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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28화 (128/303)

〈 128화 〉 겁쟁이들의 전쟁

* * *

유레크로스의 성벽이 부서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유레크로스 초입에서 들어오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여성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한 손에 든 맥주잔을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계획보다 많이 늦어진 걸로 봐서는 저쪽도 피라미 만큼은 저항하는 모양인데,

그 피라미를 잡아 죽여야겠지. 준비한대로 진행해. 묻지 말고.

다 가르쳐 줬을텐데?"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왜 북동쪽 길을 통제하신 겁니까?"

"글쎄, 혹시 모르지. 절반은 여기 남는다. 남은 절반은 나와 가지."

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발을 살짝 넘기며 그녀가 웃어보였다.

"내 옷을 가져와라."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붉은 갑옷을 가져다주면

그녀는 그 갑옷을 받아들어 입기 시작했다.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지만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다.

플레이트 아머는 머리와 다리는 덮지 않는다.

철갑으로 만들어진 속옷과 허벅지만 살짝 덮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리는 덮지 않는 갑옷 대신 매끄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피부에 딱 붙어있다.

에리아가 미리타엔에 남기고 간 라텍스 소재다.

"가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전선을 이끌고 천천히 유레크로스를 포위해나갔다.

손에 들린 것은 검 대신 독특한 형태의 장창이었다.

십자창이지만 어딘가 유연하게 휘어지는 형태로 되어있는 것이

상당히 이상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특수처리가 된 것처럼 창 끝이

매서운 붉은색으로 빛났다. 그녀가 바로 제국의 대공,

전장에서 날아다니는 붉은 요정, 엔시온 플라이트였다.

나이가 서른 둘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는 물이 올라있었다.

성숙한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요염한 색기로 인해 구혼자도 많았으나

그들 모두를 정정당당히 결투로 죽여버린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다 지쳐 결국 언젠가 콜로세움에 직접 출전해 우승한 후,

앞으로 구혼은 콜로세움 우승자에 한해서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우승자의 고백도 가차없이 쳐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십자창은 그 당시에 우승 소원으로 받은 제국의 아티팩트였다.

몸에 잔근육이 매끄러웠고, 그녀의 복근은 아름다운 건강미를 뽐냈다.

매끄러운 허벅지와 나이를 잊게하는 탄력적인 피부는 매력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작전에서 선봉을 맡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새로 대공으로 위임된 하프오크가 무조건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소릴 하고

멋대로 왕성으로 진입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개인적인 목적이 더 강해보이는 남자였기에

선봉을 뺏긴 것에 아쉬움도 있었으나 결국 전략을 세우는 일 역시 중요하므로

적당히 수긍하고 후방을 맡았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작전의 계획과 총괄이었다.

그리고 유레크로스에 넘어와서는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성벽이 함락된 이후에는

유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플로라는 성벽이 부서지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보지 않았고

그 예상대로 성벽은 고작 전쟁 시작 5시간만에 부서졌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그녀가 성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지는 왕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골목골목 사이를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다량의 폭약을 사용해 건물과 거리를 폐허로 만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선 앞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정부청사 탑 건물이 있었다.

"대공님, 황제께서 이곳은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안다. 우리는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 누구도 이 건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이 건물에서 누가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절대 공격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공격받지 않고 이곳에서

각지로 전술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지.

장수는 전장에서 싸워야 한다지만, 전술가는 다르거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부청사 탑 입구에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다만 머뭇거리는 인원이 나타났다.

"걱정 마라! 거기 얌전히 들어 있겠다면 쏘지 않는다."

이미 엔시온의 좌우로 펼쳐진 군대는 총을 겨누고 대치중이었다.

"안전함을 보장받는 이들이 굳이 무기를 들고 우리를 자극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무기가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들의 발을 묶는다.

또한, 이제부터 우리가 주시해야 할 곳은 이곳으로 향하는 자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간이 의자를 두고 그 위에 앉았고

병사들을 대동한 채로 탑 안으로 질문을 던졌다.

"멀로이는 거기 있겠지?"

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멀로이 본인이 1층으로 내려와 모습을 비추었다.

"엔시온..."

"그대도 알텐데? 승기가 없다는 정도는."

"알다마다. 명분도 승기도 없는 개죽음이지.

어쩌겠나? 잘못된 자를 우군으로 앉혔으니 감당할 몫이잖은가."

"지금이라면 너는 도망치게 해 주마. 선택해라."

"거절한다. 이미 너희가 이 탑을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 늙은 것은 아니구나."

"네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까지만 해도 이렇게 까칠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같잖은 도발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이쪽에서도 상응하는 도발을 돌려주지 않으면 아쉽겠지.

빈포드는 이미 죽었다. 너희들이 원하던대로 '명예롭게' 죽었다더군.

몸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발악하던 모습이 꽤 볼만했다던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건 아쉽게 생각한다."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 틀어박힌건 아니다."

"내가 그 정도도 예상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보디르는 이미 매수해 발을 돌려 두었다. 장사치는 간단하지.

돈을 따르거든. 아쉽게 됐다. 병력은 모르더라도 용살추를 그렇게 들고왔으니.

까딱하면 반응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거든."

"어느정도는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럼 이것도 예상했나? 보디르가 그 돈을 들고 교국으로 돌아가

교국을 상대로 테르도어 대성당을 명분으로 삼아 지원군을 요청하고

해방전쟁을 주도하려고 하던것. 내가 막았거든."

"완전히 졌구만..."

"그러게 학계에서 발을 빼면 안됐지. 이 바닥은 발 넓은 놈이 이기는거 아니었나?

아무리 내가 물로 보였다지만, 너무 막나갔지. 너는 말이야.

늘 그런 식으로밖에 계획하지 않으니 지는거다. 누누이 말했을텐데."

"하나의 계획에 대비책을 여러개 만드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다른 계획을 복합적으로 만들어두는 것도 좋다...였었지 아마."

"그래."

"그래서 나도 노력을 했다네."

"뭐?"

"네 말대로 새로운 계획을 짜봤다는 이야기지."

그제서야 표정이 창백해지는 엔시온이 말했다.

"무슨...!"

"빈집털이라고 들어는 봤나?"

그 순간 엔시온은 등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빈집이라고 하면 자신이 알기로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초반에 제국에서 군대를 모아 넘어올때,

근처에서 대기중이던 별동대가 없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 쳐들어간 별동대가 미리타엔에 도달한다면 막아낼 자가 있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게비디, 플로라, 엔시온, 데레코즈 모두가 출정을 나온 시점에서

만일 정상적인 장수가 있다면, 어쩌면 암살자가 있다고 한다면

전쟁 종료 후에 언제 빈틈을 보이고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리가 없다."

"그래. 그렇겠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우리 까마귀가 아무 대책 없이 매수당해

교국으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리라고 생각지는 못했지만,

그 배에 우리 군을 태우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모르는가?"

분명 교국으로 가는 길목을 원천 차단하기야 했으나 직접 배를 침몰시킨 것도 아니며

보디르를 사살하지도 않았었다. 그 배를 의도적으로 제국에 묶어두었다는 것만 떠올랐다.

배를 묶고 사람을 시켜 보디르와 그 수하를 감시하라고 했었지만,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모두를 통제하지는 않았었다.

국외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하도록 육로, 해로를 모두 통제하기야 했지만

그것도 제국 내부에서의 출국을 방지한 것이지, 작정하고 들어온다면야

문제가 될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나갈 생각이 없는 이들이 섞여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정말 침입을 허용했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실책이기 때문에

어떤 처벌이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원 여기서 대기해라! 한발짝이라도 저 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바로 사살해!

탑으로 접근하는 자도 모두 사살해라!"

그렇게 말하고 엔시온은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것이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너는 누구냐?"

"유레크로스 기사단 보병대 부관 류해백이다."

"아, 그 버림받은 아이구나?"

"버림받지 않았다."

엔시온은 창을 돌리다가 빠르게 전방으로 휘둘렀다.

매끄럽게 휘두른 창은 날카로운 검에 막혔다.

"빈포드의 갑옷이구나. 실력에 맞지 않는 과분한 갑옷이다."

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성기의 빈포드는 그 자체로 유레크로스의 방어벽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그걸 알고 있기에 침묵으로 답한 것이다.

어쩌면 빈포드가 건재했다면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며

해백은 검을 뽑아들고 달렸다. 눈 앞에 보이는 저 건방진 여자의 콧대를 꺾고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창을 휘둘러 그 움직임을 저지해버렸다.

단순한 십자창이라고 생각했는데 무기를 바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언월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기는 그저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인지

그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았다.

"나와라. 살려주지."

자신을 완전히 얕보는 말이었음에도 해백은 대답은 커녕 움직이지도 못했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인지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정도였다.

해백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렇게 주제를 알고 물러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말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갑옷을 입고 물러난다는건 빈포드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다.

갑옷도 있고, 검도 있는데 싸우지 않고 꼬리를 내리는 것은 명예롭게 죽은 그의 아버지와 상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맘에는 든다만, 후회하지 않겠느냐?"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해백을 보고 엔시온은 창을 빙 돌린다.

한바퀴 돌렸을 뿐인데 창끌은 원통형모양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끝은 해백을 향해 있었다.

"빵."

그 말과 동시에 해백에게 날카로운 작살이 꽂힌다.

빈포드의 갑옷임에도 불구하고 다 흘려내지 못하고 박힌 작살은

갑옷을 찌그러뜨리고 바닥에 떨어진다. 무거운 철의 소리가 난다.

겉보기에도 단순히 만든 것이 아니라 주문제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다 흘려낼 수 있는 갑옷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히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걸 버티다니 과연 폼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아니구나."

해백은 바닥에 떨어진 작살을 집어들었다.

압축된 폭약을 터트려 발사하는 형식으로 된 작살은

꽂히면 피부를 찢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확실히 작살을 맞은 복부가 아까부터 지끈거리며 아파왔기에

해백은 움직임이 크게 둔해져 있었다.

오른쪽으로 허리를 돌리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그냥 주워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무거워 움직이기가 불편한 무게였는데도

그런걸 자유롭게 휘두르는 상대가 대단해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어떻게 보더라도 그런 근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는데.

"무슨..."

작살을 집어든 해백이 다시 그녀를 돌아보면 어느새 바뀐 무기를 들고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한번도 손에서 놓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처음의 십자창이 되어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아까 휘두른 것보다 더 날렵해진 창의 속도를

지금의 해백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여자라고 방심한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합을 맞출 수 있다는 자체에

상당히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해백이었지만, 이 순간 모든 것이 자만이며 착각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랬기에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검을 뽑아 맞받아쳤다.

"나는 겁쟁이라서 말이다. 전열에는 서지 않는다.

최강의 적은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무기로는 안심할 수 없다.

방어구도 무기도 최강이어야 하고, 비장의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하지."

그녀는 창의 궤도를 꺾어 반대로 해백의 목을 걸어당겼다.

막아냈다고 생각했던 무기는 엄청난 유연성으로 휘어졌고,

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저렇게 유연한 무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해백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느낌. 맨바닥이 점점 시야에 가까워졌을때

해백은 검을 다시 앞으로 쳐올린다.

막힌 창이 뒤로 잡아당겨진다. 조금은 흥미로운 표정을 한 엔시온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창을 막아냈다고 생각한 해백의 방심한 틈을 본 건지

그녀의 발길질이 머리 위에 내다 꽂히고, 해백은 그대로 바닥에 쳐박힌다.

"빈포드도 이렇게 바닥에 쳐박힌 적이 있었던가?

난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그 갑주는 주인을 잘못 찾은 모양이군.

아니면 늙은 개라더니 기어이 노안으로 안목이 흐려졌나?"

"아버지를 욕보이지 마라...!"

"같잖은 도발에 발끈할 기력이 있다면 더 강해졌어야지.

그게 아니라면 눈 앞의 상대와 기량차이를 파악할 눈을 길렀어야 했다.

여자라서? 그게 아니라면 전장에서 본 기억이 없어서? 혹은 실력에 자만해서?

너같이 약한 병사는 전사로서의 싸움이 아니라 겁쟁이로서의 싸움을 배웠어야 했다.

지는 싸움은 하지 말아야 했다. 멍청한 새끼."

머리를 짓밟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억지로 옆으로 구르는 해백이 검을 주워들고 그녀에게 뻗어보지만

이미 그곳에는 그녀가 없었다.

동시에 복부를 짓밟는 엔시온이 말을 이었다.

"창의 길이만 보고 근접전이 약하다고 판단했나?

그 창의 길이로 거리를 잰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창을 짧게 잡는다는 선택지도 생겨날 수 있다.

너에게 무기는 창과 검뿐인가보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창의 형태를 바꿔 작살을 발포했던 봉으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지만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졌고, 해백은 짙은 피를 흘려야 했다.

배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일어서보려고 하지만 동시에 창이 가슴을 내리찍으며

그를 억지로 땅에 쓰러뜨린다. 창 끌이 있었다면 분명히 크게 찍혔을 공격이다.

일어서기도 전에 쳐박힌 창에 그대로 쓰러진 해백의 목을 붙잡고 그녀가 말했다.

해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말했듯 나는 겁쟁이다. 그리고 겁쟁이라서, 후환을 남기는게 싫어서 말이지."

그 투구를 벗기고 꺼낸 권총을 들이미는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소리 대신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아들까지 죽여버리면 내 체면이 서질 않아서 말이지."

손을 걷어차여 권총은 불발하고, 손에서 놓친 권총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조니가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조니가 이끌고 돌아온 병사들이 서 있었다.

분명히 제국의 군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이들은 그 자리에서 엔시온을 막고 서 있었다.

"이런... 버러지들이..."

엔시온이 이를 갈면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상당히 겁쟁이라서 말이지, 내 계획이 어긋날 걸 대비해서

순차적으로 계획을 세워두지.

빈집털이를 시작으로 해서, 뛰어난 장수, 그 뒤에는 숨겨둔 병사.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뭐가 있을 것 같나?"

멀로이가 여유롭게 웃는 모습을 보고 엔시온은 이를 갈았다.

어느새 나타난 병사들과 제국의 군대가 맞붙고 그 혼란을 틈타 조니는 해백을 데리고 사라졌다.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엔시온은 곧바로 별동대를 꾸려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뒤를 쫒는 자는 없었다.

전장을 이탈한 엔시온이 해로를 따라 제국으로 돌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8시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에 도착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과

미리 플로라가 대기시켜둔 사병이 있었다.

"어..."

"그 뒤에 있다던게... 이런거였나..."

엔시온은 허탈함에 실소를 터뜨렸다.

"최고로 겁쟁이다운 전략이군."

이미 전장을 이탈한 엔시온이 다시 유레크로스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상황은 종료된 이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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