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물 밑 작업
* * *
오전 11시 30분. 유레크로스의 왕성 앞으로 사절이 도착했다.
사절은 정중히 유레크로스의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짧았고 사절은 왕성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잘린 사절의 머리는 붉은 피를 흩뿌리며 카펫 위를 굴렀다.
"그래서 왜 이 사단이 난 건가?"
왕이 입을 열었다.
유레크로스의 젊은 왕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법을 우선시 한다고 입헌군주제를 내걸었던 왕은 이미 없었다.
분노로 인한건지 아니면 숨겨둔 본심이 튀어나온건지.
확실히는 몰라도 왕이 권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왕에게 법이란 자신이 하기 피곤한 일을 신하들에게 떠맡기고
권력만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정작 이 사단을 주도했던 나르딕 역시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대체 에리아가 누구냔 말이다."
그 말이 나오고 나서 나르딕이 움찔 몸을 떨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왕을 바라보았을 때 그 왕의 눈에 어린 분노는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보인다.
마른 침을 넘겨도 목은 바짝 바짝 마른다.
결국 나르딕은 침묵을 고수한다. 주변의 총리들이 자신을 째려보는게 느껴진다.
시선이 따갑다. 분명 다음 모임에서의 대우는 더 나빠질 것이다.
안그래도 후작의 신분에서 총리로 올라온 것으로 차별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는데
이 공작 출신인 총리들이 자신을 물어뜯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가 겨우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었다.
"됐다, 말할 필요도 없군. 알아보기도 늦었다. 전쟁을 준비하라."
"전쟁... 말입니까?"
열 총리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왕은 그제서야 짜증을 낸다.
"그러라고 그대들을 그 자리에 앉힌 것 아닌가? 일처리는 제대로 하겠다고 맹세했던 자가
이제와서 전쟁준비 하나 제대로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더냐?
애시당초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와서 일처리는 이렇게 해놓고 준비도 뒷처리도 못하겠다고?!"
"아...아니옵니다!"
"어떻게든 미리타엔의 대군을 막아내야 한다."
왕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리를 빠져나간다.
전쟁이라니. 이 상황까지 흘러온 것은
분명 자신이 연루되어 있으리라는 걸 나르딕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회의는 한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대부분은 나르딕에 내한 질책이었다.
이미 이들은 나르딕이 에리아를 체포해 감옥에 집어 넣은 것을 알고 있다.
결국 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인 총리들에게 나르딕은 한 시간 가량 모욕을 들어야 했다.
먼저 발을 빼겠다고 말하고 이탈한 총리도 있었지만 영문을 모른 나르딕은
그들이 겁쟁이라고만 생각했다. 에리아가 아니어도 마도병은 있는데.
충분히 훈련된 마도병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레크로스는 이제껏 숱한 전쟁을 겪고도 버틴 국가이니까.
오히려 그깟 마녀 하나에게 벌벌 떨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여겼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나르딕은 군으로 돌아와 존에게 물었다.
"그 마녀가 뭐기에 다들 그렇게 소란인지 말해라."
"모르실리 없잖습니까. 마녀입니다."
"웃기지 마라! 비밀이 있을게다! 나를 속이려 들다니!
이제와서 발빼려고 해도 늦었다. 그런 여자를 훈련교관으로 세운 네놈의 문제가 아니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수치를 겪었는지 알기나 알고 떠드는 거냐?"
"제 문제라고요?"
존이 고개를 들며 물으면 나르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나르딕은 존에게 말했다.
"오전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미리타엔과 전쟁을 한다더군."
"우리쪽에서 결정한 사안은 아닐테고, 자세를 낮출 생각은... 하아...
총리라고 있는게 이런 병신이니 제대로 될 턱이 있나."
"대체 그 여자가 뭐길래!"
"무령입니다!"
"뭐?"
"미리타엔의 무령이라고 말했습니다."
"....."
속이 철렁했다. 무령이라면 타국의 국빈이다. 오히려 자신보다 계급이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뭘 한건지 깨달은 나르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도망치기 시작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라리 감옥에서 에리아를 만나기로 한 그는 그 길로 바로 감옥으로 달렸다.
지하감옥에 수감된 에리아를 불러달라고 간수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그를 바라보며 지하감옥에 수감된 범죄자의 면회는 불가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범죄자의 면회가 불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말대로입니다. 다 설명 드렸잖습니까?
지하감옥에 수감되는 범죄자는 국가의 전복이나 붕괴의 위험이 있는자, 개선 가능성이 없는 자,
혹은 죄질이 악하거나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자.
하나같이 면회나 잠깐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 만으로 위험한 자들이라고.
모든 범죄자는 수감 되기 전에 안내받는 사항입니다.
이전에 찾아오셨을 때 철회할 일은 없으리라고 판결 이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잖습니까?"
"판결? 그런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올리브의 살해와 대장간의 혼란 건에 대해 교국과 대장간에 협조를 요청한 상황입니다.
각국에서 인원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판결이 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에리아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나르딕 총리님께서 대로변에 공문을 써붙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번죄자가 대로변을 활보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상 처형일자도 나온 상황에 그런 범죄자를 어떻게 빼냅니까?"
"그것 때문에 전쟁이 나게 새겼단 말이다!"
"그래서 붙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씨발 미리타엔의 무령이라잖나! 그 여자가!"
"하지만 법이 그렇습니다. 법을 바꾸시려면 적어도 총리님들께서 어느정도 합의를 하시고 나서
진행하셔야 합니다. 단 한 분의 말씀때문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런 씨발! 융통성없는 새끼를 누가 간수로 세웠어!
그럼 내가 보러 가겠다! 지하감옥으로 안내해!"
"하.. 마음대로 하시죠."
그렇게 지하실로 내려간 그의 코를 찌르는 악취와
철창안에서 비웃음을 보내는 범죄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르딕은 간수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면 그 구석 작은 방 철창 안에서 작은 체구의 소녀가 앉아있다.
"여기 있었군."
"아, 어쩐 일로 찾아왔죠?"
"어쩐 일로 찾아왔죠? 하! 웃기는군. 일부러 나를 엿먹이려고 거기 들어간걸 모를 줄 아나?"
"무슨 소리죠?"
에리아의 눈이 가늘게 뜨인다.
눈매는 부드럽지만 왜인지 서늘해지는 느낌이 그의 몸을 스친다.
"제가 뭘 했죠? 훈련을 시켜 달라기에 무상으로 훈련을 도와드렸고,
뺨을 치기에 맞았고, 잘못을 했다기에 잡혀왔고, 이젠 또 뭘 위해서 제가 여기 들어왔다고 하시려고요?"
"너...너라면 거기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무력으로라도 저항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뭐냐?
너라고 그 감옥에 갇히고 싶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적어도 직급을 밝힐 수는 있었잖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저는 범죄자라고 하신건 그쪽이시죠?
타지에서 타국의 법에 따라 수감된 걸 이제와서 제탓으로 돌리신다고요?
수감된 동안 대장간에서도 분명 말이 나올거고,
조사하다보면 제가 범인이 아니라고 이야기가 나올거라 생각도 했고요."
"그런 이유로 감옥을 순순히 들어간다고?"
"음... 훈련이 슬슬 지겨워지려고 했거든요."
"뭐...?"
훈련이 지겨워졌다.
그 말을 나르딕이 모를리가 없다.
간수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원인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카르고르의 투정을 듣고 훈련을 중단시킨 것도, 새로운 영기술사를 구한 것도 자신이다.
하는 수 없었다. 결국 일은 커져버렸으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르딕은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초조해져도 나르딕은 카르고르에게 에리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조니를 포함한 몇몇 마도병 후보들이 훈련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더는 성과가 보이지 않아 스스로 원래 보직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나르딕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설마, 그게 정말 최선의 훈련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나면
그제서야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수긍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을 세우기 위해 에리아를 밀어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대체로 온 화이트가 교관으로서 어느정도는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도 정작 성과를 보였던 이들은 모두 교관이 바뀌고 나서 그만두었다고 말하니
스스로를 변명할 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제발 에리아가 범인이길 바라기 시작했다.
올리브 살해의 주역이든, 대장간을 망친 범인이든. 어느 쪽이건 얻어걸리길 바랬다.
그러나 이미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아빠, 듣고 있어? 화이트 교관은 훨씬 요령을 아는 사람이라고!
역시 화력이 중요하다는걸 아는거지! 압도적인 마력이 중요하다는데
내가 또 거기서 체내 내장된 마력량이 놀라운 정도라고 하더라고!"
"카르고르..."
"어? 역시 아빠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너도 훈련을 그만둬라."
"뭐? 왜?"
"한동안 엠페레스로 가는 건 어떠냐? 가고 싶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럼 가지 뭐. 웬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고싶은건 맞으니까!
엠페레스에는 예쁜 여자가 많다고 들었거든!"
"그래... 아빠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다녀와라."
"언제부터?"
"....언제부터...시간이 나겠니?"
"당장이라도!"
"그럼 바로 표를 구해주마.
엄마 모시고 다녀와라."
카르고르는 그날 바로 표를 들고 항구로 떠났다.
나르딕 총리의 부인인 커리나 모빌세오도 따라 나섰다.
경비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간 둘은 마차를 잡았다.
아직까지 마차가 다니는 곳은 유레크로스 뿐이리라.
"뭐야? 우린 바쁘다고. 더 빨리 몰 수 없어?"
"노력하겠습니다."
"씨발 무슨 마부가 이래?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말을 하면 네 라고 대답하라고."
"그만 하렴 카르고르. 우리가 참아야지."
"하 정말 이래서 하층민들은..."
"그나저나 여자 마부는 또 처음보는구나."
"그러게 엄마. 보통은 남자가 모는 마차만 타 봤는데."
그렇게 덜컹이는 마차는 좁은 골목 사이를 덜컹이며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정차하면 카르고르가 말했다.
"뭐야? 벌써 도착했어?"
그렇게 말한 카르고르가 문을 열면 마부가 공손히 서 있었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가슴께를 보고 카르고르가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까 너 몸이 꽤 좋구나? 나이는 몇이지? 결혼은 했어?"
마부는 말 대신 한숨을 푹 내쉬고 답했다.
"요즘은 이런 것들도 귀족이라고 나서니... 유레크로스도 볼만하군요."
"뭐라고?"
카르고르의 손이 위로 올라간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아버지가 총리 나르딕이라는 건 알고 씨부리는거냐?"
"아무래도 제대로 짚은것 같습니다."
마부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었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돌바닥을 치고 울린다.
"너...너 뭐하는 년이야...?"
그 말에 마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낀 카르고르가 뒤로 물러서지만
애초에 호신용 무기는 일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부는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손에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오지마...!"
"소용 없습니다. 일부러 골목 사이사이를 통해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왔으니까요.
이 근처는 이미 자매들이 통제해 놓았습니다."
"너... 진짜 죽고싶어? 내가 누군줄 알고...!"
카르고르는 손으로 마력을 모은다. 억지로 몰아넣은 마력이 팔을 물들인다.
그 모습에 당황한 듯 마부가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
그 움직임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정도로 민첩했다.
"마력을 알아..? 너 마부가 아니구나?"
카르고르가 자신을 얻은듯 손을 휘두른다.
검푸른 빛을 흩날리듯 손에서 튀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공기와 만나 쨍그랑 소리를 낸다.
마력 자체가 깨지는 것이었다. 깨지는 마력 조각이 틱틱대는 소릴 낸다.
아직 미숙한 주제에억지로 손에 과한 마력을 모아 휘두르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마력은 마력, 오히려 저렇게 깨지는 마력이 통제가 불가능한 만큼 위협적이다.
"카르고르는 마력을 사용합니다. 검푸른 것이 지속적으로 깨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고하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카르고르가 말했다.
"너 누구의 사주를 받은거냐? 순순히 넘어와. 이쪽으로 붙으면 받는 돈의 세 배를 주마."
"거절합니다."
마부는 그길로 달리더니 카르고르의 팔을 노리고 칼을 휘두른다.
빠르게 움직인 카르고르가 칼을 피했지만 살짝 베인 것인지 옷자락이 잘려나가고
옅은 피가 흘렀다. 거리를 벌리고 도망을 치든 반격을 하든 할 아량으로 방향을 돌려 굴렀다.
이제 골목 구석에는 마부가, 대로쪽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카르고르가 있었다.
그러나 곧 카르고르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걸 깨달았다.
도망치려고 하자 마자 보인 광경. 타고온 마차를 앞에 두고 마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은 것이었다.
"엄마...?"
커리나는 이미 붙잡혀 목에 칼을 들이민 마부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었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겨우 붙잡혀 서 있었다.
"카르고르...! 도망쳐라! 어미는 신경쓰지 말고!"
"도주 우려 있습니다. 증원 부탁합니다."
더 온다. 증원이 올 것이다. 그런 생각이 발을 잡아끈다.
그 말이 떨어지면 카르고르는 빠르게 뒤돌아 도망쳤다.
마차에 묶인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언제 죽여둔건지 이미 말 두마리는 숨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말에서 샌 피가 돌바닥을 흘러 하수도로 버려지고 있었다.
"씨발...씨발..."
그렇게 욕을 뱉으며 반대로 도망치는 그의 귀에는
등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커리나의 점점 멎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고 높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도중에 한번 끊어졌고,
힘이 빠진 목소리가 다시금 사람을 찾아 메아리치지만
결국 그마저도 허가받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그럴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점점 질척하게 변해간다.
나중에서는 비명도 아닌 낮은 신음소리가 질척이는 물소리에 섞여 들렸다.
발이 점점 무거워진다. 달리는 카르고르의 뒤에서 무언가가 휙 날아온다.
공? 폭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멈춘 발걸음 옆을
툭툭 구르며 따라오는 그것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머...니...?"
커리나의 잘린 머리가 산발의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굴러왔다.
"이 씨발년이...!"
걸음을 멈춘 카르고르가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피로 얼룩진 옷을 하나씩 벗는
매혹적인 모습의 그녀가 있었다.
속옷까지 하나하나 벗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카르고르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왜, 헐벗은 여자 하나한테 겁먹어서 달려들지도 못하십니까?"
카르고르가 다시 그녀에게 달렸다.
어느새 몸 전체에서 마력이 풀풀 흐르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사이로 그는 달리고 있었다.
"죽여버릴거야..."
"......"
"죽여버릴거야!!!"
그러나 카르고르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빙그레 웃고는
죽은 커리나의 몸에 박힌 언제 꽂았는지도 모를 주사기를 꺼냈다.
아마 카르고르가 도망치던 새에 박아둔 것으로 보이는 것.
주사기로 피를 쭉 뽑아서는가지고 있던 약병에 섞어서 자신의 몸에 뿌린다.
옅은 잿빛이던 약물이 희여멀건 색으로 변해간다.
무슨 짓을 하는건지도 모를 광경. 그러나 여자는 달려드는 카르고르는 무시하고
그걸 자신의 성기에도 꼼꼼히 바르기 시작한다.
"이거, 약품입니다. 정액과 성분이 같은. 임신은 못하지만요.
성분검출, 유전자 검출 다 완벽할겁니다.
그렇게 만든거거든요."
그 말에 잠시 혼란을 느낀다. 정액이라니? 갑자기? 왜?
의문을 품으면서도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뻣뻣한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걷는다.
마침내 카르고르가 가까워오면 그녀는 가진 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무슨...?"
"61호, 자결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쓰러진 나체의 여성을 보며 카르고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배를 찌른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뭔가 있다. 그런 생각에 카르고르는 곧장 그녀를 안아들었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은 여성을 보고 멍하니 그녀의 배에 박힌 칼을 뽑아들었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사람이 죽었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방금 전에 죽은 여성과 똑같은 목소리였던 것 같은건 기분탓인가?
그제서야 카르고르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