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날개를 접은 학과 웅크린 곰
"어... 반갑습니다 여러분. 약 한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여러분을 교육하게 된 에리아입니다."
첫 인사는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환영인사도 없었고 반색도 없었다.
그저 그 상황을 수긍하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날 바라보는 얼굴을 보면서
나도 뭔가 굳이 트집을 잡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총원이 51명이라고 들었는데 빈자리가 보이는군요.
오지 않은 인원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시작합시다."
어차피 큰 관심은 없었다.
내가 강의를 맡겠다고 하고 나서 내게 보좌로 붙은 인원이 강의를 듣지 않은 이들을 체크해서
리스트를 뽑아 늙은 개에게 가져다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을 맡으면서도 그 역시 내게 불신을 한가득 담은 눈빛을 보낸 건 매한가지다
다만 그는 내가 누구인지, 왜 이 교육을 맡아서 하고 있는지 잘 아는 눈치였다.
"여러분들은 기초 마ㅂ...영기술 교육을 받은 후 왕실 마도병으로서 활동하게 될 겁니다.
재능이 없는 분들은 가차없이 쳐내고 다른 인원으로 메우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마력의 기초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사전에 나눠드린 유인물을 보시면 됩니다."
그러자 한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껏 유레크로스는 영기술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영기술을 사용해 병사를 육성한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총검이나 영기술이나 적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같지 않습니까?"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나가셔도 좋습니다.
솔직히 50명도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면 피곤하거든요."
내가 말을 마치면 한 무더기의 병사들이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남은 인원은 고작 23명.
상당히 많이 줄어버린 인원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보좌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금방 새로운 인원을 보충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놔두세요. 군인이, 기사가 저렇게 본분을 내던지고 나간걸 보면
누가 제일 흥분하실까요? 제 책임은 아니잖아요?
리더쉽이 없다고 하면 사실이지만, 저도 절 따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가르칠 여력은 없어요."
"...."
나는 남는 사람들을 모아 강의를 계속했다.
"마력은 높은곳에서 낮은 곳으로,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특성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마력회로의 중심이 어디라고 알려드렸죠?"
"""척추입니다!"""
"제대로 배울 생각이 있는 학생이 있긴 하네요."
그러나 분명히 그들 사이에는 대체 이런 일을 왜 하냐는 눈빛이 섞여 있었다.
나를 얕보려고 하는 눈빛 역시 남아있었다.
그들과 나이차도 그닥 나지 않아보이는 내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뭘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앞에 서 있느냐는 의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러분은 제가 못미더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들의 시선은 내게 몰렸다.
이 강의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있었던 제대로 된 집중이었다.
배울 생각이 있는 자가 하나라도 있는 이상, 그들의 앞에서는 얕보여서는 안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좋습니다. 모두 일어나 주세요. 제한시간 10분을 드리겠습니다.
전력으로 저를 공격해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으면 아니, 절 공격할 수 있다면
저는 여러분들께 가르칠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여러분이 괄시하는게 영기술이든, 지금 여러분 앞에 서있는 저든.
어느 쪽이든 두번 다시 개무시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박살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보기에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죽지는 않게 해드리죠."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일까,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잡았다.
그 칼끝이 내 목을 향하는 순간, 나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이들에게 교육을 해 줄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힘을 새로 시험해봐야 하기도 했으니까.
반지를 낀 손을 쥐었다. 불끈 들어가는 힘은 팔끝에서 휘감긴다.
나는 반쪽짜리 천사니까, 남은 반쪽은 마녀로 채워도 괜찮겠지.
그렇게 깨닫고 나니 드디어 반지가 없는 왼팔에서도 붉은 마력이 떠오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날 향해 달려드는 병사의 엄심갑을 들쳐잡고 그대로 관성을 이용해 회전,
검을 휘두르던 동료에게 던져버린다. 유백색으로 빛나는 생명의 마력덩어리를
바닥에 과하게 뿌려넣는다.
메마른 땅이었던 곳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내 발 끝에서 거대한 땅골렘이 솟아나고 나면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앉은 나를 보고 병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래서는...! 공격이고 뭐고...!"
골렘의 거대한 손이 병사를 내리찍을 때마다 흙무더기에 파묻혀 고개만 겨우 내민 병사들이 소리쳤고,
손에 붙들린 병사를 가차없이 내던지는 골렘은 병사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때 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자, 지금까지는 천사였고, 이제 마녀를 보여줘야겠죠?"
잔뜩 박살난 병사들이 흘린 피가 도리어 그들을 묶기 시작한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 출혈량이 늘어나면 마치 송곳처럼 날카롭게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핏물에 병사들은 하나 둘 혼절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희망을 놓고 기절하기를 택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은 마법을 거두고 대신 환각을 보여주었다.
그 네버브레이크와 용병단도 좋아한 환각이니까 좋은 경험이 되겠지.
마침내 두 발로 선 병사가 하나도 없게 된 후에 나는 골렘을 물렸다.
골렘은 진흙이 녹아내리듯 스르륵 녹아 파인 땅을 메꾸었다.
"첫 수업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아무도 수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방금 그 상황속에서 병사들의 전투타입을 파악했다.
무턱대고 돌진하는 자, 쾌검을 다루는 자, 빠른 기동력으로 뒤를 치려는자.
그들에게 맞는 마력운용을 가르치려면 나도 준비를 조금은 해 와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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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개, 빈포드 락크루거는 기사단의 전설이다.
은퇴한 지금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그의 뒤를 보고 기사단에 지원한다.
그리고 그는 왕왕 그들에게 찾아가 격려와 고무를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후배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남자였기도 하다.
그는 오늘도 국력강화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병과로 인한 국력강화를 기대하며
기껏 에리아에게 영기술 강의를 부탁했다.
그녀는 천재였다. 이제껏 만난 누구보다 화려하고 가식 없이 강했다.
분명 유레크로스도 마도병을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보이는 병사들의 불평은 그저 흘릴 수 없는 것이었다.
빈포드를 눈치채지 못하고 앞전에서 떠드는 목소리가 멎어간다.
"아니, 우리가 정말 어디서 굴러온 건지도 모르는 여자말을 들어야 되나?
어? 게다가 유레크로스 출신도 아니라며? 그럼 우리가 그걸 들을 이유가 있나?
진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병사들이 그만둬도 찍소리도 못하지.
씨발년이 꼴에 잘난 척은."
"그 이야기 조금만 더 해주겠나?"
그 목소리에 얼어붙은 병사가 고개만 돌렸을때는 이미 인자한 미소를 담은
빈포드가 흥미로운 듯이 듣고 있었다.
"아...아니, 빈포드님..."
"자네 혹시 교국에서 추적중인 마녀의 이야기는 아나?"
"교국의 마녀 말입니까?"
"그래, 어쩌면 참 오래된 이름이기도 하지. 역사서에 꼭 나오는데,
혹시 공부를 게을리했나?"
"아.. 아닙니다!"
"스스로 나왔다는데 뭐라고 할 말은 없는데,
그래서 그 여자가 뭘 가르치던가?"
"모릅니다."
"모른다고? 수업을 듣기도 전에 나온건가?"
"대다수가 그랬을겁니다."
그제서야 숨이 턱 막힌 빈포드는 생각했다.
아, 심기에 거슬리면 언제든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
병사들에게 기본적인 안내조차 하지 않고 보냈으니,
그녀가 척을 지고 유레크로스를 떠난다면
이는 분명히 크게 손해보는 일이다.
빈포드는 곧장 발걸음을 돌려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침묵이 이어진다.
이미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병사 몇몇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자네들 여기서 강의를 들은 병사들인가?"
"그렇습니다!"
"강의는 어떻던가...?"
"일단 저희 앞으로 내려온 명령이기 때문에 들었습니다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처음보는 여자 하나가 올라와서는 영기술은 커녕 마력이니 하는 소리나 했습니다.
아마 제대로 수업을 들은 이들은 없었을 겁니다."
"하아..."
그들은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고 초반에 나온 이들이었지만
빈포드는 그런걸 알리가 없었다.
정작 진짜 수업은 병사를 개패듯 패서 던져두었던 것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빈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그래, 쉬게."
그리고 성 내부 기사단의 깃발이 걸린 철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서 들린 목소리를 들으며 빈포드가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는
빈포드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나이가 든 갈색 수염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장님."
"이제 대장은 자네 아니던가. 늘 말하지만, 나는 이제 늙은 개라네.
집 지키는 일도, 짖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하지만 대장님 같은 분은 두번 다시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절 다 찾으셨습니까?"
기사단의 훈련대장 존이었다.
그는 서류 작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펜을 끄적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내가 분명히 인원을 차출해서 마도병을 기획해보자고 하지 않았나?"
"그러셨었지요. 나이가 스물이 안된 녀석들로 모아달라고도 하셨습니다.
덕분에 몇 없는 젊은 병사들은 다 그쪽으로 빠졌습니다.
무슨 훈련을 했는지, 대낮부터 얼굴이 벌게져서는 여기저기서 술이나 마시는 모습이
아주 고강도의 훈련을 받았다 싶더군요."
"자네는 그 병사들을 누가 가르쳤을거라 생각하나?"
"글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국의 성연만큼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연이 가르치는 교국 성마도부대는 이기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마녀가 성연보다 모자라다고 보나?"
빈포드가 그렇게 말하며 수염을 메만지면 그제서야 존은 서류에 못박아두었던 눈을 뗀다.
"마녀 말입니까?"
"마녀 에리아, 현재 미리타엔 제국의 무령으로 있는 자라네."
"마녀 에리아라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제국에서 선수를 치는 바람에 저희쪽에서도 상당히 안타까웠던 전적도 있으니 말입니다.
무령이라는 직책을 그렇게 덜컥 던져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잖습니까.
불사의 존재라는 그 상징성 만으로도 외교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큰지 잘 아시면서
성연에게 밀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공식전으로 성연을 압도적 차이로 이겼다고 하는 자들이 늘었습니다."
"압도적 전력차로 이겼다는 이야기는 누가 하고 다닌다던가?"
"대장간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이지 누구겠습니까.
대장간에서 문제가 터진 모양이더군요. 대장간의 기술자들이
대부분 메카닉으로 직종을 변경하고 모험가로 등록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주 순종적이던 회로파 기술자들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같더군요.
최초라고 하더군요. 그 놈 때문에 트래퍼라는 직종이 생겼답니다."
"트래퍼?"
"물체나 바닥에 기술로 진을 쳐서 필요할 때 발동하는 식이랍니다.
함정을 설치하는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유레크로스로 넘어온 그 놈 하나 때문에 불만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하나?"
"네 그렇습니다. 아돌퍼스라고 하는 놈인데, 다른 모험가들을 압박하고
압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5급 모험가로 성장했습니다."
"군에서 데려오겠다는 말은 했나?"
"거절했습니다. 아직 사죄하지 못했다고 했다더군요."
"골치아프구만. 영기술을 다루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우리 군은 아직도 그걸 다루지 못하면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고 있어."
"그래서 대체 마녀 에리아가 왜 나온 겁니까?"
"이번에 내가 데려왔던 자가 에리아였다네."
"네?"
"마도병을 만들 계획이라면 그녀가 제격이라고 생각했지.
겨우 여러가지 조항을 달아 앉힌 자리였네.
이걸로 그녀에게 유레크로스에서도 빚을 지워두고 싶었던 걸세.
그런데 완전히 실패해버렸군."
입을 다문 존이 가만히 생각하며 펜으로 별을 그려댔다.
"그런걸 지금 저 병사들이 내치고 길바닥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그런 의미입니까?"
"하아...."
"제가 적당히 처리하겠습니다. 피해가 없는 방향으로..."
"할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