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기쁘지 아니한 자
플로라는 조금 뾰루퉁해진 얼굴로 말했다.
"뭐에요? 저만 빼고 다들 하나같이 이야기가 물흐른다니요."
"왜, 너도 나랑 통하는게 있을거고, 게비디랑 통하는게 있을 것 아냐?
내가 미리타엔 제국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너희끼리 하는 이야기가
훨씬 폭이 넓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폭이 넓은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원하는 정보에 접근이 안되는데요!"
"원하는 정보라니? 뭐 흥미로운게 있으셨나요 대공님?"
"놀리지 마세요..."
게비디가 몰래 쿡쿡대며 웃다가 플로라에게 찌릿 눈치를 받는다.
게비디가 머뭇거리다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아, 도망쳤던 젤렌지의 정보를 구했습니다."
"뭐?"
기껏 기분 좋을 뻔 했는데. 하여튼 기분좋은 일만 겹쳐오는 법은 없는건가.
그래도 언젠가는 들어둬야 했을 정보이기에 일단 들어두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한번 들어볼 가치는 충분한 것 같은데.
젤렌지는 분명 제국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일반일일텐데."
"그게 조금 다르답니다. 제국 내에서는 물론 후작으로서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국 내가 아니더라도 귀족으로 활동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유레크로스와는 적대적인 관계이기도 하고, 귀족의 직위가 인정되는 국가로
피신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교국에 파견한 킬레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젤렌지가 교국으로 피신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냐? 더 해보아라."
플로라가 그렇게 다그치면 게비디는 우물쭈물하는 것 같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파견된 킬레리들로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또 모습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어디로 사라진건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교국으로 인원을 따로 구성해서 파견해봐야 할 것 같기야 하지만
일단 우선적인 내용부터 따로 보고드리자면 얼마 전에 성연이 교국으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성제가 임명되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거기에 모종의 거래나
작당모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작당모의? 왜? 새로운 성제를 누구로 임명했는데?"
"젤렌지의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젤렌지의 동생이라고?"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부분입니다."
"동생이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건 분명하겠네."
"젤라토라는 이름의 검사입니다."
"젤라토? 그 젤라토더냐?"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가벼워진 허벅지에 나 역시도 조금 놀랐다.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나와 게비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용히 문을 열고 말했다.
"잠시 저택에 다녀오겠사옵니다."
"갑자기...?"
"금방 돌아오겠사옵니다."
그렇게 플로라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둘이 남은 나와 게비디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무령님."
"응?"
"역시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없습니까?"
"왜 그런걸 듣고싶어 하는거야?"
"직접 무령님께 듣지 않으면 저는 제가 아는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장간에도 연락망이 있어?"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대장간에 연락망을 심어둔 자와 접촉하면
어딘가의 정보를 간단히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다들 알고 있습니다.
무령께서 대장간에 향했다는 사실을.
화산이 터진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었고 말입니다.
이번 화산은 규모에 비해 너무나 피해 범위가 좁습니다.
금방 복구할 수준으로 피해 수준 역시 경미하게 끝났기도 하죠.
그런 화산을 무리없이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제가 아는 한 많지 않습니다.
성연이 대장간에서 복귀했다는 소식이 전해진게 오늘 오전 10시입니다.
성연이 신무기를 얻었다는 소문 역시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장간에서 그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인물은 없습니다.
오브를 구체가 아닌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때 한가지 머릿속에 가능성이 스치더군요. 아마 100퍼센트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유 없이 그런 화산이 터질 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언가 의도적인 공작이 가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화산이 분화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갑자기 무령께서 미리타엔으로 돌아오셨으며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원인없이 존재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시기상 적절하기도 하고요."
"참 쓸데없이 예리해."
"로봇은 어디로 갔습니까?"
"내다 팔았어. 이제 쓸모가 없거든."
"쓸모가 없다...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로봇에 들어있던 체헤게가 사라졌거든."
"체헤게 말이군요. 그 자가 무령님을 떠나서 생존할 수 있습니까?"
"모르겠어. 확실한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정도로 마력이 대단하거나 그런 쪽으로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닐텐데.
아마 이번 사건에 휘말려서 당한게 아닌가 싶어."
"이번 사건? 화산의 분화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다르말록의 추종자들이었어."
"다르말록이라면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그 이단자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니."
"그러고보니 미리타엔에서는 다르말록을 주신으로 했었지?"
"그랬던 시기 또한 있었습니다.
무력을 강조하는 신이 무력에서 패배해 봉인당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리타엔 대다수가 등을 돌린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추종자들이 대장간에 나타났다라..."
"대장간에 대형 포탈을 열었더라고. 과거의 한 시점으로 시간을 이어버린거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갈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기술자들이 희생됐어."
"그렇군요. 그렇다는 건,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술자들이 미리타엔으로
대거 흘러온다는 의미로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대거 흘러들어온다?"
"대장간은 통제력을 잃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금방 피해를 진압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빠르게 피해를 수습했는가 하는 것 보다는
결국 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내용이 더 크게 남을겁니다.
그들이 대장간에게 등을 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대장간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고 들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다고?"
"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수장 하나가 죽었다는군요.
장로도 이번 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장로가 바뀌었다고?"
"네. 오늘 오전에 정보상에게 의뢰해 구입한 정보이니 확실합니다."
"정보상...? 그건 뭐하는 사람이지?"
"자세히는 저도 모릅니다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유통하고 통제하는 자입니다.
휘하에 실력 좋은 해결사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정보나, 여론을 조작하는 일에 아주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그런 일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이제까지 그 정보상에게 당한 이들도 상당합니다.
아직 자세히 밝혀진 내용은 없습니다만 교국에서는 미리타엔 제국의 누군가일 것으로 추정중입니다."
"왜지?"
"사람을 해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미리타엔 제국이 가진 보편적 이미지를 부정할수는 없지만
덕분에 제국에서도 헌터라는 벌레가 기어들게 되었으니 좋게만은 보기도 어렵습니다."
"아, 헌터라는 것들 말이지."
"분명 교국에서 파견한 개들인데 어쩌다 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모르겟지만
지금까지는 잡히는 족족 입을 찢어 죽였습니다. 끝까지 알아낸 것이든 본진이든 불지를 않아 기분이 나쁘더군요.
분명 각국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하는 개새끼들인데 거창한 대의명분같은걸 위장해서
노예의 인권이니 제국의 치부를 캐기 위해서니 말을 붙이는건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헌터라는 건 스파이라는거야?"
"그렇게 보셔도 무방할 겁니다. 종종 모험가들의 일을 가로채고 보수를 가져가는 이들도 있어서
길드에서도 상당히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길드의 규정상 그들이 가입하는걸 일일이 따질 수도 없고
속이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곤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들어오면서 일을 훼방놓는 주제에
정체를 들키면 교국에서 파견한 대상이기 때문에 본국에서 처벌하겠다고 돌려보내달라는 말도 종종 나오고,
애초에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라 재수없긴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모로 피곤한 놈들이네."
"아까 말씀드렸던 젤라토 또한 헌터 출신입니다.
끈덕지게 살아남아서 교국으로 돌아갔죠.
과연 그 자가 그렇게 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하룻강아지입니다만, 나름의 기준이 있었겠죠."
그쯤 이야기하자 문이 조용히 열리고 공손한 자세로 플로라가 돌아왔다.
"젤라토에 관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마침 근처에 엮인 이야기가 또 있더군요.
흥미를 가지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가 테이블 위에 서류를 올려두었다.
나는 그 서류를 들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서류대로라면 젤렌지와 젤라토는 친남매가 맞사옵니다 무령님."
"남매...?"
"젤라토는 여성입니다."
"젤라토는 아주 작은 칼을 다루는 자입니다."
"작은 칼이라고?"
"작은 칼을 여럿 들고 다닙니다. 종류도 다양하더군요."
"종류가 다양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지?"
"날이 휘어진 단도부터, 날이 두갈래로 나뉘어진 칼과, 주무기로 사용하는 사복단검도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상당히 피곤했던 일이 있습니다."
"사복단검? 감이 안오는데 그런게 존재하는 이유가 뭐야? 효율이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만 현실은 다릅니다.
날이 20cm정도 되는 단검임에도 휘두르면 상당히 길게 늘어나더군요.
게다가 젤라토 본인 자체가 너무나 유연해서 그 날이 닿는 범위를 피해
춤추듯이 공격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번거롭사옵니다."
"그럼 게비디가 만만하다고 한건 뭐야?"
"그런 칼날로 제 피부를 뚫을 수 있을리 없지 않겠습니까."
"뭐... 이해는 하는데 일반적인 기준을 가지고 설명했을때 강하다고 생각해?"
"음...그렇다고 여겨질 수는 있지만 강하다기보다는 거슬리는 쪽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서류를 또 한장 넘겼다.
"그래서 이 젤라토는 어떻게 성제로 선발된 거라는데?"
"16년 전부터 꾸준히 각국을 돌아다니며 악마를 사냥하는 자라 하였사옵니다.."
"악마?"
"네. 그렇사옵니다. 악마라는 것이 실존하는지 여부조차 불확실하다고 말했을 시절부터
꾸준히 사냥을 지속했기에. 지금은 그녀의 공로로 인해 악마의 존재가 분명하다는 것이 대중에게 알려졌사옵니다.
여전히 미리타엔의 귀족들 보다는 선한 존재가 아니냐는 말도 간간히 나오고 있사오나,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제 발끝도 쳐다보지 못하는 자들인지라 놓아두었사옵니다."
"그래서 악마를 잡는거랑 성제로 선택된거랑은 무슨 연관이지?"
"아무래도 교국에서 선정하는 것이다보니 입김이 세게 작용한 것 같사옵니다.
들리는 추문으로는 악마뿐 아니라 접촉한자들과 피해를 받은 자들 모두에게
악마와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옵니다."
"하여튼간에 그 젤씨 집안은 뭐가 이상한 애들만 모였다니?"
"최근에는 불사자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를 추적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
"3년 전부터 추적중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잡히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덕분에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를 본 젤렌지가 피로 생명을 연장한다고 말하며
피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사옵니다."
"하아..."
결국 또 얽히겠구나 싶은 예감이 든다.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결국 새로운 인연이 또 새로운 사건을 몰고 온다니.
이렇게 되어버리면 빨리 유레크로스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이정도면 그래도, 오래 쉬었지...
정신적으로도 많이 치유되기도 했고.
"그래, 얘들아.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네. 플로라. 나 이거 들고 가도 될까?"
"사본이니 걱정 말고 챙겨 가시지요."
"고마워."
나는 미리 문에 그려둔 마법진을 역으로 발동시켰다.
그리고 문을 열면 다시 삐거덕 열린 문 너머로는 분노의 사막 초입의 아지트가 있었다.
"사막...?"
"이러니... 저희가 알 수가 없었군요."
놀라는 둘을 뒤로하고 나는 가볍게 손인사를 한 뒤에 작별 대신 웃어보이고
문 너머의 사막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