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지위와 입장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큰소리를 친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존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백련 기사단의 조니입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조니는 존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조니에게 존은 상관으로서의 위엄보다는 놀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고 있다.
"조니,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거냐."
"대체 뭐에요?"
"뭘 말이냐?"
"오늘 군에서 20세가 되지 않은 병사들을 전부 차출해서 편성한 마도군 말이에요.
아버지, 이 꼴을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그 여잔 그냥 미친년이었다고요!"
"미친년?"
"대체 유레크로스 정규군을 뗴서 편성할 정도로 중요한 신기군이 왜 어디서 놀아먹던건지도 모를
여자 애새끼 하나한테 굴러야 하는 건데요? 네?"
"그래, 뭐 비록 지금은 강의가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강의? 강의라고요? 씨발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존은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신창이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가 훈련대장인거 저도 알아요.
그래서 다른 병사들이 다 빠져나가고 욕을 해도 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요.
그랬는데 이제와서 죽도록 구른 아들한테 강의라고요?
다리가 부러졌고, 인대가 늘어났다고 하던데요.
군의관이 3달은 사람 구실을 못할거라고 했다고요!
그걸 보고 그 미친년이 뭐라고 했는지 알기나 하시냐고요!"
"뭐라고... 하더냐."
"여러분이 지금 다치신 건 여러분의 미숙 때문이에요.
한번 각자 상처와 부상을 되짚으며 자신이 어떤 스타일로 싸우려 하는지
잘 파악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상은 내일 일괄적으로 치유해드리겠습니다.
라더군요! 군의관이 못한다는데 제깟게 그따위로 말을 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도병 같은 걸 만들겠다고 하시는거에요!"
"하아... 조니, 미안하다. 딱 하루만. 하루만 더 강의를 들어보려무나.
내일도 내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도 손을 쓰마."
"그 여자가 뭔데요?"
"그건 알려줄 수가 없다."
"씨발! 대체 아버지는 날마다 그놈의 군! 유레크로스 훈련대장은 아버지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훈련을 시킨다고 병신같이 매일매일! 됐어요! 늘 이렇게 되면서 기대를 가지고 여길 찾아오는게 아니었어요!"
"조니..."
조니는 쾅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 마자 다시 조용한 노크소리가 들리고 그의 부관이 들어왔다.
"왔는가."
"네, 대장님."
"하아...."
"아드님 일 때문이십니까."
"그렇지. 나라고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없을리가.
훈련대장이라는 일이 이런 건줄 알았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이 아들과 척을 질 일이 생길줄은 몰랐다고."
"참, 제쪽에서도 믿기 힘들긴 합니다만, 상황을 지켜본 이를 부르는게 빠르겠죠."
"상황을 지켜본 이?"
"제 재량으로 그녀에게 감시자를 붙였습니다. 형식상 보좌관이라는 직책으로 말이죠.
금방 올겁니다. 그녀의 강의가 어떤 형식이었는지 설명하러 말이죠."
그리고 잠시 기다리면 정말로 낮은 노크소리와 함께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뭐야, 파울. 네가 보좌관이었어?"
"예, 그렇습니다. 기사단 파울입니다."
"무슨 예를 차려, 친구끼리. 설명해봐. 대체 씨발 어떤 강의를 한거야?"
"원래 군에서 부탁한 것은 훈련이었습니다만,
본인이 훈련보다는 강의 형식을 택하고 싶다고 말했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병사는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참석하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나르딕 경의 아들을 필두로 하는 그룹에서
출신성분이 명확하지 않은 여성에게, 그것도 젊어보이는 여성에게 배울 것은 없다며
병사들을 선동해 불참의사를 밝혔습니다. 훈련도 아니고 강의라고 하니 더욱 그랬겠죠."
"또 그놈의 나르딕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르딕 경은 이전부터 늘 그랬으니까요.
언제 한번이라도 대장님이 진행하는 일에 찬성한 적이 없잖습니까."
"하필이면 그 아들놈들이 그걸 보고 배웠다는게 더 열받는군.
덕분에 우리 조니는 오기로 남아있다가 된통 깨진거고."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조니는 분명히 재능이 있는 군인입니다.
젊은 나이에 기사로서 자질을 그렇게 훌륭히 지키는 자는 보기 드물 정도니까요.
아버지께 인정받고싶다는 일념 하나로 그렇게 노력하는 녀석입니다.
이제 인정을 해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기사이고, 군인이니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나름대로 챙겨주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
"누가 모르겠습니까. 저희도 다 알고 있죠.
조니는 아니지만요. 그 아이도 알겁니다. 다만 조금더 부정을 느끼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형식상, 아무래도 군인 신분으로서 챙겨주시는 것과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얼씨구? 누가 보면 아들은 네가 있는 줄 알겠는데?"
"제 아버지도 그러셨으니까요."
"아, 그래. 그랬지... 그래서 훈련 내용은?"
"도저히 병사들이 수업에 참여할 의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여튼 콧대는 높아서 애새끼들이...하아... 아무 설명도 없이 집어넣은 내 탓인가.
하긴 나도 강사가 누군지 제대로 몰랐으니까. 너는 알았냐?"
"저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전 대ㅈ... 아니, 늙은 개에게 말입니다."
"편하게 해."
"여기는 군입니다."
"하여튼 융통성은 하나도 없어서는. 내 부관이 그런거 보고 배우면
그날로 너는 경계 발령이야."
"하아... 알겠어.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제 눈치 안보셔도 됩니다 아저씨."
"눈 앞에서 훈련대장이라는 양반이 눈을 저렇게 뜨고 있는데 내가 누구 말을 들어야겠냐.
너라도 좀 이해해라. 나도 지친다고. 하여튼 간에 이 기사단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었기에
대장이고 단장이고 세습이돼? 빈포드 전대장의 부관이 훈련대장을 맡고,
훈련대장의 부관으로는 빈포드 전대장의 아들이 선택되고,
훈련대장 아들내미 뒤치닥거리는 훈련대장 불알친구가 하고있고.
씨발 이게 군이야? 어디 지방 학교 동문회지?!"
"이해해라. 어휴...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조니를 부탁하겠냐."
"그래,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너희 부자를 보면 우리 아버지가 자꾸 생각나."
"너희 아버지는 대단하신 분이셨지."
대단은 무슨, 결국 아들내미 남겨두고 부관으로서 업무를 다하겠다고
빈포드 기병대장 대신 칼침맞고 누웠는데."
"죄송합니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면 파울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됐어.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다는게 누구 탓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적당히 훈련을 정리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존, 직접 확인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두었으니까."
존이 보고서를 받아들면 그곳에는 오늘 진행한 훈련이 적혀있었다.
사실상 강의는 온데간데 없고 다짜고짜 흙골렘을 불러서 죄다 때려부쉈다는 이야기.
허무맹랑한 그 이야기의 원인이 병사들의 태만으로 인해
마녀가 도전을 받아주기로 했다는 것까지.
"말이 안나오는데. 흙골렘이 언제부터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거였지?"
"대장간이 전성기일 때도 로봇 공학자들이 여럿 들러붙어 며칠을 새야 나오는 거 아니었나?"
"저런 여자를 화나게 할 정도라니 피곤하긴 하겠군..."
그들이 그런 말을 뱉으며 한숨으로 푹푹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부관, 담배 있나?"
"있습니다."
"하나 주게. 저기 있는 파울에게도 하나 주고."
"돛대입니다."
"씨발..."
담배를 받아들고 불을 붙여 물고 나서야 존은 지친 기색으로 이마를 짚는다.
"파울, 네가 보기에도 이 마도병 육성 프로그램을 계속 해야할 것 같아?"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훈련대장은 너잖아?"
"나야 빈포드씨가 하자고 하셨으니까 하는거지."
"군에서 은퇴한 사람이야. 지금 결정권자는 너고."
"일단 내일 훈련은 한번 봐야 할 필요가 있겠군. 너도 같이 가지."
그렇게 말하면 부관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계기는 마도병 훈련이라지만 나한테 걸린게 꽤나 많군.
나르딕부터 아들내미 풀어주기, 훈련 개편에 군종 개편...하아...
다 나가봐. 나가보고 에리아, 그 마녀를 불러줘."
그렇게 말하면 부관은 파울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씨발... 전대 훈련대장이 좀 있을때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시간은 흐르고 방에 조용히 노크소리가 퍼진다.
여자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린다.
"에리아입니다.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들어오시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여리다 못해 가냘파 보이는 여자였다.
에리아. 그 공포의 마녀라고 불린 존재는 쥐색 후드를 걸치고
낡은 가죽 가방을 맨 순수해보이는 소녀였다.
"무슨일로 부르셨나요?"
"오늘 있었다는 훈련에 대해서, 그리고 훈련대장으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시간 괜찮겠습니까?"
"네, 남는게 시간이죠."
"반갑습니다. 저는 존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우선 사과부터 드리고 시작할게요.
다소 과격한 훈련을 통해 병사들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을 수준으로 만든 점 사과드립니다.
내일 회복을 진행할 생각이에요. 오늘 훈련에 참가한 병사 명단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반드시 내일 다시 훈련에 참여하도록 해주세요."
"사과가 어째 강요같군요. 좋습니다. 애초에 병사들에게 그닥 좋은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셨다고요."
"그런건 아니에요. 애초에 모두 다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습니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에리아는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에레푸틴을 따라 내밀었다.
"드세요. 에레푸틴이에요.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못마실 정도는 아닐거에요."
"고맙습니다."
잔을 받아들고 홀짝이는 존은 에리아를 가만히 흩어본다.
"힘든 일은 없으셨습니까?"
"네, 크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병사들이 전체적으로 정렬되어있지 않아서요.
병사들의 전투 성향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써봤는데, 참고하시면 좋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고 에리아는 그에게 종이더미를 내밀었다.
"전투에 소질이 있으십니까?"
"아뇨, 저는 몸 쓰는 일은 못해요. 전투는 다 다른 쪽에 맡기고,
관찰만 해서 찾아낸 결과에요."
"관찰만이라.. 그렇겠군요."
"칼을 막아내고 공격을 피하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칼을 막아내고 공격을 피할 필요가 없다면 조금 더 정말하게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서류는 다음 시간에 부르지 않아도 될 병사들입니다."
"부르지 않아도 된다...?"
"마ㅂ...아니지, 영기술에 소질이 없어요. 체내 마력량도 적고, 무리하다가 통제가 안되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녀가 건네는 서류를 또 받아 살펴보는 존.
서류에 보이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군 내에서도 그다지 기량을 보이지 못하는 이들이다.
흔히 말해서 폐급이라고 불리는 병사들. 고작 하루 수업하고 그걸 알아낸다니.
아무래도 단순히 시간 강사로 부른 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부대는 학교가 아닙니다. 가능성이 없는 자를 굳이 데리고 가실 필요는 없지요."
그렇게 대답하고 그는 서류를 따로 옆으로 빼냈다.
그녀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에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약 한달. 그 한달이라는 시간 내에 제가 장담하고 마도병을 만들어드리는건..."
"불가능한 겁니까?"
"있어요. 간단하죠. 다만 그 모두가 제 훈련을 따라온다는 가정 하에요.
지금 상황으로는 10명 안팎이겠네요."
"보아하니 서면교육은 그닥 의미가 없어보여서 앞으로도 오늘처럼 반쯤 죽여가면서
굴릴 생각인데, 계속해도 되나요?"
"......"
"불편하시면 안하셔도 됩니다. 그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을 뿐이죠."
"하십시오. 마음대로 한번 해보시고, 죽이지만 마시죠."
"하루뒤에 말끔하게 고쳐 드리겠습니다. 자기가 왜 굴렀는지 반성할 시간은 줘야하니까요.
그리고, 그 하루동안 자기도 느끼는게 있겠죠."
"상당히 스파르타 식이군요."
"네, 소질이 없으니까요."
"가르치시는데 말입니까?"
"그럴리가요. 병사들이 말이죠."
"하아... 내일은 저도 훈련을 좀 봐야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존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