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유레크로스의 늙은 개
결국 밤을 설쳤다.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터덜터덜 지친 몸을 끌고 거리로 나갔다.
어느정도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확연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만큼 그 눈빛들이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는 점인가.
유레크로스에 오면 그래도 내게 익숙한 무언가가 보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변한건 나뿐인가보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가게는 고기찜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였다.
입구에서부터 상큼하고 달달한 향에 고기향이 진하게 퍼져온다.
"어서오세요!"
"여기는 뭐가 제일 잘나가죠?"
"매시키나 찜에 맥주가 제일 잘 나가죠. 사실, 메뉴도 그것 뿐입니다.
금방 가져다 드리죠!"
주인은 신나게 웃으며 내 자리에 냅킨을 가져다주었다.
"매시키나를 그렇게 간단하게 잡을 수가 있나요?"
"성체라면 어렵죠. 그래서 조합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조합에서 그런 부분도 지원을 해주는군요?"
"하하! 그렇습니다. 성체는 길드에 의뢰해서 포획해주는 걸로 알고있고,
알이나 어린 개체는 양식도 한다고 듣기야 들었는데, 잘은 모르겠군요!
확실한건 제 요리만 잘하면 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네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생각없이 자리에 앉아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으려니
가게에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나는 그 손님을 알고 있었다.
비쩍 말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에,
죽상을 하고 다크서클이 드리운 눈은 초점을 잃었다.
죽지못해 사는 것 같은 칙칙한인상에서는 이전에 내가 느꼈던 밝은 모습은 없었다.
"겔씨?"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죽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 하..하하... 너구나... 이제 나도 데려갈 생각인가?"
"무슨 소리죠?"
"널 찾으려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마녀인줄도 모르고... 눈이 멀어서 헤벌레한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정말 어이가 없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부르고..."
"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 내 동생도 그렇게 죽였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오해? 오해라고?"
그가 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달려들어
내 가슴을 푹 하고 깊게 찌른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칼을 뽑아내며 말했다.
"이...괴물이...!"
피가 번진다. 참 오랜만에 피를 흘려보는 것 같다.
배쪽으로 따뜻한 피가 번져가면 나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하루도 곱게 넘어가는 날이 없어..."
그래도 피가 좀 빠졌다고 머릿속이 정리는 되는 것 같아서
침착하게 바닥에 떨어진 피를 닦는다.
배에 찔린 상처는 이미 사라졌다.
일반 날붙이로는 그렇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
"왜... 왜 피하지 않지...?"
"말했잖아요.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정말...정말 아니라고...?"
그의 눈이 격하게 떨린다.
"그정도 오해는 지금이라면 넘어가 줄 수 있어요. 좀 많이 쓰라리긴 하지만,
동생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저도 애도를 표합니다."
"하아..."
그는 털썩 내 앞에 앉았다.
가게에 손님이 나와 그 밖에 없어서 다행이었지, 마침 누군가 있었다면
이 소동을 보고 유레크로스가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다.
"마녀...라는 말은 사실인 모양인데."
"네, 사실이에요.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그 카페는 늘 사람이 많았지."
"커피라도 한잔 드려요?"
"아니, 됐어. 아직 신용할 수는 없으니까."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아직 못했어."
"그럼 같이 드실래요? 주문 했는데."
"하아... 혹시 머리가 어디가 아픈거야?
방금 난 너를 칼로 찔렀다고. 알아?"
"묶이고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불에 타고.
일일이 화냈다간 미쳐버려요."
"이미 미친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요."
나는 포크를 테이블에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를 찾았다고요?"
"그랬...지..."
"왜죠?"
"동생이 죽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어.
마을에서 주민들도 대거 사라졌어. 사람들은 안카 숲으로 갔다고 하더군.
올리브는 죽어있었고, 카페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너를 마녀라고 했으니까.
너라고... 생각했다. 첼이 그렇게 간단히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첼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첼의 일은 유감이에요. 정말로. 그리고 그 범인도 알고 있어요."
"범인을 안다고?"
"네. C에요. 마을에서 보석상을 하던 음침한 여자."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사라졌군. 하아... 콜린으로 갔던걸... 후회해...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한다고... 크읍.... 동생은.... 순진할 정도로 착했어...
바보같았고... 왜 그 녀석이 사라졌는지도 몰랐어...
그래도 괜찮았어. 분명 웃으면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콜린을 가는게 아니었는데... 왜.... 왜 우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울고있는 겔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래서 네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첼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면
정말 너무나 믿고 싶은데... 금방이라도 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면 여느때처럼 그 맛없는 저녁을 해놓고 기다릴 것 같은데...
첼이 없어... 맛없는 저녁이 그립다고..."
"고생하셨어요."
"콜린, 서지스, 유레크로스를 돌았어... 어딜 가나 없더군.
사람들은 모두 너를 범인이라고 했으니까. 하아...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해서
이 근처를 골백번은 돌아본 것 같군.
널 만나기는 했으니 괜한 짓을 한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하하...
아닌가 헛 걸음이었나? 하...하하... 후우...
그런데 이제와서 범인이 다른 사람이라니. 심지어 C는 첼이 사라진 뒤에도 콜린에 남았었는데.
그녀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도 날 만났었지. 하아..."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군. 그런데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결국 그러면 나는 헛걸음을 했네.
내가 계산할게. 먹고 가. 작은 사죄라고 생각해."
"아뇨, 싫어요."
"난 바빠서 또 금방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보냈다가 후회한 적이 많아서요."
"어쩔 수가 없어. 난 이제 잘 모르겠다고. 삶의 목적이 없어진 기분인데.
첼은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함께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함께 모험했던 사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겔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보같은 짓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알겠어요. 그거랑 별개로 식사는 하고 가세요."
"하아..."
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매시키나 찜이 나오면 토마토소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찜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부드럽게 결을 따라 찢어지는 매시키나 찜은 상당히 맛있었다.
"하... 제대로 된 요리를 오랜만에 먹는 것 같군.
내가 정신이 나갔었어.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게 바로 대뜸 찌르는게 아닌데.
혹시 알고 있었어? 난 사실 콜린에 있을때 널..."
"애인 있어요."
"하... 그래. 실언했군. 잊어줘."
겔은 그렇게 말하고 식사를 재개했다.
매시키나 찜을 다 비우고 나서 그는 살짝 젖은 눈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이제부터 다시 모험을 할거야.
더 높은 랭크를 얻어내고 반드시 동생의 복수를 하겠어.
그때 네가 동생을 죽인 범인이라고 밝혀지면 그땐 정말 죽일거야.
날 원망하지 마. 알았지..?"
"뭐, 찬 남자에게 칼맞는 기분은 한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하아... 그래. 잘 먹었어."
겔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만히 가게에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인연 자체는 정말 반가운 것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회한 것이 썩 반갑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어디든 좀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처없이 떠돌아 걸었다.
유레크로스의 거리는 확실히 미리타엔보다 치안이 좋았다.
다만 걷다보면 종종 경비원이 찾아와 내게 신원을 물어오는게 조금 귀찮았다.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섣부른 대답은 내 무덤을 판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녀로 몰릴 것이냐, 혹은 적국의 최고위 귀족으로 잡힐 것이냐.
어느 쪽이든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조용히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실제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으면 내게 말을 거는 인원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나는 거리를 구경하는 것으로 여유를 찾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대낮부터 식사하려다 몸에 칼집을 새기면 여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환기를 시키며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무렴 미리타엔보다는 유레크로스가 더 평화로울테니까.
그럼에도 내가 왠지 미리타엔을 더 안락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 지위가 보장되었고
그곳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기 때문이겠지.
체헤게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텐데.
상상만 했지만 괜히 걸음에 힘이 실린다.
"아가씨,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적당히 넘겼다.
꼭 대화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다시 그 목소리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도 아가씰 그냥 보낼 수 는 없어.
와서 잠깐 고민상담 어떤가? 자네가 고민을 말해도 좋고, 그게 아니면 내 이야기를 들어줘도 좋고.
생각보다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들어보겠나?"
나는 말을 붙이며 내 발을 묶는 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짜증이 난 눈이 그를 째려보면 머리가 희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있었다.
지팡이를 집고 선 노인은 상당히 나이가 있음에도 품위라고 할만한 점잖은 모습이 있었다.
그는 작게 미소를 띈 입꼬리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빈포드라고 하네."
"에리아에요."
"그래, 잠깐 가지."
노인은 느긋한 걸음으로 앞장서 유레크로스 성으로 향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이 남자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어도
적당히 작위를 하사받고 시간이 지나 겨우 유지만 하는
형식적인 직위 말고는 아무 실권도 없는 귀족이리라 생각했다.
어딜 가나 그런 인물은 많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가 지나간 후에 그 뒤로 보이는 경비병들이 경례를 깍듯이 올린다.
우리가 응접실로 이동한 후에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다시 띄우고는 물었다.
"그래, 내가 만든 과자인데, 맛은 나쁘지 않을걸세. 들게."
"당신은 누구죠?"
"유레크로스의 늙은 개일세."
"늙은 개요?"
"그래, 늙은 개지. 이제는 집을 지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늙은 개."
"그런 개가 저를 특정해서 짚어내고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을리가요."
"그 점에서는 순순히 따라와준 아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군."
"하아..."
"피곤하게 해서 미안하네. 나도 아가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건 알아."
"그럼요?"
"다만 거래하고 싶은게 있어서 말이야. 이야기나 들어보라고 부른걸세.
썩 나쁜 제안은 아닐테니까."
"그래요, 당신이 누구인지 먼저 확실히 알려주신다면요."
"빈포드 락크루거라고 하네. 유레크로스의 전 기병대장이자, 총대장이었지.
지금은 보다시피 그저 나이든 노인이지만 말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눈이 상당히 날카로우시네요.
그 지팡이도 강도가 상당해보이고요."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해칠 생각도 능력도 없으니까."
"그래요, 말씀해보세요."
"무령이라고 들었는데, 황제에게 동맹을 제안해줄 수 있겠나?
유레크로스는 오랜 기간 미리타엔과 적국으로서 지내왔다는 건 알거라 생각하네.
지금에서야 그걸 바꾸는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지.
자네는 무령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가치가 높잖나.
알다시피 죽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녀의 존재증명은 충분하다고 보니까."
"제가 죽지 않는지는 모르는 일이죠."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보구만. 아까 식당에서 일어난 일을 봤네."
"아무도 없었는데요?"
"가게 안에 있는 시선만 조심하면 쓰나. 적은 어디서든 나타나는 건데.
조금더 시야를 넓게 보는 습관을 가지게. 아, 자네는 기사가 아니군.
실례했네."
"협상은 미리타엔 황제와 직접 하시는걸 추천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네가 다리를 놓아주길 바라네."
"거절한다면요?"
"그래도 되네. 이건 개인적인 바램이었으니까. 해도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것들 하나씩은 있잖은가?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가 어느 정도까지 내 의견을 수용할는지
일단 한번 던져보는 버림패 같은걸세."
"전 그런거 안좋아해요."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하하..."
그렇게 웃더니 그는 표정을 싹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병사들에게 영기술을 가르쳐주게."
"영기술이요?"
"그렇네. 미리타엔의 각종 공병기와 약물을 상대하기에 유레크로스는 너무 약해.
영기술을 배운다면 그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병사가 나올걸세.
영기술은 단순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의 가치가 있어.
알아보는 이들은 얼마 없겠지만. 그리고 우연히 조사하던 중에 알게 되었네.
영기술은 훌륭한 스승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걸세."
"어떻게 저를 찾았죠?"
"우리도 눈먼 장님이 아니듯이 정부청사 건물에서 빛이 별안간 튀어오르면
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네. 아주 적합한 교사를 찾았다고 생각했지."
"그럼 조건을 네 가지 붙입시다."
"네 가지나? 들어는 볼까?"
"교육중에 죽는 병사에 대해 책임을 묻지 마세요."
"그건 부득이한 건가 아니면, 죽이겠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요."
"하아... 더 말해보게."
"심기에 거슬리면 언제든 일방적으로 그만둘 수 있게는 해주세요."
"그건 그렇게 하지."
"가르친 아이중에 영특한 아이가 있다면 한명, 제가 데려가게 해주세요."
"음... 그렇게 하게."
"마지막으로 20살이 넘은 사람은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왜지?"
"첫째, 나이가 너무 많으면 효율이 좋지 않고, 둘째, 제 외관상 절 만만하게 볼 것 같으니까요.
셋째, 가르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넷째, 인원을 추려야 저도 가르치기 쉬우니까요."
"그렇게 하게. 보수는 얼마가 좋은가?"
"시간나면 테르도어 대성당에 기부나 하세요."
"하... 참, 마녀라는 여자 입에서 그런 소리도 나오는가?"
"그러게요. 저도 제가 한평생 마녀인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천사라네요."
"천사...천사라... 맞는 말이구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