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높은 자와 낮은 자
사막의 모래 위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힘이 풀린 다리를 모래가 덮으면
나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난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해결된 일은 없고 상황은 점차 나빠진다.
게다가 내가 알아내려고 한 일은 모르는게 나을 거라고 못박혔다.
이제는 동행하는 사람도 없다.
체헤게가 없이는 마르커스씨가 만들어준 로봇을 가지고 갈 수도 없었기에
별 수 없이 그걸로 도토크씨를 살려내야 했다.
유레크로스가 있는 페세티아 대륙에서 안카 숲을 지나 미리타엔으로 갔다가
거기서 망각의 미로에 들렀고, 이후로 대교를 지나 대장간으로 돌아와
다시 페세티아의 유레크로스로 간다니 일반적으로는 매우 비효율적인 루트였다.
울어서인지 목이 말랐다.
사막에서 수분이 모자란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탈수증으로 쓰러지는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무방비해진다는건
그만큼 위험의 리스크를 지는 행위니까.
가방을 뒤적여 마실 만한 것을 찾았지만
이미 만들어놓은 에스테리카는 전부 마신 상태였다.
한참을 걸어도 나아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결국 C가 마련해두었던 이교도의 아지트를 마주하고 나서 생각했다.
"오랜만에 좀 쉬러 갈까..."
나는 바닥에 굳게 닫힌 철문에 모래로 마법진을 그렸다.
열심히 그렸지만 바람으로 인해 모래가 허물어지는 탓에 여러번 다시 그렸다.
미리타엔 제국의 작은 상담소. 임시로 킬레리에게 맡겨뒀었다.
거기서 조금이나마 쉬고 싶었다.
대장간같은 한시가 아쉬운 상황에서는 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당장 내게 위협이 닥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겨우 완성한 진에 마력을 흘리고 철문을 열면 철문 너머의 공간이 상담소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위치를 좌표로 지정해야 하는 마법진과 다르게
지정한 곳으로 이동시켜주기 때문에 자세한 위치 좌표를 몰라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문제라면 '문' 이라는 것이 존재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상담소는 상당히 깨끗했다.
사람이 신경써서 관리한 흔적이 보였고,
그날 그날의 매출을 정리한 장부도 놓여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원래 하려고 한 일은 말 그대로 간단한 고민을 들어주고
포션이나 음료를 파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영 아니었지만.
나는 좁은 방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앞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후에 커피를 끓였다.
보편적으로 마실 에스테리카를 끓일까 하다가 에레푸틴을 끓였다.
헬라레소? 그런건 한동안 보기도 싫을 것 같았다.
에레푸틴을 내린 후에 입에 가져다 대면 그제서야 피로가 몰려온다.
왈칵 쏟아진 눈물에 거울을 바라보면 너무나도 퀭한 내가 보였다.
"아아아...."
내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 문이 열리고 밖에서 킬레리가 들어온다.
"어...! 무령님...?"
"오랜만이네."
"킬레리 2811호, 무령님을 뵙습니다."
"그래."
"안색이 안좋으십니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냐."
"실례했습니다."
킬레리는 눈치가 상당히 빨랐다.
내게 그 이상은 묻지 않았고, 다시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접대했다.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할까 생각하다가 조용히 구석에 마련된 간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무 생각 하지않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상당히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요 며칠 새 쉴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생각보다 푹 잘 수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내 앞에는 킬레리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 대기하고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어, 나 없을 때도 잘 지키고 있었구나."
"네, 마스터의 비서로서 일하는 여타 킬레리에 비해 여유로운 편입니다.
평균 기대수명도 4배 이상 높은 편입니다. 저로서는 아주 수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마스터께서는 무령님의 가게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후 어떠한 주사나 개조 수술 없이 업무에 집중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임신중이던 클론 또한 무사히 인큐베이터에 옮겼습니다."
"다행이네."
"이제 어떠한 연유로 돌아오신 건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분명 미리타엔을 떠나시면서 엠페레스로 가신다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랬었지. 그러다가 사정이 조금 생겨서."
"옆에 동행하던 로봇의 존재 역시 사라졌습니다."
"나를 떠났어."
"그렇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술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위스키는 있을까?"
"겔루드 위스키가 있습니다. 일전에 에반제인 대공께서 가게의 번영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겔루드라... 좋네. 그걸로 줘. 안줏거리는 없어?"
"패패루를 말려 포를 뜬 것이 있습니다. 드시겠습니까?"
"뭐든. 너도 한잔 받지 그래?"
"기꺼이 받겠습니다."
킬레리는 그렇게 말하고 선반에서 마른 패패루의 포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작은 접시에 흰 소스와 붉은 소스를 덜었다.
온더락 글라스를 꺼내 위스키를 소량 따르고는 내게 물었다.
"가게에 있는 글라스가 온더록 글라스 뿐이라 죄송합니다.
얼음이 필요하시다면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가게의 작은 냉장고에서 단단히 얼어있는 얼음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조각칼 하나를 선반에서 꺼내더니 사라락 사라락 얼음을 깎기 시작했다.
상당히 능숙한 솜씨로 얼음을 깎아 공을 만들어 잔의 크기에 맞게 다듬어서는
그걸 살포시 잔에 넣는다.
"고마워, 너도 이제 한 잔 받아."
내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잔에 겔루드를 부어주면 킬레리는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으시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제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킬레리 답지 않네 원래 그런걸 함부로 묻는 편이 아니지 않았어?."
"네. 그랬습니다만, 무령께서 맡겨주신 상담소를 운영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능숙하구나 너도. 아주 고단수야."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정말 궁금한거야. 어떻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
너희는 노예 신분이잖아. 그런데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마치 고등교육을 마친 귀족이나 학자같아.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단순히 노예에서 나올 수 있는건 아닐텐데."
"아시다시피 고급 하녀는 클론으로 유지되고 복제됩니다.
그런 하녀들의 모체가 되는 것이 네리 M 모귀드 입니다.
그녀는 미리타엔제국 역사상 제일 품격있고 완벽한 하녀장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녀가 죽기 전 남긴 난소와 자궁, 그리고 혈액을 비롯한 줄기세포를 통해
제국은 그녀를 무제한으로 복제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외모와 지능상태, 기본적인 성격은 그녀의 것을 따릅니다."
"그러면 이전에 노예시장에서 구입한다고 한 킬레리는 뭐야?"
"변덕입니다. 단순한 변덕. 아무리 고성능이라도 하나만 계속 사용하면 질리기 마련입니다.
값도 더 저렴하고요. 전적으로 마스터의 취향을 따릅니다."
"네리 M 모귀드의 클론은 뭐야?"
"일정 작위 이상의 귀족에게만 지급되며,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그 절차를 통과하면 한명의 클론 하녀가 제공됩니다.
이후 그 클론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소유주의 자유이십니다.
마스터께서는 저희를 재 복제 하시기로 하셨고, 그 복제 기간의 공백을
노예시장의 일반 노예로 메우십니다.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할 때 까지 적어도 3달이 걸리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죽어버리는 킬레리의 자리는 계속 메워져야 합니다."
"그렇구나."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 잔을 홀짝였다.
"그럼 너는 상당히 귀하다는 의미네?"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고급품으로 출고되어 귀족분들께 제공되기는 합니다만
그건 제가 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름값 때문에 지출되는 비용을 생각하면 일반 노예를 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 킬레리를 나한테 넘겨줘도 되는건가?"
"저는 마스터께서 무령께 보내는 일종의 조공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지비용에 대해서는 무령께서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마스터께서 지원하고 계십니다."
"그럴 필요 없어. 여기 있는 동안에는 상담소 유지비용을 제외하고는 다 네가 써도 돼."
"저는 이미 무령님 덕에 여유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배려는 불필요합니다."
"알겠어. 말을 바꾸자. 상담소의 유지 관리비용에는 당연히 너도 포함이야.
부담스러울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 다 쓰라고는 안할게.
순 이익의 30%는 너를 위해 쓰도록 해."
"과분합니다."
"명령에 부복하는거야?"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생각보다 맛이 고소한 느낌이 있었다.
부즈가 튀지 않는 것이 역시 고급은 고급이다.
목넘김이 살짝 화하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는 좀 쉬고 싶어서 왔어. 알지?"
"그렇게 보이십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건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줘."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기에 무전기는 처리해두었습니다."
"무전기..?"
그렇게 말하는 킬레리의 귀를 보면 귀고리가 하나 달려있었다.
전파를 차단하는 장치로 보였다.
붉은 불이 들어와 있었다.
"게비디가 뭐라고 안해?"
"그렇습니다. 무령께서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네. 내일은 조금 까다로운 해명이 필요하겠군요."
"그런건 또 어디서 구한거야?"
"가게 내부에 설치되어있는 도촬 카메라와 도청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유지보수 비용에서 차감해 구입했습니다.
가게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귀고리 형태로 가공한 것입니다."
"가게에 그런게 설치되어 있다고?"
"네, 길드에서 건물 재건축 당시에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종 가게에 찾아와 저를 노려보고는 하지만
길드에서 먼저 불법으로 무령님의 가게에 장치를 설치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들어온 클레임은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나 유능했다.
"너 기대수명이 며칠이랬지?"
"외압이 없을 경우 앞으로 3개월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외모는 너무나 수수했다.
오히려 성욕을 반영한 몸을 하고 있는 탓에 수명이 갈려나갔다.
머리는 살짝 희끗하게 바랬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냈다.
나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품이기 때문에 바늘 끝에 특수 가공처리를 했다.
그걸로 내 피를 15ml 뽑아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팔 줘봐."
순순히 팔을 내미는 그녀에게 주사기를 꽂아 피를 주입했다.
"O형이니까 걱정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죽이실 목적이었다고 하셔도 거부하지 않았을겁니다."
노예들에게, 특히 킬레리에게서 보이는 이 무감각함은 나를 되려 어색하게 만든다.
물론 내가 수혈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O형이니 걱정말라고 하는 것도
조금만 지식이 있다면 안심하기 어렵다. 그들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라도 누군가가 O형이니 안심하고 피를 받으라고 말한다면 거절할 것이다.
차라리 이런 무심한 모습이 나를 신뢰한다는 믿음에서 기반한 것이라면 좋을텐데.
"내일은 가게에 숨겨진 도촬, 도청목적의 기기 다 떼서 게ㅂ...아니, 에반제인에게 가져다줘.
무령의 가게에 붙어있었다고. 길드에서 건축한 건물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대공께 부탁하시는 것이 확실합니까?"
"무슨 목적으로 말하는 지는 알고 있어. 그런데, 오늘 나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뭐라도 한번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내가 너한테 피를 주사한 이유, 안물어봐?"
"마스터의 조사자료를 확인했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무령님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확실히 피를 받고 나서 숨쉬기가 편안해졌고,
몸이 가볍습니다."
"엉덩이나 가슴에 무리하게 주사한 지방이 혈관을 틀어막고 있었어.
혈전이 생긴건 고사하고, 성인병으로 부를만한 것들이 상당히 몸을 좀 먹고 있었고.
간이 혹사하던데."
"조심하겠습니다."
"됐어, 조심은 무슨."
그렇게 말하고 말없이 술을 마셨다.
둘다 그닥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술동무나 하고 있어주는 것만도 상당히 위로가 되어서
뭐라고 굳이 말을 붙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술잔을 다시 묵묵히 채워주는 그녀를 보고 나 역시도 위안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