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23화 (123/303)

〈 123화 〉 노병

* * *

나는 감옥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감옥에 수감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닥에 자그맣게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미리타엔의 상담소로 피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수감된 다른 죄수들의 시선을 가릴 수 있도록 그 위에 더러운 이불을 올렸다.

내가 이동할 때는 언제나 이불을 크게 펼쳐 그걸로 창살 사이사이를 가려막았다.

마력을 통해 강화하면 이불이라도 충분히 차단막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상담소로 건너가 편지를 썼다.

황제에게 편지를 전해야 할 거라고.

게비디를 통해 함께 왕성으로 갈 수 있도록 킬레리를 유도했다.

그렇게 편지를 다 쓰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 무료함에 하품을 하다가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돌아간 후 올려진 위스키를 마시며 킬레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역시 킬레리라는 이름은 특별하지 않잖아?"

"콜로세움에서 일하는 구분된 비서노예입니다. 특별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킬레리와 비교해서 너를 특정할 수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름을 지어줄게."

"이름... 말입니까?"

"너 말 더듬는거 상당히 낯설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그냥 좋아서. 내가 감옥에서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네."

"발레리아 어때?"

"발레리아... 말입니까?"

"마음에 들어?"

"저는 지어주시는 이름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원래 이름이라는게 자의적으로 정하는건 잘 없는 거라고 들었으니까요."

"그럼 부르기에 괜찮은지, 어감은 마음에 드는지 같은 정도라도 이야기해봐."

"전.... 좋습니다. 이름... 마음에... 듭니다. 저... 만을 위한 이름..."

"다행이ㄴ...너...울어...?"

"아닙...ㄴ...니다..."

울먹거리는 눈에 그렁그렁 담긴 눈물을 보고 나는 말 대신 그녀를 안아주었다.

내 작은 품에 느끼기에도 그녀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그런줄 몰랐는데 말이다.

말 대신 그녀를 토닥여주고 앞으로는 발레리아라고 부르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조용히 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우리는 말 대신 술잔만 기울였다.

내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건 그 일이 있고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였다.

너무 오래 방을 비웠다가는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사실 그런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는건 아니다.

어차피 전쟁도 날 것 같은 상황에 까짓 불이익이 두렵지는 않았으니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자기들이 한 일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그렇게 아둔하게 반응할유레크로스가 아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내 앞으로 손님이 도착했다.

빈포드와 멀로이였다.

철책을 사이에 두고 만난 우리는 가볍게 눈인사로 안부를 대신했다.

"갇혀있는 사람 치고는 상당히 여유롭군?"

"철책이 있는 건 맞는데, 갇힌게 제가 맞을까요?

제 시야에서는 여러분이 갇히신 걸로 보이는데."

내 말에 긴장이 가득 섞인 침을 삼키는 빈포드가 한숨을 내뱉는다.

그 옆에서 멀로이가 한발 나서며 말했다.

"예상 외의 만남이군요. 이로서 제가 아는 에리아는 당신뿐이라는게 증명되었어요."

"어머, 안녕하세요 멀로이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하셨더군요."

"변한걸로 보이시나요?"

"네, 많이 얼굴이 밝아지셨군요. 자신감도 생긴 것 같고. 보기 좋습니다."

"갇혀있는데요? 헤헤..."

"농담도 할 줄 알게 되셨군요."

멀로이는 그렇게 웃으며 진심으로 날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에 근심이 사라졌다.

아까 막 감옥으로 찾아올 당시만 해도 긴장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는데,

이제는 좀 마음이 풀어진 모양이다. 나도 사실 이 둘을 적대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연유로 수감되신건지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오랜만에 뵙는데 그정도 이야기는 해 드릴 수 있죠."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올리브 살해혐의와 대장간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어요."

"두가지 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그래서, 실제로 하신 일이 있습니까?"

"올리브 살해요."

얼굴이 굳어지는 빈포드는 한숨을 푹 내쉰다.

"정말로 올리브를 죽인게 에리아 자네인가..."

"네, 목숨의 위협을 받았거든요. 떨쳐내지 않았다면 위험했을거에요."

"그럴리가... 후우... 하긴 올리브가 성급하고 말이 안통하는 남자긴 했지...

그럼 대장간 건에 대해서는 결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네. 대장간은 아마 다시 찾을 일도 없을거에요.

며칠 묵으면서 일처리 도와준게 전부라서.

이제 다시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올리브는 어쩌다가 위협을 받으신건지 알려주시면 제쪽에서도 힘을 좀 써보지요.

교국에서 납득할지는 모르겠지만 덮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멀로이!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빈포드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정상적인 발언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멀로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에리아씨를 알고 있네. 얼마 좋은 사람인지도 알고 있고, 아닌 척 하시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산속에 은거하시던 분이시네.

그런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사람을 죽이고 도주할리 없단 말이네.

그리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올리브의 소문은 자자한 편 아닌가?

죽은건 어쩔 수 없다지만 나는 적어도 그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은걸세."

"지금으로 부터 백년 정도 전에 마녀사냥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정확하게 따지면 백 육십 하고도 몇년 정도 더 되었겠네요."

"그때라면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종교서적이 하나 발견된 시기였죠.

저도 이제는 문헌으로만 접한 시기이기는 합니다만, 과거 유적에서 발견된 두꺼운 책.

그 책에 적힌 내용이었습니다. 불결한 자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말이 적혀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이형의 존재들을 사냥했던 시기가 있었다고요.

지금은 그것도 인종차별이라고 하면서 철폐되었지만요.

그 당시 죽은 엘프나 오크도 상당했습니다. 마녀라는 명목으로도 많이 죽었고요."

"저는 그 당시 사람들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나타난 사람이 저를 죽이려들었어요.

죽지 않는 마녀라고요. 문헌에서 찾아본 마녀 에리아가 저라는걸 눈치챈 모양이더군요.

다짜고짜 저에게 칼을 들이미는 남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많이 고생했고 팔도 잘렸었죠.

어떻게든 안카숲 한가운데 자란 아르간티아의 나무에 올리브를 박아두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희도 아는 부분이군요.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신다는건..."

"요즘 시대에서는 마녀사냥이 없는 모양이더라구요. 엘프에 오크도 본 마당에

더는 숨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선 그 점에 대해서 저도 조사를 개인적으로 더 해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교국으로 의뢰가 들어온 것이 원인으로, 죽지 않는 여자를 잡아달라는 의뢰에

올리브가 저를 잡으려고 한 거고, 아마 교국에서 마녀사냥은 폐지되었다고 할겁니다.

의뢰를 넣은건 젤렌지입니다. 젤렌지가 교국에서 쫒기는 지금 저에게 걸려있는 의뢰가

여전히 유효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너그러워지셨지만서도 여전히 날카로우시군요."

"나잇값은 하는거죠."

그 말에 빈포드가 멀로이를 살짝 밀어내고 내 앞에 섰다.

"이제 정말 본론을 꺼내보도록 하지요."

"왜 갑자기 대우가 달라졌죠?"

"연장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게 중요한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이번에 경솔한 나르딕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생긴건 아실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제국의 황제를 설득해달라?"

"그렇습니다."

"총리 전원을 모아서 협상테이블을 마련한다면 황제가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저는 범죄자 신분으로 갇힌거지 무령 신분으로 여기 들어온게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건 그정도네요."

"총리 전원이라..."

"전쟁보다는 싼 값이 아닐까요? 목숨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달라는 말은 아니지만 걸라는 의미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겠죠."

빈포드는 낮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그정도 각오는 하셔야죠? 그리고 멀로이씨."

멀로이는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내게 걸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성 테르도어 대성당과 정부청사 탑은 되도록 공격하지 않도록 부탁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이거 감사합니다. 정말 어디까지 내려다보신건지 놀라울 정도로군요."

"아뇨, 상식선에서 생각한 것뿐이에요."

"하긴, 상식에서 어긋난 한 놈만 아니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기는 합니다.

여러모로 고생을 끼쳐드리는군요. 교국이랑 대장간에서 알아서 할 일을 왜 굳이 나서서

유레크로스에서 벌이는 건지 저도 여러 모로 착잡하군요."

"고생이 많아요."

"하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풀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게 아니었다.

잠시의 안정감을 허가할 수 없다는 듯 위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이 씨발! 내가 누군줄 알고! 개새끼들아!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간수에게 붙들려 끌려오는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마 그건 나만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닌 모양인지

빈포드와 멀로이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카르고르?"

그 한마디에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빈포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카르고르 모빌세오는 마부의 간살과 존속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지위를 이용해 빠져나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구속했습니다."

"존속살해라고?! 나르딕이 죽었다는 말인가?"

간수는 거칠게 카르고르를 독방에 집어넣었다.

반항하는 그의 등을 발로 걷어차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카르고르를 버려두고

철책을 닫아잠근다.

"후우... 아닙니다. 죽은건 커리나 모빌세오, 총리부인이십니다."

"그럼 마부의 간살은 무슨 소리지?"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전일 오후에 서지스에서 엠페레스로 향하는 배편을 구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아마 서지스로 가는 마차를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마부를 간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아주 질척하게도 범했더군요. 저항한 흔적이 상당합니다."

"씨발 저항이라니! 그냥 싸운거라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고!"

"목격자가 있는데도 저런다니까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부를 처참하게 살해했답니다. 주변에 마약과 주사기가 널린 것으로 보아

환각 증세를 겪으며 우발적으로 모친을 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약이라고?"

멀로이가 그렇게 물으면 간수는 더럽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몰래 유레크로스를 떠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인은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전쟁을 피해 도망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커리나부인은 운전을 하지 못하고, 본인은 약물로 인해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어 마차를 불렀고,

마차를 탑승하고 나서 약물을 주사하다가 환각증세에 취해 모친을 살해,

이후 마부에게 발각당해 증거 인멸로 간살했다는게 유력합니다.

결정적으로 사망한 마부의 얼굴이 심히 짓뭉개져있습니다.

도무지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더군요.

제정신인 인간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야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부인께서 먼저 사망하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목이 먼저 떨어져 마차 주변에서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팔에서도 주사자국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약물은 부인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빈포드가 지친다는 듯 물었다.

"현장은?"

"동부 17번 구역 시장가 구역 38번 골목입니다."

"뭔가 이상한데?"

빈포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차가 거기까지 가 있었다는건가?"

"네, 그렇습니다."

"말은?"

"두 마리 다 죽어있었습니다. 목 뒤를 찢겨 죽어있었습니다.

아마 얼마동안은 살아있었을 거라고 합니다.

출혈사로 보인답니다."

"그럼 그 마차가 왜 거기 있는거지? 마부가 거기로 안내했다는건가?"

"그건 저희도 아직 모릅니다."

빈포드는 카르고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죽였나?"

"그 마부가 어머니를 죽였다니까! 칼을 가지고 말이야!"

"어떻게 죽이는지 봤겠지?"

"아...아니... 못 봤어..."

"못봤다?"

"그래..."

말은 끊어졌다.

빈포드는 간수에게 일단은 정식으로 다시 조사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만 남겼다.

아직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남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보시는거죠? 두분 다."

"그래야겠군요."

멀로이가 그렇게 대답하고 간수에게 묻는다.

"나르딕은 알고 있습니까?"

"아마 알 겁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그들은 감옥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고

나는 철창 너머로 반쯤 망연자실한 카르고르를 바라보았다.

애가 되바라지긴 했지만 그럴 용기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분명히 다른 배후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마침 거기에 짚히는 이가 있었다.

다만 걸리는게, 사람한테 발각될 정도로 허술하게 일처리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왠지 자꾸 턱턱 걸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엮인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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