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강탈자
* * *
플로라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유레크로스에 잡혀있어야 할 내가 미리타엔에서 밥이나 한가로이 먹는 걸 보면
둘다 썩 좋지 못한 상황이 나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황궁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황제의 개인실로 올려보냈다.
말 그대로 진수성찬인 식사를 먹으면서 플로라를 보면 플로라는 정작 음식은 먹는둥 마는둥 하며
나를 바라보고 헤실헤실 웃고만 있다.
"배고픈거 아니었어?"
"먹고 있어요~"
먹고있다는데 뭐라고 하기도 뭐해서 그냥 수긍했다.
"내일 전쟁은 승률 몇퍼센트 정도 예상해?"
"내일 전쟁이라뇨?"
"전쟁 내일부터 아니었어?"
"그럴리가요. 유레크로스까지 가는 시간이 있는데요.
못해도 점심 먹고는 출발해야죠."
그제서야 깨달았다. 전쟁 시작이 오후 3시라는건 분명 밤을 새고서라도 3시에는 이미
유레크로스 목전까지 치고 올라온다는 이야기였구나.
멀로이가 그렇게 말했다는건 즉, 플로라 성격에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일으키리라고 생각한거고.
"내일부터 출발할까요?"
그렇게 물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량 학살의 주도권을 내게 넘기는 플로라에게
나는 대답 대신 도리질을 해 보였다.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잘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되고
내가 감옥으로 돌아가봐야겠다고 말하면 플로라는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봬요. 최대한 빨리 구해드릴게요!"
"그래."
"완전히 철두철미하게 부숴버릴게요!"
"너..."
"아, 물론 지시하신 성당이랑 탑은 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상담소로 돌아왔다.
발레리아는 나를 맞이하며 책상에 앉아있었다.
"돌아오실때를 예상해서 술을 준비해두었는데, 너무 일찍 준비한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레리아가 준비해준 술을 대번에 목으로 넘겼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목에서부터 천천히 배로 넘어간다. 가슴팍이 화끈거린다.
남은 술은 적당히 챙겨두었다. 나중에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까.
"이정도가 딱 맞아."
"다행입니다."
"게비디는?"
"사병을 대거 동원하여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제국군과 별개의 루트로 유레크로스에 잠입하여 수뇌부를 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로서는 킬레리 군단이 선투입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두번 두드려준 후에 말했다.
"명령이야. 절대로 상담소를 떠나지마."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황제께서 바뀌시고 나서 전쟁을 준비한 이후로
손님이 확 줄어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 나 돌아올 곳은 남겨 두어야지."
발레리아의 미소를 보고 나는 유레크로스의 어둡고 축축한 감옥으로 돌아갔다.
감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이불로 만들어둔 벽이 강제로 뜯겨져있고, 내 감옥 안에 남자가 셋 앉아있었다.
"누구...?"
내가 그런 질문을 하자마자 뒤에서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충격에 앞으로 엎어지며 축축한 바닥에 쓰러졌다.
"아으..."
내가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화가 잔뜩 난 것같은 나르딕이 있었다.
"이 마녀가...! 유레크로스를 농락하고...! 날 우롱해!!"
그의 손에 들린 강철 막대에 피가 묻은것이 분명 저걸로 나를 후려쳤을 것이다.
뒤통수가 찐득하고 뜨거운 것으로 보아 분명 머리에 피가 묻었겠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세명의 남자가 말했다.
"과연, 마녀는 마녀다 이건가. 이렇게 가둬 놓았으니 얌전히 갇혀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술을 부려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어떤 적과 내통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니... 두렵군."
"그렇습니다. 유레크로스 역사상 이런 범죄자도 또 없었지요."
"빨리 사형을 했어야 했습니다."
나르딕은 나를 철봉으로 구타하며 말했다.
"어딜 나갔다 온 것이냐! 말해라! 사악한 악마년!"
"유레크로스의 위협을 사주하고 다닌 것이겠지!"
내게 변명의 기회는 없었다. 임의로 탈옥을 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미 나르딕은 나에게 너무 많은 화를 담아두고 있었다.
내 몸에 멍이 들고 바닥에 피가 흩뿌려지도록 그는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걸 확신하고 나서야 그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후우... 씨발년... 사람을 좆같게 하고 말이야..."
"여긴....어떠...케... 들어왔죠...?"
나로서는 겨우 짜낸 말이었다.
분명 간수도 있었을테고, 감옥의 열쇠도 있어야 이 문을 열수 있었을텐데.
"하하하...! 병신같은년. 어떻게 들어왔는지가 중요하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다시 힘없이 바닥에 쳐박히는 시야 사이로 보았다.
감옥 복도에 쓰러져 죽어있는 남자를.
분명하다. 전쟁을 막지 못한 나르딕이 혼란을 틈타 추종자들을 데리고 감옥에 쳐들어온 것이다.
방해하는 자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억지로 점거한 감옥에서
나를 고문하고 제 아들을 빼갈 아량이다.
"씨발...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사람을 아주 물로 보고 말이야...!"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몸에서 기력이 다 빠지고 나서 진이 빠진 나는 겨우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몽둥이로 맞아 입술이 찢어지고 살이 터지고, 피를 주륵주륵 흘리면서도
스스로를 치유하지 않았다. 여기서 스스로 치유했다가는 더 맞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또한 치유를 한다고 해도 나르딕과 그 종자들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르딕은 나름의 각오를 하고 나를 죽이러 온 것이다.
미리타엔처럼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하감옥으로와서 나를 죽일 기세로 구타한다는건, 분명 뒷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후우...이 씨발년... 이년을 들어야겠습니다. 같이 인질로 데려가시지요."
"그러지요."
나르딕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이건 나르딕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나르딕과 같거나 혹은 그 이상이어야 하는 존재.
유레크로스의 총리들이었다.
무려 넷이나 되는 총리가 고의적으로 나를 인질로 삼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들의 손에 들렸다.
사냥당한 멧돼지처럼 사지를 한쪽씩 들려 맥없이 끌려가는 것은
내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언제 풀려난 것인지 내 뒤로 따라걷는 카르고르는 나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역시 저 이 여자를 갖고 싶습니다."
"이전같았다면 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지금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나서 그들이 감옥 문을 나설때 나는 보았다.
간수를 포함해 그들이 감옥으로 침입할때 막아섰을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시체를.
바닥에 제멋대로 널브러진 이들과 겨우 숨이 붙어 허덕이는 이들이 제각각 손에 든 무기는 기껏해야 칼이었다.
한 합도 겨뤄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몸에는 여러발의 총탄자국만 남아있었다.
분명 나르딕과 그 패거리의 총에 맞아 쓰러졌겠지. 군사력이 부족한 국가의 맹점이었다.
내가 그들의 손에 붙들려 겨우 해를 마주하면, 그제서야 일행이 멈춰섰다.
"기어이 사고를 치셨군 나르딕."
"여기까지 막아서기 위해 올 줄은 몰랐다 해백."
"그게 네 부족한 대가리의 한계겠지."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훈련대장의 부관이었던 남자의 목소리다.
나를 들고있던 손이 하나 떨어져 나간다.
내 왼팔이 바닥에 거칠게 떨어지고, 달궈진 바닥에 닿아 열기가 올라온다.
내 앞을 가리던 그림자가 사라져 느껴지는 햇빛이 따뜻했다.
피가 말라붙은 것처럼 어딘가 답답한 감각이 느껴진다.
"기어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때려서 끌고가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전쟁을 막을 열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열쇠를 망가뜨린건 너다 나르딕."
"보자보자 하니까 귀족에 대한 경의가 없군."
"경의? 경의라고 했나? 법을 어기고 감옥에 침입해서 죄수를 무단으로 석방하고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은 채로 구타해 끌고나온 시점에서 너는 범법자다!
이제와서 귀족으로서의 대우를 바라는건 염치가 없지 않나?
국가 전복의 위기를 만들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다니."
"그래서 내게 칼을 휘두르겠다 이건가?"
"....."
대치상태가 잠시 이어졌다.
긴장감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뒤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완전히 뭉개놨네. 하 이거 완전히 폭력배들이잖아?"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제임스가 서 있었다.
마침 혼자 어딜 가고 있던 길이었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총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쿠, 총리님들이신 것 같은데, 이런 대낮부터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당연히 성당이겠죠? 그렇죠 나릿님들? 성당이 아니고서야 그 사람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래서는 안되니까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문제 없으시지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빛과 말투는 분명히 나를 그렇게 만든 범인이 총리들임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동에 변화가 없자 제임스는 더 가까이 와서 말했다.
"이제보니 유레크로스와 미리타엔의 전쟁을 촉발하신 나르딕 총리님 아니십니까?
이거 재밌네요. 나르딕 총리님께서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과연 어디를 가시려고 하실까!
엊그제 간살죄로 감옥에 들어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드님도 함께 대동하시고요!"
"닥쳐라! 확정되지 않았다!"
"그렇죠 뭐, 확정되지는 않으셨겠죠. 근데 그건 거기 붙들린 여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사방에서 지나다니던 시민들의 시선이 모인다.
총리직을 맡은 이상 이들에게 주민들의 시선은 치명적이다.
사건이 부정적일수록 그건 더 강한 효과를 보이기 마련이다.
"크으윽..."
총리들은 제각기 표정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자네 교회에서 나왔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데려가게. 우린 나르딕 의원이 교회로 데려가겠다는걸 도왔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들은 나를 제임스의 앞으로 집어던졌다.
나는 맨바닥에 굴러 떨어져 겨우 멈춰섰다.
"아으으..."
"에휴, 알아서 잘 할 줄 알았더니 얻어맞기나 하고. 잘하는 짓이네.
교회로 가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 마차를 잡아 나를 태우고 교회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뒤에서 나르딕의 고함섞인 욕지거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으... 모르겠네요..."
"그러시겠지. 일단 너도 수감되어있기는 했었으니까 외부에 발각되면 안되는 입장아냐?"
"그럴걸."
"말 잘하네. 왜 아까는 가만히 앓고만 있었어?"
"거기서 말해서 득될게 없으니까."
"유레크로스는 전쟁을 목전에 두고있어. 치료가 되는대로 여길 떠나."
"그럴순 없지."
"왜, 네가 무령이라서?"
"알면서 말한거야?"
"그냥 넌지시 던져본거지 뭐."
"교회에서 하루 푹 쉬고나면 교회정도는 지켜줄게."
"하루 푹 쉴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교회가 만원이야."
"만원이라고?"
"어제부터 이 도시 사람들 전부가 교회로 몰려들었어.
수용할 공간은 충분하지만, 교회 내부의 시스템 자체가 정지된 상황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못해. 아직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구호소가 되어버렸다니까."
"알만도 하네."
"그래, 일단 좀 자. 교회에 도착하면 성수에라도 담가줄테니까."
"필요 없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스스로 억제하던 치유효과를 해방했다.
얻어맞은 곳에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피딱지가 말라붙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깨끗해진 몸을 툭툭 털어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일단 성수 받아줄테니까 들어가있어."
"왜?"
"씻기는 해야할 것 아냐."
"하... 그러네."
나는 그를 따라 교회로 들어갔다.
이미 사람으로 북적이는 교회의 사제실에서
나는 욕조에 성수를 붓고있는 제임스를 말리고
남은 공간은 맹물로 채워넣은 후에 커튼을 치며 말했다.
"씻을테니까 잠깐 혼자 있게 해줘."
"그래. 천천히 하고 나와. 성수값은 안받을게."
"생색은. 나중에 돈 꺼내 줄게."
"그럴 필요 없다니까. 하하.."
"주면 받지?"
"물론이지."
나는 몸을 씻고 나서 인식저해 주술을 걸고 이전에 묵던 숙소에서 가방을 챙겨 나왔다.
다행히도 숙소에서는 내가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가져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내 짐을 따로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짐을 챙겨서 교회로 돌아오면서 바라본 테르도어 대성당은 유난히 컸다.
이걸 정말 피해 없이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걱정끝에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평화로운 오후 1시 18분.
평화에 종말을 고하는 포화소리가 유레크로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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