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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22화 (122/303)

〈 122화 〉 협상

* * *

유레크로스 동쪽 이리아스 산맥을 중턱 있는 것이라고는 돌뿐인 작은 오두막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이거 얼마만의 손님인지 모르겠군."

"오랜만이라지만 대접할 차 정도는 있기를 바라지."

"암, 있고말고. 이도 다 빠진 개새끼 먹이 정도야."

"하하하... 아픈지 안아픈지 한번 물려볼텐가?"

"사양하지.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건가 빈포드?"

"그저 오랜 친구의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이지."

"친구라, 그런건 진작에 포기한 줄 알았는데. 기어이 만류하던 동료의 손을 뿌리치고

모험가 같은걸 하겠다고 할때 까지만 하더라도 필시 어디선가 객사할 팔자라고 생각했다네.

그런 양반이 이제와서 유레크로스의 기병대장이니 뭐니 하다가 백작위를 내려받고

호의호식 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느냔 말이야."

"그만 하게 멀로이. 그나저나 이런 곳에 박혀 살면서 생각보다 먹고살만 한가보군?

오히려 이전보다 안색이 더 좋은 것 같은데?"

"교수직을 할 때보다야 훨씬 좋지. 요즘도 방해꾼들이 종종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래, 아마 자네가 교수를 그만둔게..."

"그 이야기는 하지 말지. 머리가 아프니까 말이야."

"그러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에리아를 알고 있나?"

"에리아? 짐작가는 이름이 셋 있군."

"셋이나 있단 말인가?"

"그렇다네. 첫번째는 내가 교수직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이리야스 산맥을 돌아보던 와중에 산길에서 만난 이웃의 이름이었다네.

종종 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여자였지. 그러다 어느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런 팔자좋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닐세."

"그럼 두번째 에리아인가? 마녀라고 불리는 죽지 않는다는 여자.

만난 적은 없지만 워낙에 유명하다보니 소식은 들었다네."

"아마 그 에리아인 것 같군. 세번째는 뭔가?"

"얼마 전 집에 찾아온 기자 놈들이 멋대로 떠들고간 미리타엔의 무령 이름이지."

"정정하겠네. 자네는 에리아를 두 명 알고 있는거야."

"두 명이라고?"

"마녀가 무령일세."

"그럼 얼마전에 마녀를 체포했다는 이야기가 단순히 발뻗고 잘만한 속편한 이야기는 아니로군?

자네가 날 찾아온 이유를 좀 알 것 같네."

"멀로이, 이런 산 속에 쳐박혀서는 그런 소식은 대체 어떻게 듣는 건가?"

"자네는 기자들이 얼마나 내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지 모를 걸세.

인터뷰를 요청하고서는 늘 신문을 한 부씩 가져다 준다네."

"난 자네가 신문도 보는 사람인줄 몰랐는데."

"그럴만도 하지. 신문을 읽기 시작한 것도 한 10년 정도 된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 멀로이는 찬장에서 찻잎을 조금 뜯어 차를 내렸다.

은은한 향이 감도는 샌디민트차를 내밀며 말한다.

"적당히 마시고 돌아가게. 이제와서 괜히 내게 피해가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그럴 수야 없지. 제국에서 유레크로스에 전면전을 선포했으니까."

"뭐...?"

멀로이가 찻잔을 들다말고 동작을 멈춘다.

찰랑이는 차가 살짝 밖으로 튄다.

"하아... 그래서 지금 도와달라는 거군?"

"그렇다네. 자네는 머리가 좋으니까 유레크로스가 미리타엔과 전쟁하는데 전략적 도움을 줄 수 있겠지.

알다시피 지금 유레크로스는 이전에 비해 여러모로 약한게 사실이지.

평화로웠으니까 전쟁을 대비할 틈이 없었잖나.

물론 그만큼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현역에서 은퇴한 사람을 찾아올 정도로 궁하리라고 생각지는 못했네.

그 에리아를 만나보고 싶은데. 대화로 풀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풀어보는게 낫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며 멀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다고 되겠는가?"

"되던 안되던 해봐야지 않겠나. 어떤 여자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말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이쪽 사정을 고려해 줄 수 있는 여자라면 더욱 좋겠지만, 미리타엔의 무령이라니 벌써 오금이 저리는군.

기억해두게. 내가 일단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순간부터 나는 전쟁에 엮이는 거네."

"그렇겠지."

"큰 빚을 진거라고."

"알겠네."

"그 놈에게는 가봤나?"

"아니, 가보지 못했네. 지금은 국외에 나갔다고 하던데."

"그런가. 늙은 개에 늙은 뱀도 있는데, 늙은 까마귀가 없구만."

"그나저나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네, 왜 우리가 개, 뱀, 까마귀인지."

"모르면서 그렇게 개라고 하고 다녔나?"

"개는 좀 충성스러운 이미지니까. 왠지 어울리지 않나?"

"그래서 개일세."

"뱀은?"

"학계를 배신하고 산속에 틀어박혀 은거하는 노인이 배신자가 아니면 뭐겠나.

까마귀도 마찬가지지. 돈따라다니면서 신출귀몰 싸돌아다니는거.

그 시커먼 놈은 반짝이는 것만 사랑하니까."

"오랜만에, 아니 죽기전에는 보고 싶구만. 보디르."

"가지."

두 노인은 그렇게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미리타엔이 공식적으로 쳐들어오겠다고 공지한 날로부터 2일 전.

새로운 속보가 유레크로스에 날아들었다.

나르딕 모비세오 총리의 아들, 카르고르 모빌세오가 여성을 간살하고,

이 모습을 들키자 우발적으로 모친을 살해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르딕은 이 일로 큰 타격을 받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유레크로스 전역이 혼란스러워지면 사람들은 테르도어 대성당으로 모였다.

저마다 평화를 위한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 선택은 어찌 보면 옳은 선택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고도 즉시 쳐들어오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병사들을 충원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무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고,

셋째로, 한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수많은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죽어나가고 객사하고 아사하며

주변국은 자연히 전력으로 이용되는 인력은 적으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노예만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보란듯이 자식을 낳고,

사창가에서 버려지는 아이들은 노예로 자라며,

유전공학으로 인해 강한 자는 무제한으로 복제, 생산된다.

제국의 병사는 군대를 포함해서 각종 노예로 이루어진다.

정규 군 외 노예는 선택권이 없다.

오히려 이곳에서 죽으나 저곳에서 죽으나 하는 문제에 불과하다.

그럴바에 차라리 전쟁에 참전하고 생환할 경우

국가에서 발행하는 시민권을 얻어 잠시나마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거운 발을 옮기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공을 세우고 귀족으로 올라선 젤렌지를 알고 있다.

의욕을 불태우지 못하더라도 물러서지는 않는 전력이 되는 것은 이 까닭에서다.

제국은 지금 그렇게 병력을 준비하고 있다. 연구소와 공장을 주야로 돌려가면서.

제국의 무기는 대체적으로 기계를 이용한 무기다. 총은 물론이고, 각종 갑주도 튼튼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제국이 강한 이유는 따로 있다.

연구소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약물이 그것이다.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찍어내는 전투용 약물은 능히 약골조차도 장사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약품을 아낌없이 투약할 수 있는 노예병이라는 자원이 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몸에 해가 가는 약물을 투여하면서까지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는 전장에 나서겠는가.

하지만 노예는 다르다. 당장 약을 투여하고, 이성을 잃고 적들에게 돌격하는 고기방패가 되더라도

아무도 책임질 필요도 없고 그것의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조차 모른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죽을 노예를 가지고 다량의 적을 처리하고 나면

그 노예가 죽던 생환하던 크게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약품을 찍어내는 것은 이미 공장화되어 충분한 물량이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제국은 그 노예에게 인체수술도 감행한다.

철근을 넣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투용 기계로 개조하든

그들에게는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현재 제국의 노예와 부랑자들은 이 수술을 받고 있다.

대개 그 마지막은 심장에 폭탄이 설치되는 것인데, 생명활동이 멈춘 순간

주변에 큰 폭발을 일으키는 폭탄병을 생산해 전투 개시 직후에 먼저 개조병을 돌격시키는 것은

제국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었다.

비인륜적이다? 잔인하다? 그런 것들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저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전쟁이 깨끗하고 숭고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대량 학살인 것은 똑같다. 다만 제국에게 욕을 할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국의 황제는 난처했다.

전쟁을 선포했고, 준비했다. 그런 시점에 갑자기 날아든 편지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곧 유레크로스에서 협상을 하자고 자리를 마련하리라 생각합니다.

거절하실 이유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명분은 충분하고 칼자루는 황제께서 쥐고 계십니다.

어느정도의 요구를 하실 수 있는 자리이리라 사료됩니다.

협상 자리에는 반드시 군을 대동하시길 바랍니다.

저들은 아주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 교육했으니 에반제인 대공과 동행하시면 유리하실 것입니다.

전쟁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쪽으로 결정하셔서 개전을 하셔도 좋고 철회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전쟁을 하겠다고 결정하셨을 경우에 한해서 부탁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테르도어 대성당과 정부청사 탑은 공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상응하는 것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에리아]

"짐의 체면을 이렇게 구기다니...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에리아..."

왕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편지를 구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제시한 상응하는 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친히 편지를 가져온 여인, 정확히는 킬레리에게 말했다.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들은 바가 없느냐?"

킬레리는 곱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수명에 관한 것이라 들었습니다. 무령이 필시 황제께서 궁금해 하시리라 했습니다.

그렇기에 혹 궁금해 하시거든 이것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킬레리는 품 안에서 종이를 하나 더 꺼내 넘겼다.

황제가 그것을 펼쳐보면 간단한 한문장이 쓰여있을 뿐이다.

[정부청사 탑과 테르도어 대성당으로 피신해 살아남은 인원의 수만큼

황제께 수명을 더해 드리지요.]

황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너는 이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그래.... 나가봐라."

킬레리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심히 불편했다.

이건 황제에게 전하는 도전장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수명을 원해 그들을 살린다면 에리아의 수에 넘어가 뜻을 굽히는 것이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고, 그렇다고 부탁을 무시하자니

수명은 너무나도 탐이 나는 것이었다. 모든걸 다 가진 제국의 황제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라면 수명 외에는 없었으니까.

"청을 거절했다가 에리아가 떠나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닌가...

그래, 짐이 살아있는 한 에리아는 무령으로 남아있겠다고 했으니

이는 국가적으로 손실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자존심... 후우....

이 치욕은 다른 곳에서 메울 필요가 있겠구나..."

킬레리는 황제의 반응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에리아의 말대로였다.

거부하려고 했다면 즉시 화를 내거나 자신을 죽였을 것이다.

본디 킬레리는 비서를 위해 만들어진 노예다. 왕성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에리아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에리아가 황제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녀의 목은 바닥에 굴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발로 그녀가 멀쩡히 살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황제의 표정이 구겨진 것은 에리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거나 혹은 위협적이라는 의미겠지.

"과연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킬레리는 에리아의 상담소로 돌아와

유리잔을 하나 깨끗히 씻어 닦았다.

접시를 하나 깔아두고 그 위로 미리 공수해온 참나무의 칩에 불을 붙여 태우고는

그 위로 유리잔을 덮었다. 유리잔 내부에 참나무가 타며 생긴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는 고급 위스키, '앨런 윈디 28년산'을 꺼내 그 옆에 올려두었다.

그 앞에 정갈하게 앉아서 시간을 확인하고 미소지었다.

'계획이 성공하면 적당히 책상 위에 축배나 한잔 올려줘. 가서 마시게.'

그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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