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황제 플로라
* * *
아침에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 멀로이씨와 빈포드가 면회를 왔다.
이걸 과연 면회라고 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날 보러 지하까지 내려온다는건
뭔가 일이 생기기는 했다는 이야기겠지.
"좋은 아침이에요."
내 인사를 듣지 못한건지 둘 다 대답이 없었다.
"멀로이씨? 빈포드씨?"
그제서야 고개를 드는 두 사람의 얼굴은 마치 공포와 충격으로 범벅이 된 마냥
피로에 완전히 찌들어 있었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에 음푹 들어간 눈,
어색하게 창백한 얼굴과 불안한듯 잘근잘근 씹는 입술은 그야말로 어색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아... 에리아씨... 이거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회의를 다녀왔습니다만..."
"결렬됐나보네요."
"그...렇 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문제가 그게 아니라고요?"
"황제가 살해당했습니다."
"네?! 이 상황에서요? 대체 누가...! 협상을 하러 가서 황제를 죽여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저희 쪽에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미리타엔의 에반제인 대공입니다. 그 여자가 황제를 총으로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승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리타엔 내부의 사정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황제가 사망했습니다."
충격적이었다.
왜 이 사람들이 이런 표정으로 불안에 떨었는지 알 것 같다.
이런건 계획에 없었는데...
"그러면...! 그러면 가서 제 권리를 주장해주세요! 황제가 죽으면 저는 무령이 아니게 됩니다.
무령이 아니니까 제가 유레크로스에 잡혀있어도..!"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에반제인 대공... 아니 황제는
에리아님을 계속 무령으로 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에는 차질이 없으리라고..."
큰일이다. 플로라는 테르도어 대성당과 정부청사 탑을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멀로이는 한 치도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 여자는 상당한 영기술사더군요. 그 자리에 있던 백여명의 사람들을 구속하고
강제로 억압할 정도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이대로라면 패배할 겁니다."
"그렇겠죠. 마도병이 아니라면 막아내기도 어려울 겁니다."
마도병을 훈련시키던 와중에 내가 빠졌으니 어떻게든 내 대신 훈련교관으로 들어간
화이트라는 사람이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키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에게 일말의 기대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훈련에서 배제한 이들을 억지로 재투입한 것을 보면 이미 그정도 수준이라는 의미니까.
"그러면 문제는 그게 전부겠죠...?"
"불행히도 아닙니다... 현재 에리아님의 재판을 담당하기 위해 오고 계시던 교국의 심문관께서
엠페레스에서 퀘트로나스로 이어지는 해로를 통제당해 오고 계시지 못하시고,
대장간에서 오기로 했던 외교 담당 니더는 갑자기 늘어난 사막의 자이언트 토드떼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기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으십니다."
"진짜 큰일인데요..."
"만일 그들이 에리아님을 꺼내겠다고 이 감옥을 부수는 순간 이 흉악범들이 유레크로스로 탈출할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레크로스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겠죠.
게다가 저기 갇힌 저 카르고르를 빼내야 한다고 나르딕이 얼마 전부터 눈이 돌아갔습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버렸죠.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카르고르의 재판은 언제죠?"
"아직 수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대로 조사하기도 전에 전쟁이 나겠지만요."
"예상 개전 시간은 언제죠?"
"내일... 오후 3시입니다."
멀로이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착잡하기로는 나 역시 전혀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던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거래를 합시다."
"거래...?"
"유레크로스를 위해 싸우겠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일단은 미리타엔의 무령이니까요."
"그럼...?"
"테르도어 대성당, 그리고 정부청사 탑. 두가지는 확실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요구 조건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일이 해결된 후에 제 부탁을 언제라도 딱 한번만 들어주세요."
"....."
침묵이 이어졌다.
철책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멀로이! 진심인가!"
"나는 한명의 죄인이라고 해도 국가의 위기를 막을 수 있다면 기꺼이 손을 잡고 싶네.
빈포드.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았다고 하더라도, 수백, 수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잖은가."
"나도 모르겠네. 알아서 하게."
빈포드는 그렇게 말하고 착잡한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멀로이는 그런 빈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금방 이야기를 전하고 돌아오지요."
마침내 두명의 면회인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 나는 이불로 만든 두터운 벽에 의지해
다시 미리타엔의 상담소로 이동했다.
익숙하고 포근한 냄새가 난다. 적어도 내 가게에서만큼은 미리타엔의 어두운 모습은 보고싶지 않았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발레리아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아, 무령님. 오셨습니까?"
"이야기는 들었어. 플로라가 황제가 되었다고?"
"네. 여황으로서 계십니다."
"기어이 그렇게 되어버렸네. 분명 언제든 위로 올라갈 능력이 있는 아이였지만,
이런 방식을 기대한건 아니었는데."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왜, 알면 막으려고?"
"저는 노예입니다. 계급사회에서는 상명하복에 충실하고
더 높은 계급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너한테 말해줄 수 없는거야. 알겠지? 넌 아무것도 모르는거야."
"그ㄹ..."
"그럴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야 해. 넌 노예로 여기 있는게 아니니까.
친구잖아? 그냥 난 선생님으로서 말 안듣는 제자를 혼내주러 가는거야."
"그러도록...하겠습니다..."
"좋아. 알지? 다녀올게. 술 한 잔만 따라놓고 기다려주라."
"네."
발레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가게를 정리하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나 역시 인식저해의 주술을 걸고 밖으로 나섰다.
혹시 성장한 플로라가 내 마력을 눈치챌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플로라의 저택으로 먼저 향했으나 그곳은 사용인들이 청소를 하며
오지 않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제각각 오지 않은 주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그녀가 엄격한 사람인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이제는 황제가 되셨다지...?"
"그러니 어제부터 저택에 돌아오지 않으시는게지."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놀랍군."
"누가 아니라나. 기어이 대공에서 만족하지 못하셨다는 이야기 아닌가?"
"듣기로는 상당히 분노하셨다던 것 같더구만."
"그 분이 화를 내셨다고? 늘 싸늘하시기만 하던 분이신데...
어떤 미친놈이 그 차가운 분에게 불을 붙인거지?"
"그러게나 말이야. 어제 회의가 그만큼 형편없었다는 의미 아니겠어?"
"입조심해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는 안가는데 말이야."
"그 화가 전대 황제께 향했던 것이 아니겠나?"
"그럼 설마 정말 전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건가?"
"그럼 지금도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리가 없잖나.
당장 저택의 사용인 중에서도 몸 좀 쓴다는 젊은 놈들은 다 징집당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분께서 성급하게 일처리를 하실 분은 아니시지."
"그럼,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엄격하시지만 또 미워할 수는 없잖나."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느낌이지."
"이게 다 그 무령이 만든 결과라지?"
"그렇겠군. 아, 그 완벽하신 황제도 무령 이야기만 나오면 누그러져버리니 말이야."
"떠도는 이야기로는 무령이 유레크로스에 수감되어있다는 사실로 화가 났다고 하던데."
"설마 그런 일로 우리 황제께서 공사구별도 못하시고 전대 황제를 죽이실 만큼
성급하신 분은 아니시잖나?"
"하하하! 그건 그래!"
이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느꼈다.
이거구나. 내 잘못이구나.
머리가 멍하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곧장 황제가 있는 성으로 달렸다.
미리타엔 중앙의 황성 입구에는 이제 막 변한 황제를 시험하던 자들의 목이 걸려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즉위와는 상반되게 미리타엔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이전의 시스템을 이어가고 있었다.
플로라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정치와 외교를 알아서 능수능란하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데서는 안가르쳐 줘도 잘 하면서 꼭 이상한데서 사고를 쳐선..."
황제의 알현실로 가려다가 약속을 잡지 않았으니 알현실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녀를 찾기 시작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특유의 버건디 오오라가 흘러나오는 장소를 찾았다.
확실히 화가 잔뜩 난 건지 문밖으로도 잔뜩 따가운 오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도 그녀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한손으로 애니를 쓰다듬으면서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하아... 이 버러지같은 자식들... 일처리 하나도 제대로 해 둔게 없어...
노력한 흔적은 보이는데, 결국 결과가 하나같이 엉망이야."
그녀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나는 인식저해를 해제하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 그 자리에 앉으라고 말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흠칫 놀라는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체통같은건 까맣게 잊은건지 달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애니도 함께.
"무령님!!"
곧바로 달려와 나를 꼭 껴안은 그녀의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어딘가 고급스러운 장미향과 허브가 섞인듯한 냄새.
언제 그랬냐는듯 주변에 퍼져있던 오오라가 사그라든다.
"무령님이라니. 이젠 나보다 네가 더 높잖아?"
"그래도요! 갇혀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나오셨나요?"
"내가 어디가서 갇히기로는 도가 터서 말이야. 그런 감옥 빠져나오는건 일도 아냐.
그런데 가만히 앉아있을 성격도 아니고."
"역시 대단하세요..! 그런줄도 모르고 저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황제도 죽인거야?"
"네! 그 덜떨어진 놈이 무령님을 감금한 쓰레기들이랑 협상같은걸 하겠다잖아요?
당장 군사를 모아서 쳐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필요 이상으로 비음이 섞인 플로라의 눈은 어쩐지 묘하게 집착이 서린 것 같았다.
"진정해. 내가 너한테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몰랐겠지만, 난 죽지 않아."
"알아요."
"안다고?"
"회의때 들었으니까요. 생각보다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셨더라구요?"
"내가 좀 말썽쟁이라서."
"괜찮아요. 이제 미리타엔이 지켜드릴테니까요."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내 품에 얼굴을 비벼댄다.
자기가 나보다 키도 가슴도 훨씬 크면서 뭘 그렇게 비벼대는지 모르겠다.
사랑받는 기분은 좋은데,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서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알아?"
"아!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사랑스런 제자 혼내러 왔어."
"사랑스런...사랑... 헤헤... 네! 혼내주세요!"
"혼난다는데 왜 좋아하는거야?"
"보고싶었으니까요!"
"어째 황제가 되고 나서 더 풀린 느낌인데 플로라?"
"이제 남 눈치 안봐도 되니까요. 누가 저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걱정마세요. 남들 앞에서는 충분히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알았어... 혼내러 왔는데 화도 못내겠네 정말..."
"그런데,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요?"
"세가지 실수를 했지.
우선 첫 번째로, 내가 일부러 참석하라고 한 회의였는데 회의를 망쳤고,
둘째로, 황제를 너무 섣불리 죽여버려서 계획이 틀어졌어.
마지막으로는... 아니다, 이건 뭐 귀여운 제자니까 봐줄게."
"마지막은 뭔데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손등에 적힌 7을 찰싹 찰싹 때리면서 말했다.
"애니 누가 죽이래! 요게 요게! 잘 키우겠다고 해서 믿고 맡겼더니!
이럴거야 너?!"
"죄송해요...!"
이런 모습만 보면 완전히 내가 알던 플로라 자체인데.
"아무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네, 말씀하세요!"
"유레크로스 전쟁은 강행한다고 했지?"
"네. 화가 나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제국의 예산과 물량, 전력으로 봤을때 이번 전쟁으로 소모되는 자원과 물자보다
전리품으로 얻어낼 물자와 인력, 장기적으로 계약적인 측면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이 경우에 전년도 대비 28%의 국익 증진 효과가 있어요.
국제적인 명분도 세울 수 있고요."
"너... 조사 많이했구나?"
"네. 그래서 이제 국가적인 문화유산 몇가지는 남겨두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걸 남기느냐 마느냐를 고민중이었어요. 그래야 외교적으로 비난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화가 나서 다 밀어버릴까 생각은 했는데..."
"마침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거였어. 테르도어 대성당, 그리고 정부청사 건물은
공격하지 않고 온전히 남겨놓았으면 좋겠어. 물론 어디까지나 네 선ㅌ..."
"그럴게요!"
"어...?"
"아시잖아요? 전 무령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안해요.
원하시면 그 주변 50m로는 총알 하나 안튀도록 할게요.
그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도 않을 수 있어요."
"어... 그럼 그렇게 해줘..."
"네!"
"그래도 일단 오긴 왔으니까 식사나 같이 할래?"
"그러게요. 벌써 11시 40분이네요.
저도 여기서 먹는 첫 점심이에요. 기대되네요♥"
"플로라 너는 여전히 착한 아이라서 다행이야."
"당연하죠!"
"손바닥 대. 그래도 잘못했으니까 벌은 받아야지."
"히잉..."
나는 플로라의 손바닥을 5대 때렸다.
일부러 조금 수치스러우라고 때릴 때마다 '때찌 때찌' 라고 말했고
플로라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귀를 숨기지도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ㄴ..네... 잠시만요... 먼저...가세요....♥"
"어? 왜?"
"ㅁ...못한 일이 생각나서...."
"그래 그럼, 천천히 나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딸깍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나오고 생각해보니 식당의 위치를 몰라서 문 앞에서 앉아서 기다리려니
왠지 모르게 방 안에서는 플로라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억지로 입을 틀어막은 듯한 목소리. 우는 것 같았다. 혼난 정도로 울다니.
흑흑대는 소리와 물소리가 나는게 아직 여린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 너무했나? 그렇게 다 큰 아이한테 수치심을 주는게 아니었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