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반쪽짜리 천사
내 손에 모인 따스한 마력을 바라보면서 에스트로가 말했다.
"뭐야? 그걸 만들어낼 정도면 사실상 완전히 돌아온거 아닌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일단은 이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좋은 것 같아.
내 근원이라는 이야기잖아? 나쁜 기분도 아니고."
"그래도 나는 좀 아쉬운데. 내가 선물해준 피에 기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것도 다시 쓸 수 있게끔 해봐야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내가 제일 잘 다루는 능력은 그쪽이니까."
"편한대로 해. 그럼 내려갈까?"
"그래."
그와 함께 탑을 내려가던 와중에 발걸음을 멈추는 그가 내게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나는 여기서 더 못 내려가겠는데?"
"왜?"
"이 밑에 내가 그리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나는 교회랑 그다지 친하게 지낸 편이 아니니까."
"그 반지 때문에?"
"알고 있었어?"
"오전에 들었어."
그는 내 머리를 두어번 정도 쓰다듬어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또 이런식으로 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네가 사고를 칠 때마다 기운이 느껴지니까."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래, 이질적이라고 할까 그립다고 할까. 하필 또 도르테우스의 신전이라니.
나도 최대한 빨리 달려온건데도 늦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저주를 교묘하게 피해갈 방법을 알아낸 이상 멈출 이유가 없으니까.
아직 저주를 받은 5명을 전부 알아내지도 못했고, 권능이 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차피 한번 멋대로 하기로 한 이상
끝까지 알아내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보아하니 내 말은 또 귓등으로도 안듣겠네. 그래,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지.
몇번이든 내가 찾아갈테니까 원하는대로 해봐."
"고마워."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옥상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다음에 또 봐."
"그래."
에스트로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담배를 물고 계단을 바라보는 제임스가 있었다.
"늦었네?"
"그러게. 잠깐 기절했었거든."
"기절?"
"아하하..."
기절이라고 말하니 더 묻지는 않는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막대가 6개. 아마 그걸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이빨자국이 남을 정도로 잘근잘근 씹어댄 걸 보면 민폐를 끼치기는 했나보다.
기어이 기다리다 못해 담배를 꺼내물었다는걸 모를리 없다.
"기다렸지?"
"위에서 봉변이라도 당하면 내 입장이 애매하니까.
이걸 다 피우고도 내려오지 않으면 올라가볼 생각이었어."
"미안해. 얼마면 될까?"
"됐네요. 아무리 그래도 나도 신부야. 돈만 밝히지는 않는다고."
"아 맞다, 그랬지 참?"
"아 맞다 그랬지 참? 진짜 너무하네."
"농담이야."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그러게. 한동안은 유레크로스에서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은데,
진정되면 콜린을 한번 다녀온다손 치더라도."
"그래? 그럼 오늘은 교회로 갈래?
신부님이 교국으로 가시는 바람에 오후 일정이 취소되어서 아이들을 봐줘야 하는데
나 혼자서는 조금 벅찰 것 같아서."
"신부나 수녀가 너만 있는건 아닐 것 아냐?"
"그분들도 다 일이 있으시지. 나야 보육담당도 겸하고 있으니까 문제 없다지만."
"그 교회도 참 이상해. 보육담당을 너한테 맡기다니."
"그래, 안심이 안되는건 분명하지. 그러니까 우리쪽에서도
역시 아이들에게 더 친절하고 상냥한 누나를 소개시켜주고 싶다는거지."
"상냥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을텐데."
"그래서 할거야 말거야?"
"따라가긴 할게. 음료수 대접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나는 그와 함께 교회로 돌아갔다.
정말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생각보다 열심인 제임스는
아이들이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외에는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마다 아이들에게 간식이나 식사를 챙겨주는 정도였다.
아이들이 사탕을 요구하면 그는 안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었다.
나름 규칙도 있는 것 같았다. 하루에 사탕은 최대 2개.
이렇게 대책없어 보이는 사람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은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누나, 나 음료수줘요."
"무슨 음료수 줄까?"
내 업무는 사실상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오렌지 주스 정도나 꺼내줄까 생각했는데,
데니스가 늘 마시던 그 음료를 보더니 아이들도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약품이다보니 그냥 내줄수는 없어서 소다를 왕창 섞어야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좋다고 마셨다.
덕분에 제임스가 정말 그거 인체에 무해한게 맞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위험한걸 설마 아이들에게 먹이겠느냐고 말을 해도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진다고 하니
결국 나도 일일 음료수 제한을 두게 되었다.
"여기 아이들은 대부분 고아야. 아니면 전쟁지역에서 구해온 아이들이지.
여기서 가르치고 교육해서 대개는 수녀나 신부가 되지만, 개중 일부는 사회로 나가기도 해.
그런데 이중에 유일하게 다른 아이가 데니스야. 스스로 사제가 되고 싶다고 들어왔고,
다른 아이들처럼 챙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해. 공부도 그렇고 체육도 그렇고.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어."
쉬는 시간 제임스는 나를 앉혀두고 그렇게 말했다.
"동감이야."
"저 아이는 내가 보기에 교회에서 품을 인재는 아닌 것 같아.
언젠가 분명 어떤 쪽으로든 큰 사고를 칠거고.
나는 그때 저 아이를 막을 수 있으려면 지금 제대로 교육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좋은 의견이네."
"걱정도 되지만 그게 지금으로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유레크로스 내에서 사고를 친다고 해도 크게 위험할것 같지는 않은데."
"유레크로스 내에서라면 그렇겠지."
"어디까지 애를 내몰려고 하는거야?"
"내가 내몰지 않아도 아마 스스로 나갈거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바로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아야지."
"바로잡는다? 문제가 있었어? 교육을 하는거랑 바로잡는다는 건 조금 다르잖아."
"저 아이는 불안정해. 같이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아서 확언은 못하겠지만
웃은 적도 운 적도 없어. 요즘은 어떻게든 웃으려 하는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어색해. 웃는 모습이 어색한 아이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하... 그러게. 어째 남일같지는 않네."
"저 아이한테는 감정적인 요소가 처세술의 일부인거야.
사교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감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거고."
"...."
"부정하지는 않는구나."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래, 종종 교회에 찾아와. 저 아이의 성장에는 아마 너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내가?"
"너는 나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저 아이를 볼 수 있겠지."
"그런건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어. 하지만 확실한건 있지."
"확실한거?"
"미리타엔 제국으로 보내면 누구보다 안전하게 유학시켜줄 수는 있지."
"미리타엔..?"
"적어도 저 애가 사교적 측면에서는 완전히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겠지.
자연스러움은 배울 수 있을거야."
"유레크로스랑 미리타엔이 적대적 관계라는건 알고 있지?"
"물론이야. 그럼 너 혹시 내가 제국의 무령이라는건 알아?"
"하아... 어떻게든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그러기야?
내 배려가 너무 무색해지지 않았어?"
"배려는 무슨. 아무튼 나는 미리타엔 소속이기는 하지만 유레크로스에 적대감은 없어.
누가 내 정당성에 대해 물으면 옳다구나 하고 그 자리를 내려놓아도 상관 없고.
그냥 그 위치를 활용할 뿐이지."
"그래 뭐 이왕 무색해진 김에 알려줄게. 이미 유레크로스 내에서도 넌 유명인사야.
조금이라도 소식에 예민한 사람들은 다 네가 콜린에서 성제 올리브를 죽였다는걸 알고 있거든."
"새로운 성제가 나왔다며?"
"그래, 원래는 네가 성제를 이었어야 했어. 하지만 거기서 거론된게 정당성 문제였지.
검을 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검성제로 임명되고 나면 죽일 수도 없다.
그리고 이미 찾았을 때는 미리타엔의 무령이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성제로 추천하겠어?"
"어떻게 그렇게 남 불편한 소식을 빨리 퍼뜨리는지 몰라."
제임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더 잘 해주고 싶기는 한데, 유레크로스에서도 네가 눈에 나는건 그닥 좋지 않아.
그래서 교회에 널 묶어두라고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고."
"그걸 이제서야 말해주는거야?"
"뭐, 너도 알고 오는게 모르고 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오든 안 오든 네 자유야. 그냥 나는 사실을 전한것 뿐이고.
선생님께서도 너를 엄청나게 경계하고 계셔."
"교국으로 갔다는 그분?"
"그래. 가급적이면 스승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여길 뜨는걸 추천하긴 하는데,
아마 돌아오시려면 2주는 걸리시겠지."
"매일 교회로 오는건 어려워. 나도 자기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렇겠지. 이해해. 널 굳이 잡아다 바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심심하면 놀러올게."
"충분하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C에 대해 더 알게된 정보는 없어?"
"C?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내걸 훔쳐간 건방진 여자거든."
"그 로봇 말하는거지?"
"그래."
"알게되면 바로 연락할게.
일단 지금 그걸 교국에 전하러 선생님이 가신 거니까 기다려 봐야해."
"참 솔직해 넌."
"미덕이지."
"그래, 말은 붙이기 나름이니까."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너는 이제 갈거지?"
"그래야겠지."
"그래, 또 보자고."
"이거 가져가."
나는 가방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그는 그걸 받아 열어보더니 나에게 그걸 돌려주었다.
"성직자가 거지는 아냐."
"누가 뭐래? 기부금이야. 어, 교회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더라?"
"헌금?"
"헌금이든 성금이든 네 앞으로 달아줬어. 알아서 쓰시든지."
"고맙다."
"웃겨. 누가 너 준대? 헌금이라니까?"
"내가 부패한 신부라서 말이야."
"어떻게 쓰던 나는 모르는 일이지. 네가 알아서 관리했겠거니 생각할게."
"솔직하지 못하긴."
"네가 과하게 솔직하니까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와 헤어졌다.
금 만드는건 연금술을 이용하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무령직이 있으니까 돈 같은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읽은 책과 현상을 비교했다.
왜 원래 사용하던 마력이 아닌걸까.
유백색으로 빛나는 마력은 생명의 기운이 한껏 담겨있다.
다시 그걸 살짝 끌어내 손가락 위에 모아본다.
손에 모으는 것보다 작지만 정밀하게 모은 것을 손으로 툭툭 건드린다.
자신의 마력을 조사하는 일은 얼마나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그걸 두번 씩이나 하게 되는 일은 흔치 않다.
덕분에 나는 3일간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를 해야 했다.
내가 이전까지 써왔던 마력은 피였다.
피는 곧 생명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마력을 피로 강화하고, 피 자체에 마력이 담겨있어서 특이 체질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인간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에스트로의 피를 받았다고 했고 에스트로의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능력과 기억을 떼내며 저주를 덜어냈었으니 에스트로가 내게 능력을 주었음에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헬브람이 아닌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일때 받은 피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주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았을 테니까.
환생의 저주를 받은 것은 헬브람이고, 기록에서 헬브람이 지워지면서는
저주를 받은 대상이 사라지며 환생의 저주가 불완전해졌으니,
그래서 그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되어 생명을 받는 것으로 연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탓에 나에게는 영향이 없었다고 봐야겠지.
인간의 기준에서 훨씬 순도 높은 마력이었으니 그러려니 여겼지만
다시 말하면 원죄를 받은 최초의 악마로서의 힘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내 반지에 깃든 내가 불어넣은 힘이 더 강하다.
이전에 에스트로가 내게 해준 불과 랜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속이 비어있는 그릇일 뿐이지 가득 찬다면 내가 더 화려하리라고 말했다.
나는 힘을 덜어낸 본체이지만, 그는 환생한 존재, 기록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2일차 새벽에 알아낸 내 반지의 비밀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가 말했던 이야기, 권능은 마력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생각했다.
즉 내 원래 마력은 무언가의 권능과 이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권능이 마력의 상위격 존재라면 반지에 부여된 것이 권능이라고 가정할 때,
내가 사용했던 피의 마력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제서야 내 반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에스트로의 흑요석 반지는 자신을 인지하게 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희석되지 않도록 보전하는 능력. 이는 저주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분명 저주를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담았을 것이다.
반지는 기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내 마력이 권능이라면
분명 내 판단하에 제일 합당한 이야기는...
[권능 그 자체인 마력에 기억을 불어넣는다.]
이 반지는 내 기억이 권능의 형태로 담긴 것이었다.
그 권능에는 완전했던 시기의 내 힘이 담겨있다.
그래서 망각의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망각의 저주는 내 힘과 함께 덜어내 불완전한 상태니까.
불완전한 저주로는 완전한 권능인 반지를 이길 수 없으니까.
사막에서 생각없이 마력을 몸 전체로 빙빙 돌려대는 탓에 충분히 동화된 거겠지.
어? 그러면 잠깐만, 도서관에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마력을 돌렸던 건...?
내가 어지러울 정도로 마력을 강제로 돌렸던 건 나한테 도움이 되는 행위였다?
권능이 마력일 거라고 말한 사람이 이유 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돌린다?
그럴리가. 그제서야 수상함이 몰려온다. 또 뒤늦게 머리가 멍해진다.
"아르간티아..."
그가 아르간티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