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4화 〉힐링 캠프 (104/303)



〈 104화 〉힐링 캠프

"내가 없는 동안에 무슨 문제 없었지?"

"문제라고 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인기가 많은 일부 품목의 재고가 부족해져 한시적으로 프리미엄이라는 가격이 붙어
재판되는 일이 암시장에서 빈번했습니다."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

"TLA770A는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독 미리타엔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더라고."


킬레리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랑 펜을 가져다줘."


"종이와 펜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말하고 킬레리는 책상에서 깔끔한 종이와 만년필, 잉크를 꺼내왔다.
나는 잉크를 채워넣은 만년필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게비디가 분명 저번에 너한테 인공 자궁을 이식해서 클론을 임신시켰었지?"


"네. 현재 인큐베이터에서 성장중입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너는 원래부터  업무를 보필할 목적으로 나온거네?"

"그렇습니다. 저에게서 유전형질을 추출하는 일은 끝났기 때문에
모귀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양산이 가능해집니다.
저라고 하는  개체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혹시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리 모귀드의 유전자로 복제된 존재라고 하더라도 넌 나한테 하나뿐인 존재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겁니다. 저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아마 무령님께서 더 힘드실 테니까요."

"괜찮아.  그런 특별한 존재가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거니까."

"저는 그저 킬레리일 뿐입니다. 다른 모귀드의 유전자를 복제한 메이드나 하녀는
귀족가에 널려 있습니다. 단순히 모귀드의 유전적 특징으로 인해 보이는 외견에
너무 마음을 주지 않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이런건... 저도 처음입니다.
미리타엔 내에서 들어본 경험도 없습니다. 양산형 노예에게 특별한 존재라니요."

"난 그렇게 생각해. 내 피를  이유도 거기에 있어.
아무리 많이 생산된 모귀드의 클론 개체라지만 내 눈앞에 있는 킬레리는 너잖아.
난 그런 너를 특별하게 생각해. 편지 다 썼거든? 이거 날이 밝으면 게비디에게 전해줘."

내가 편지를 그녀에게 내밀면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읽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킬레리는 말없이 그 편지를 차분하게 읽어내려갔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잔 벽면에 술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살짝 손짓으로 알코올을 날려보낸다.
그리고 조금씩 잔을 비웠다.
반쯤 녹은 얼음덩이가  잔에서 매끄럽게 굴렀다.
패패루 포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약품중에 부족한건 뭐가 있어?"

"연구소에서 어느정도 충당은 하고 있습니다.
일부 품목은 독점계약을 해서 판매하고 있기 떄문에
최근에는 암시장 외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할  없어졌으므로
값이 치솟았습니다. 그 외에 R-PHC188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연구소에서도 생산이 불가능하다보니..."

"아...아... 그...그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아냐... 만...만들어 줄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안마셔?"

"아, 실례했습니다."


킬레리는 내 빈잔에 술을 다시 따라주었다.
여문 벼와 같은 색으로 잔잔하게 찰랑이는 술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조금은 안식을 느낀 것 같다.
킬레리와 술잔을 가볍게 맞부딫혔다.
그리고 우리는 날이 샐 때까지 서로 잡다한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눈을 뜬 후에 나는 연구소로 찾아갔다.
연구소 총 책임자라는 직함을 달고 연구소로 출근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까.

아무도 청소하지 못한 것처럼 먼지가 상당히 쌓인 공간에 도착해서
나는 간단히 마력을 담아 먼지를 한 군데로 뭉쳐 쓰레기통에 구겨버렸다.


"대체 R-PHC188같은게  잘 팔리는거야...?"

그런 투정을 뱉으면서 오랜만에 연구를 시작했다.
내게 올라온 서류를 정리해서 결재처리를 끝마치고,
가게에서 챙겨온 패패루 육포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일을 시작했다.
마법 자체가 그렇게 대중화된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이전의 마법이나 연금술에 관련된 부분은
어떻게든 기술로 대체하려는 노력을 했던게 보이지만 굳이 그렇게 어렵게 돌아가지 않아도
간단히 손볼  있는 것이었기에 적당히 공식을 수정해주었다.

이전같았으면 마법이론을 이해하는 인원이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직접 훈련시킨 플로라가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리고 오랜만에 연구소에 도착한 김에 각종 포션을 다시 보충해서 채워두기로 했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아 변질된 포션은 적당히 변질되었음을 알리는 라벨을 붙여두고
부작용이나 예상효과를 적어서 따로 모아두었다.
 버리는게 제일 무탈하기야 하겠지만 제국에서 그럴리가 없지.
그리고 나서 새로운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오, 이건 좀 재미있어 보이네. 광선절단 연구라니.
구리판으로 전류를 흐르게 만들어놓고
블롭을 얇게 늘여서 두르겠다라...
전기를 받으면 고열을 발생시키는 성질을 응용한 것...? 뭐야?
강도는 부족하기 때문에 금속을 섞어야 하는데
적합한 반응성과 강도를 지닌 금속을 아직 구하지 못해 연구가 정체중...
어떤 미친놈이 이런걸 쓴거야?
뭐야? 보고서가 하나가 아니네?
강도를 보완하면 위력이 약해짐을 인정했다.
게다가 블롭의 고열을 견뎌내는 광물도 쉽게 구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광선절단의 원리는 고열로 인해 순간적으로 물체를 녹이는데 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섞는다는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블롭은 구리또한 간단히 녹여버렸기 때문에 전류를 보급하는것 자체가 어렵다.
이 물건을 잡고 휘두를 손잡이에 우리는 방향성을 집중하기로 한다?"

상당히 멍청하지만 재미있는 연구자였다.
대체 블롭을 가지고 물건을 절단하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는걸까.
과거에는 블롭을 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상당히 쉬운가보다.
일단 따로 보고서를 빼놓고 계속 나머지를 읽었지만 마땅히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
적당히 읽으면서 기술력에 관한 부분을 읽고 연구하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상담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일을 마치고 나서 내가 상담소로 돌아간 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정리한 서류와 보고서, 그리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성에 대해 정리한 문서도
모조리 연구소장이 담당하는 6번구역으로 넘겨버리고 퇴근했다.
상담소로 돌아가면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게비디, 플로라! 여긴 웬일이야?"


"무령님께서 오셨다는데 이거 제가 와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녀 또한 무령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조금 전에 연구소에서 무령님의 연구서를 읽고 감탄했습니다.
어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을 하시는지요."

"너 퇴근 언제했어?"

"한... 다섯시 반 쯤 했사옵니다."

"너희 한가하구나? 여기 이렇게 모일 시간도 있고."

"하하! 콜로세움은 이제 막 예선 경기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저희 직원들이 아주 열심히 하고 있지요."

"소녀또한 최근에는 상당히 여유가 생긴지라...
이것이 다 무령님 덕 아니겠습니까."

"플로라, 많이 강해졌구나."

"이젠 대공이지 않사옵니까."


정말  풋풋하던 이미지는 어디론가 벗어던지고
이젠 정말 고혹적이고 고압적인 아우라를 동시에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커피를 따로 내렸다.
플로라의 커피에는 설탕과 시럽을 많이 넣어주었다.


"그나저나 게비디, 보낸 편지는 봤어?"


"예, 덕분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지요.
킬레리를 양도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본디  킬레리는 무령님을 보좌하기 위해 파견된 아이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드리지요. 다만..."

"다만?"

"그 한정 물량으로 풀리고 있는 포션을 조금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쭙겠습니다."

"한정...? 아...아 ㄱ...그거...! 네가 사는 거였어?"


"아뇨, 포션의 효과가 상당한지라 인기가 높습니다.
특히 아주 극악의 확률을 뚫고 포션으로 탈모를 치료한 자가 있었던지라,
덕분에 탈모인들에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체온이 유지되지 않아 변온동물이 되어버린 자도 존재하고,
어떤 자는 도리어 전신의 털이 빠져버리기도 했습니다만
종종 나타나는 당첨효과 때문에 콜로세움의 도전자들도 종종 그걸 요구하곤 합니다."

"아니 대체 당첨이 뭐였길래?"


에반제인이 후후 웃으면서 말했다.

"한정판이라고는 하지만 소녀 또한 우연히 구할 기회가 있어 하나 복용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오나, 피부가 탱탱하게 탄력을 찾았사옵니다."

"어? 그러네?"

정말 플로라는 천운이 따르는 아니인가보다. 차고많은 효과 중에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를 뽑아갔단 말이야?

"그나저나 무령님. 저기 있는 킬레리가 제게 가져다 준 것이 정말 길드에서 달아둔 것이 맞사옵니까?"


"그럴거야. 길드 인원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을테니까.
킬레리. 맞지?"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무령님께서 장기간 다른 곳에 다녀오셨기에 정보를 내어주지는 않은 모양이온데...
아무래도 화가 치밀기에 길드에 찾아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왔사옵니다."


"잘했어. 덕분에 힘이 좀 난다."


플로라는 배시시 웃으며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내게 살짝 기댔다.


"이 정도는 상으로 괜찮으시겠지요?"


나는 플로라를 눕혀 무릎베개를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플로라는 잠깐 당황한 것 같더니 곧 몸을 베베 꼬면서
꼼질꼼질 허벅지쪽으로 머리를 옮긴다.

"에반제인 대공, 아무리 무령님이 편하다고 해도..."


"괜찮아. 플로라 한명 정도는."

"들었느냐 게비디? 너는 무거우니 안된다는 말씀이시다."

"둘이 싸우면 상 안줄거야."


그렇게 말하자 둘다 조용해졌다.

"소녀, 게비디와 긴밀한 사이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무령님. 대공께서 얼마나 콜로세움의 편의를 봐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변론을 시작한 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투닥투닥 하긴 해도
서로 상당히 잘 챙겨주는 것 같았다. 애들도 아니고  것도 아닌 걸로 장난치고
라이벌 의식이나 가지고 말이야. 역시 그래도 조금 더 나이가 많은 게비디가 넘어가는 편인  같다.



"그래서 무령님, 어떤 일들이 있으셨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게비디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어제보다 상당히 기분이 풀렸기 때문에 대답해주었다.

"망각의 미로를 다녀왔어."

"아, 그 기억의 미로라고 부르는  말입니까?"


"응. 운이 없었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르는 곳이었지."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킬레리를 상당수 보냈던 전적이 있습니다만
하나같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콜로세움의 노비를 이용했지만 큰 차이는 없더군요."

"콜로세움의 노비를 이용했다?"

"콜로세움의 지원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걸고 출전합니다.
그들 중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인원은 거의 없습니다.
삶을 내려놓는 것이죠.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제안할 뿐입니다.
살아 도망칠 기회를 주겠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을 데리고 미로 앞에 섰습니다.
일렬로 미로에 들여보내고 그 끝에서 사진을 찍어 밖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아주 비효율적이지만 적어도 제 목숨은 안전한 방법이죠."

"비효율적이라기에는 머리를 잘 썼는데?"


"그 안에서 찍은 사진은 백골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죠.
안개가 심해서 전방도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한 몫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을 제가 분명 자료로 정리해서 기록실에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노예들은 어떻게 됐어?"

"다 콜로세움에 출전시켰습니다.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죠.
도망친 자는 없었습니다. 정말 좋은 기회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해야겠죠.
아까 말했던 한명이 도망친 노예를 모졸 주먹떡으로 만들어 잡아왔더군요.
더  것 없었습니다. 상당히 마음에 든 남자였으니까요.
노예의 시민권을 구입해 풀어주었습니다.
콜로세움을 오랜 기간 운영했지만 그런 녀석은 처음이었습니다.
풀어주었는데도 도망치지 않더군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도 아니지요. 이제 시민임이 증명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더라도 현상이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올  있으니 차라리 승리해서 작은 작위라도 받고 싶었다더군요."

"그래서?"


"진행위원으로 뽑았습니다."


"답네."

"감사합니다."

"에이, 김샌다. 무슨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해.
그냥 여행 좀 하다 왔어."

"잘 돌아오셨사옵니다."


플로라가 그렇게 말했다.


"고마워. 조금 후련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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