳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깔끔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짙은 피냄새가 풍겼다.

"여기가 맞는 것 같네."

"저희 기술자들은 싸움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저희가 방해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뒤에서 한 젊은 기술자가 말했다.
그 말을 잘라내듯이 르미에르가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은 자는 돌아가게.
다만 무령께서는 대장간을 위해 이곳까지  주신걸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C가 그곳에 서 있었다. 수녀복을 입은건 똑같았지만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가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조금은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좋은 판단이에요. 위험을 무릅쓰고 나갈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거겠죠.
어서 오세요 대장간의 기술자 여러분. 마침 마력이 슬슬 부족하던 차였거든요.
아지트를 찾아오신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우리는 이미 할 일을  마쳤답니다.
7시 30분에 화산은 폭발할거에요. 이제 1분 정도 남았나요..?"

펑!

"시작됐네요."

그 말을 시작으로 쾅쾅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도 오차 범위가 크지는 않네요. 네, 저는 목적을 완수했어요.
그럼 여러분. 안녕히."

그렇게 말하고 C는위상거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대장간까지 가지 않아도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화려하게 폭발하기 시작한 화산에서부터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퍼지는 화산재와 연기,
그리고 흐르기 시작한 용암과 수없이 쾅쾅 터져대며 흩뿌려지는 검은 암석의 비.
화산탄들은 훨씬 멀리 떨어진 사막의 초입에까지 날아와 발치에 꽂혔다.

"모두 다시 안쪽으로 피신한다!"

우리는 다시 지하 아지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즉시 증거가 될만한 것들과 마법진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먼저 활동적인 스팅우스와 일부 땜장이파 기술자들이 뛰쳐나갔고,
남은 인원들은 모두 마법진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체헤게!!"

혹시나 해서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술자들은 흩어져 마법진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에스트로가 상당히 서늘한 무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피냄새가 나. 많이도 죽었는데."

그가 향한 곳은 복도  방의 책장 뒤 숨겨진 공간.
그곳에서 나는 거대한 마법진을 찾아냈다.
 책장과 이어지는 공간에는 제단과 함께 천장을 덮은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천,
그리고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있는 많은 사람들이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채 널브러져있었다.

"땅에 그린 것도 아니고 천에 피와 마력을 섞어 그렸어. 지우기는 어려울 것 같아."

"나도 그래. 아까운 피에 괜한짓을 하는데."

"이럴 때가 아니오 무령님! 지금도 대장간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거요!
부디 조치를 취해주시오!"

마법진은 무차별적으로 주변에 있는 인원들에게서 마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 덕에 기술자들은 벌써부터 하나같이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코피를 흘리며 벽을 짚은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점차 지하에서 쿠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 시작되었다.
화산의 분출로 인해 지진이 시작된 것 같았다.

"지진이오!
테팔레스 화산이 분출하면서 지진이 동반되었던 것은
첫 폭발때 뿐이오!
그 폭발은 이후 있었던 모든 폭발을 합한 것보다 더한 피해를 냈었소!
이후로는 걷잡을  없을거요!
유레크로스가 위험하오!"

르미에르가 외쳤다.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마법진을 바로 분석하고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 거대한 마법진을 흝어보는 것은 당연히 시간이 필요했다.

"마력량도 장난이 아니고, 정말 과거와 시간을 이어버리는 대형 워프홀이야.
마법진의 재료로는 피를 사용해야 하고, 피에 섞은 금속성분에 반응해서 작동하는 구조야.
수정하려면 같은 재료를 써서 마법진의 구조를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마력요구량은 1분 유지하는데 사람 세명분...
사람이 죽으면 시체까지 분해해서 유기체에서 마력을 추가로 뽑아내는 구조야.
피에 섞인 재료를 먼저 알아내지 못하면 고칠 수가 없어..."

"재료는 무엇이오!!"

르미에르의 외침과 함께 나도 계산이 끝났다.

"재료는... 황동..."

에스트로가 말했다.

"황동을 대장간에서 가져오면 되겠군. 기술자들을 데리고 황동을 가져오시죠."

"그...그건..."

"황동을 모두 치워버린건 이것 때문이었어...
유레크로스로 가는 기술자들을 모두 죽여버릴 심산으로 사막에 아지트를 잡은거였고...
황동을 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캐럴본을 대량으로 주문한거야...
이 미친놈들..."

"그...그럼 내가 대장간에서 남은 황동을 구해오겠소!
가구, 도구, 뭐라도 긁어모아 오겠소!!
부디 버티며 그동안 마법진을 분석해주시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기술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최대한 빠르게 다녀온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1시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시간 동안 화산을 방치할 수도 없었고, 그 전에 피해가  심해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르미에르와 기술자들은 빠르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신음과 일성이었다.

"무슨...!"

오히려 위쪽에서 우르르 몰려 내려오는 광신도들이 기술자들을 죽이며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기술자들이 올거란건 알고 있었다!!"

"쳐라!!"

"으아악!!"

"르미에르님을 지켜!!"

겨우 위층에서 쓸려나가는 기술자들의 피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고
르미에르를 포함한  안되는 살아남은 기술자들은 다시 내가 있는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스팅우스도 그때 방으로 들어왔다. 겨우 살아 돌아온  같았다.

"무령님..."

"여기 있으면 마력을 실시간으로 빨려서 죽을거야."

"저희를 살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장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르미에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미 기술자들도 거의 남지 않았다.
생존자는 6명 정도였다. 게다가 그마저도 숨만 겨우 붙어있는 정도였고,
나와 에스트로 역시도 실시간으로 마력이 빨려나가는 탓에 벌써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다르말록은 정말 하루도 마음에 드는 날이 없군..."

에스트로는 아까보다 훨씬 지쳐보였다.
전열에서 달려드는 광신도들을 막아내면서 한명한명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빠르게 말라가는 광신도들이 복도에 하나 둘 쌓여가기 시작했다.
에스트로에게 물리적인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몸 전체가 혈액으로 변해서는 피를 흩뿌리는 모습에는 소름도 돋았다.
한참을 버티던 와중에 내가 말했다.

"황동이 없으면 진척되지 않아. 길을 뚫자."

"미안, 버티는 것도 힘들어. 마력이 슬슬 떨어져가거든.
 말도 안되는 녀석이 쭉쭉 뽑아가고 있어."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복귀용 마법진이라도 하나 그려놓고 오는건데."

"대장간에도 황동은 없었소. 어쩔 수 없는게요... 우리가 어리석었소.
 의뢰를 받아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이제 기도하는 수밖에 없나..."

"그럴...필요는 없을 것 같소."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팅우스였다.
이미 복부에 흠뻑 피가 흘러 오래 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황동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소...?"

"그렇기야 한데..."

"하... 죽기 전에 한번 정도는 영웅이라고 불리고 싶었지...
아마 우리 영웅님도.... 그걸 바랄거요...."

그가 내민 손에서 툭 하고 떨어진 것은 낡은 반지였다.

"황동은 다른 말로... 놋쇠라고도... 부르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끈이 묶인 반지는 아직 조금 따뜻했다.
나는 반지와 스팅우스의 피로 마법진을 고치기 시작했다.
반지는 형태를 바꾸며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피와 섞여 매끄럽게 반짝였다.
마법진에 섞어넣으면서 나는 마법진이 요구하는 마력량을 없애버렸다.
마법진에서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마법이 해제되는 것은 당연한 순번이었다.
아주 천천히 뿌드득 소리를 내면서 천이 찢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툭 끊어지며 지하 전체를 울리던 진동이 사그라들었다.

"끝...났어..."

몸에서 빠져나가던 마력이 멈추고, 죽어가던 기술자들의 허덕이는 숨이 이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이쪽으로 달려오던 광신도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떻게...! 황동은 없었을텐데!!"

화가 잔뜩 난 에스트로가 그들을 죽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나 둘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면 그는 땀을 흘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마력과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기술자는 오직 다섯 명 남아있었다.
처참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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