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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화 〉흔적 (108/303)



〈 108화 〉흔적

지하에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위에서 천장을 막던 자이언트 토드는 이미 자리를 텄다는 이야기였다.
우릴 찾던 두꺼비들 역시 하나 둘 밖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 것은 곧 긴 잠을 깰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소리를 죽이고 바닥에 엎드려 숨은 우리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 다니엘은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나간건가? 확인해볼테니까 잠깐 기다려줘."

"그래요. 그정도라면요."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던 다니엘이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 대신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챙겨온 가방을 열어 도구를 살펴보고는 지친 표정으로 물을 꺼내 벌컥대며 들이킨다.
여전히 억수로 내리는 비는 그의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진흙바닥에 몸을 숙이고 있어서인지 옷은 진흙으로 진창이 되어 있었고
빗물에 맞는 머리에서도 흙이 조금씩 떨어져 씻기고 있었다.

"후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나와볼래?
어으, 전신이 따갑네 정말."

"고생하셨어요."

"그래, 일단 저 반대로 올라갈 생각인데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감이 안잡혀."

"저길  올라가야 해요?"

"올라가고 싶어서 그래."

"조금 더 긍정적으로... 어?"

그 말이 끝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들어왔던 쪽에서 무언가를 날카롭게 긁어대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둘  놀라서 바라본 곳에는 강도단의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우리는 죽은 두꺼비 사체 뒤로 몸을 숨겼다.
전체적으로 살아있는 두꺼비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까처럼 두꺼비 사체 밑으로 숨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우리가 설치한 로프를 타고 내려오면  뒤로 부하 몇 명 정도가 따라 나왔다.

"입구 제대로 막아놓은거 아니었어?"

"그거 치워내려면 시간 꽤나 걸렸을텐데...아, 비에 씻겼나...!"

비에 어느정도 씻겨내려간 건지 고생은 한 것 같지만 들어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그들은 로프를 타고 내려와 주변을 둘러본다.
바닥에 고여있던 독기는 비에 씻겨 잠잠해졌다.
다만 바닥에 깔린 두꺼비 사체를 무시하고 내려올 수만 있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멈춰서는 것을 택했다.
어째서인지 모를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자신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한 후에
하나 둘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들어간거 다 알고 있어요!
해치지 않을테니 잠깐 대화나 합시다!"

섣불리 믿기는 어려운 말을 하면서 그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인지 아직 우리의 위치는 짐작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꺼비쪽으로는 가까이 오려고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진지합니다! 밖에서 토드에게 동료들을 잃었고,
남은건 여기 있는 여섯 명이 전부야!
씨발 이야기 좀 하자고! 나보다 여길 잘 아는 새끼도 없으니까!"

나보다 여길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은 명백하게 흥미를 끌었다. 정확히는 다니엘의 흥미였다.
다니엘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지?"

그가 그렇게 물으며 한 손에는 단도를 쥐었고, 다른 손으로는 원통형 조명탄을 들었다.
아직 조명탄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조명탄을 터트리는 순간 도망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나간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강도단 두목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여기는 과거 밀수단의 아지트라고."

"밀수단?"

"그래, 표면적으로는 공사현장이었어. 사막을 안전하게 횡단하기 위해 터널을 파겠다는 명목 하에
유레크로스로부터 자금을 원조받아 착수한 작업이었지.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고 2년 후에, 유레크로스에서 지원을 중단했다.
공사가 더 진행될 이유도 없었지.
그 당시 인부들은 이곳을 베이스로 하고 있었다.
국가 내에 도로를 내는 것도 기간이 상당한데 사막에 지하터널이라니.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작업이었지."

"네가 그 인부였구나?"

"그래. 정확히는 십장이었어. 지금의 강도단은 원래 그 인부들이었다.
2년만에 원조가 끊긴 땅굴은 우리들이 지나다니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땅굴을 통해 지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저기 보이는 간이 건물과 자재들은 우리가 일하던 흔적이지.
공간은 생겼다. 할 일은 없다. 계획도 사라졌지.
그럼  땅굴은 어떻게 써야 하는걸까. 답은 하나였다.
국경을 잇는 지하 비밀굴은 밀수에 이용하기 최적이었지.
우리는 그렇게 밀수를 시작했다. 작게는 영약이나 보석, 크게는 문화재까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도 가족이 있었으니까. 밀수업을 하다보면
당연히 잡히는 동료 또한 생기기 마련이야. 그럼 한동안은 일을 쉬어야 했지.
이곳을 방치하고 집으로 간 게 문제였어. 우리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곳에 자이언트 토드들이 잠을 자고 있었지. 우리가 살겠다고 파놓은 굴에
저 괴물들이 쓰러져 있으니 우리는 이곳에 이룬 터전을 버리고 이들이 나가길 바랐다.
그러려면 비가 와야 했지. 그리고 비가 오던 날, 우리는 절망했다.
두꺼비가 한마리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비가 오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비가 와도 두꺼비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멀로이 교수가 강연하는 내용을 들었으니까."

"멀로이 교수... 대단한 사람이지. 조금 별난 성격이 문제긴 하지만."

"그 교수가 말하더군. 빗물이 지하에 침투해서 저 두꺼비들을 깨워놓으면
단체로  위로 몰려나와 짝짓기를 하고 수분을 보충하는게 정상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지하에 우리가 쓰던 아지트라는 환경때문에 우리가  터널을 통해
빗물이 전부 빠져버린다는 것을. 넓은 공간이 있으니 두꺼비는 모여드는데,
그만큼의 비가 내리지 않는거였다. 터널로 빠지는 물보다 많이 내려야 했는데...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비가 내렸다. 우리는 이제  안에 있는 짐을 챙겨 나갈 거야.
이제 사막에서  이유가 없으니까... 장정 14년을 여기서 살았다고."

"하아... 참... 감사인사는 저기 저 아가씨에게 하게."

"아가씨?"

"아하하..."

나는 머쓱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걸어나왔다.
말한 적은 없는데 다니엘은 내가 비를 내리게 했다는걸 본능적으로 아는  같았다.

"일단 짐을 챙긴다고 했으면 짐을 챙기게. 우리는 저 위로 올라가봐야겠으니까."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면 고개를 저으며 강도단 두목이 말했다.

"저기로 가고 싶은 거라면 리프트가 있어야 하겠군.
리프트는 분명 저쪽에 놓았던 것 같은데. 기다려. 금방 가져다주지.
아마 저 길로 가면 고대의 분지로 통할걸?"

"고대의 분지?"

"그래, 고대의 분지는 위에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단단한 지질로 되어있어
아직까지  내부를 파고 들어가지 않았지만, 저 길은 달라.
우리가 억지로 폭약을 써서 뚫은 길이거든."

"참... 이게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강도단은 하나씩 숙소로 보이는 건물에서 묵직한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안에는 고급으로 보이는 왕관이나, 도자기부터 거울과 같은 각종 예술품이 나왔다.
가방이 4개가 나오고 나서야 그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뭐 성의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우릴 도와준건 사실이니 원하는  주지.
강도짓 같은 것보다 이게 훨씬 잘 벌릴테니 말이야.
후우... 이젠 이 짓도 손 털어야겠구만. 12년만에 돌아가면 아내는 뭐라고 하려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가방에 든 애물단지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중에 내 눈길을 끄는게 하나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마력이 느껴지는 반지. 백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반지는
독특한 무늬로 깎여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편안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익숙함.

"이건 뭐죠?"

"아, 그거 좋지. 그걸로 할건가? 원죄의 반지라고 하는건데 말이야.
확실한 진품이지."

"원죄의 반지라고?!"

다니엘이 놀라 이쪽을 바라본다.

"이게 제일 끌리네요."

내가 반지를 주워들자 강도단 두목은 웃으며 그걸 내게 넘겼다.

"값어치로만 따지면 얼마 안하지만 상징적 가치는 상당한 물건이지."

아냐 바보야. 이게 제일 좋은데.
마력이 이렇게 밸 정도면 못해도 몇 퀴트까지는 가는 고급품이라고.

"하아... 놀라운데..."

다니엘이 반지를 보고 그렇게 말하기에 내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높아. 다섯 종이 있다고 하는데,
원죄를 지닌 반지라고 하지. 그중에 전해져오는건 2종류 뿐이었어.
다른 세 종류는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던 것이지.
금으로 만든 반지, 은으로 만든 반지, 백옥으로 만든 반지, 흑요석으로 만든 반지."

"네 종류잖아요?"

"마지막 하나는 밝혀지지 않았어. 뭘로 만든건지도 모른다던데.
다만 문헌에 따르면 다섯 종류가 있다고 전해져오기 때문에 다들 5종류로 아는거지."

"왜 다섯 종류일까요?"

"그건 연구중이야. 분명 그 반지도 공개되었을 때는 반응이 뜨거웠지.
아마... 오팔레트 대륙에서 발견된 걸로 기억해. 실종되었다고 하더니..."

"오팔레트?"

"그래. 오팔레트."

"거긴 어디죠?"

"페세티아 대륙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절망의 산맥이 있어.
 산맥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지."

"감사합니다."

나는 반지를 착용했다.
뭔가 변한 것 같기는 한데... 뭐가 변한건지 모르겠다.

"형씨,  가질래?"

그렇게 말하며 웃는 강도단 두목에게 다니엘이 말했다.

"난 됐어. 빨리 고대의 분지로 가는 길이나 알려줘."

"아아, 그거라면 리프트를 쓰라고."

이미 강도단 부하가 리프트를 끌고 왔다.
도르래처럼 생긴 것을 돌릴 수록 발판이 위로 올라갔다.
보기로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높이 올라간다.

"에리아씨, 나는 이제 고대의 분지로 가려는데, 같이 갈래?"

"하아... 솔직히 저는 빨리 유레크로스로 가고 싶거든요.
여기서 더 뭘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그럼 이걸 줄게. 고마웠어."

다니엘은 내게 극전자도를 넘겨주었다.

"아, 줬던 조명탄이나 단도는 그냥 쓰라고. 난 됐어. 이미 더 있기도 하고.
나침반은 가지고 있나?"

"나침반...? 아, 네. 있어요."

오래 전에 마르커스씨가 줬던 나침반.
쓸 수 있을까 싶기는 한데... 어떻게든 되겠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데 에리아."

"네?"

"내 이름은 다니엘 스콧이야. 네 이름은 뭐지?"

"에리ㅇ...아니, 엘라 세리타인이에요."

"엘라 세리타인. 좋은 이름이네."

"고마워요."

"다시 만나길 바래."

그렇게 말하고 다니엘은 굴 너머의 통로로 사라졌다.
나는 강도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이제 어쩌실거에요?"

"우리는 이제 유레크로스로 돌아가야지. 가족들이 기다리거든."

"그 샌들핀은 어디 갔어요?"

"두꺼비 뱃속에 있지."

"이야~! 새끼들 먹성 좋더라고."

한마디 거드는 부하들을 보자 키득키득 웃는다. 허탈했다.
어떻게 나가려고...
일단 가방에 넣어두었던 나침반을 꺼낸다.
그리고 전자극도와 비교하며 길을 파악하기로 했다.
우리는 들어온 로프를 타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두꺼비들은 사라진지 오래 같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강도단은 빠르게 흩어진다.
나도 주변을 파악하고 터덜터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확인해보니 나침반은 역시나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다니엘이 가르쳐줬던 방향으로 걸을 뿐이다.
걷다보니 그래도 대충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두꺼비 한 마리는 신이 나서 내게 달려들었다.

"으앗!"

놀라서 뒤로 넘어진 나는 가까스로 두꺼비를 피했다.

"샌드 버로우!"

기껏 두꺼비를 묻어버리려고 마법을 썼는데 마력이 모이다 흩어진다.

"ㅁ...뭐야...?"

두꺼비가 나를 돌아보기 전에 뒤뚱거리며 돌아서는 두꺼비의 등 위로 올라탔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큰일 날  했다.
두꺼비의 머리에 손을 얹고 계약을 시도했다.
두꺼비가 아무리 느려도 아무렴 나보다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허무하게 계약은 실패했다.
지능 없는 생물이라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지...?

다시 힘을 끌어모았다. 마력을 피로 증폭시킬 생각으로 체내 마력회로에서
빠르게 마력을 순환시킨다. 훨씬 수월하게 돌아가는 마력이 매끄럽게 몸을 순환한다.
오히려 평소보다 숨쉬기도 편하고 힘도 덜 드는데, 왠지 시전하려고 하면 흩어진다.

"뭐야..?"

두꺼비는 내가 올라탄 순간부터 발버둥을 치며 나를 떨궈내려고 하고 있었다.
미끌거리는 탓에 버티기 쉽지 않았지만 다니엘이  단도로 어떻게든 두꺼운 피부를 찢어내고
그 위로 단도를 박아 쥐고 버티기로 했다.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와중에도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두꺼비의 힘을 빼보려고 했다.
챙챙 깨지는 플라스크의 포션을 뒤집어쓰고 두꺼비는 신음했다.
여전히 마법이 발동하지 않아 당황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설마...?"

나는 그제서야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반지는 너무나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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