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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33화 (133/303)

〈 133화 〉 엘프의 구슬

* * *

익숙한 공간. 내가 발을 디딘 그 산맥은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그 곳이었다.

수십번에서 수백번, 어쩌면 수천번까지도 지났을 길은 잠시 떠나왔다고 잊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발 닿는 길목마다 익숙한 흙 냄새가 났다. 밟히는 돌들이 자그락 소리를 냈다.

내가 겨우 내 옛 집터에 도착했을때, 내가 태웠던 집의 잔재가 바닥에 남아있는 것이

어쩐지 내게 이제는 돌아와선 안된다고, 빨리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올 곳을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참, 떠날때는 간단했는데, 돌아오니까 발을 이렇게 묶네."

지금 보면 너무나 작은 공간이다. 방도 좁았고,

연구실 벽면에 놓인 좁은 공간에서 쭈그려 자기가 일상이었다.

지금의 생활과 비교해서 좋은게 하나 없는데 왜 그리운지 모르겠다.

그때는 그랬지. 내가 마녀라는 사실에 급급해 밖에 나갈 생각도 못했지.

문득 그렇게 돌아보면 세상도 많이 바뀌어 있었고, 나만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마법이 일상이었던 오래 전의 세계에서부터, 마법이 사라지고 소마법이 영기술이라는 용어로 불리며

마법사가 엔터테인먼트로 각광받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세계에서도 마녀로 불리는 나.

문득 든 생각이 머릿속을 지난다.

"마녀란 뭘까."

마법을 사용하는 여자? 아니다. 그랬다가는 마도병이나 플로라를 비롯한 모두가 부정한 자가 될테니까.

그럼 마법을 사용해서 비 윤리적인 일을 한 사람? 하지만 그랬더라면 내가 마녀로 몰릴 이유가 없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나름의 답이 떠올랐다.

"마녀는, 같이 어우러져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여자구나..."

마녀를 구분짓는 기준은 혐오감이었을것이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으니까, 불길함이 분명 있었겠지.

결국 자신들과 다르다고 여겨졌을 때 마녀로서 낙인이 찍힌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나는 다시 발을 옮겼다.

"그래, 이제와서 뭘..."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는 마녀가 아닌 평범한 친구로 있을 수 있다.

시시한 일들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걸 신경쓰기에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카스트로 넘어가는 것은 의미가 컸다.

인간의 시각에서가 아닌 엘프의 시각에서 나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비록 아무리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들,

내가 아는 엘프는 썩어도 준치라고 불릴 만한 종족이었다.

산을 넘는 일이 간단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오래 걸렸다.

마침내 산 너머의 땅이 담홍빛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것을 마주하고 나서야

내가 아라카스트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아라카스트의 국경지역에 멈춰서서 가만히 내부를 바라보고 있으면

상당히 미형의 남자가 걸어왔다.

"멈추십시오. 여기는 하이엘프의 땅, 아라카스트입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통행목적으로 왔습니다. 엠페레스로 가고 싶어요."

"엠페레스로 가시려면 서지스의 항구에서 배를 타는게 더 빠르실 겁니다.

이 뒤로 지나가봐야 국립공원이 있어서 여성 분 혼자 지나가시는건 쉽지 않습니다.

돌아가시죠."

"서지스에서 현재 도시를 통제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흠흠... 뭐,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엘프는 장발을 찰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가방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같더니 자신의 주머니를 살짝 벌려보인다.

뇌물을 바라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통행수단이 생겼다는 것에 마지못해 가방을 열었다.

"이거면 되나요?"

내가 그에게 50페킷을 건네면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장난하십니까? 저희는 이런 뇌물로 국경을 쉽사리 열만큼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주머니는 열어둔 채로 형식적인 화를 내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델 지페를 5장 꺼냈다.

"가방이 무거워서 들고다니기 어려울 것 같은데, 쓰레기통이 안보이네요.

대신 버려주시겠어요?"

"하...! 이거 참 어쩔 수 없군요... 쓰레기통은 초소에 있으니, 저는 버리러 다녀오지요.

그동안 빨리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라졌다.

확실히 엘프라는 녀석들이 이렇게 부패한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아라카스트는 엘프의 구역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엘프들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고작 산맥을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인간은 찾아볼수도 없었다.

물론 이 구역도 바로 지나가야 할 장소이겠지만,

나는 이 국가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엘프의 국가는 분명 자연을 중시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던 고지식한 곳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내게 아라카스트는 관광명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거리는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분홍빛 대지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은 그대로인데, 하나같이 낯선 광경이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엘프들은 이상한 이동수단을 타고 있었고,

그 위에 가만히 앉아서 독특한 시계를 하나씩 손목에 차고 있었다.

분명 엘프의 수명은 긴 편이니 나를 아는 사람도 어딘가에 한명 정도 있지 않을까.

비록 마주친 적은 없더라도 마녀 에리아의 이름은 생각보다 유명했으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거리를 걸었으나 예상외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상 밖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최근 미리타엔과 유레크로스간 전쟁을 안다면

내 이름을 들어봤을텐데...

의아함에 나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저기요?"

"스으읍... 후우우.... 스으읍... 후우우...."

"저기요?"

"푸르르르..."

왠지 이상하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흐리멍텅하게 초점을 잃고 질질 침을 흘리는 모습은 마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입가에서 옅은 은은한 향을 맡았다.

"페마르...?"

백주대로에 페마르에 취해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제재하지 않는다니.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건 그때부터였다.

거리 전역에 옅은 푸른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나라가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눈치챘구나."

뒤를 돌아보려고 하면 목에 서늘한 것이 닿는다.

"멈춰. 그대로 앞으로 가. 이쪽을 돌아보려고 하지 마라.

어떻게 아라카스트로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라카스트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을 그냥 보낼수는 없다."

불안했다. 미리타엔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별다른 수가 없어서 앞으로 걸으면 어느새 등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나를 납치하려고 하는 수작이다.

빠르게 앞으로 도망쳤다. 거리를 벌리고 뒤를 돌아보면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엘프의 무리가 나타났다. 아마 페마르 연기를 마시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이

두꺼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그제서야 목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완벽히 빠져나온게 아닌 모양이었다.

손을 가져가 목을 쓸어보면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어차피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너희, 뭐하는 아이들이야?"

내가 그렇게 되묻자 그제서야 엘프 하나가 멈칫 거리를 벌리며

손에 들고있던 포대자루를 다시 잡는다.

"저거... 에리아다..."

"에리아...?"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날 알아?"

그 순간이었다. 팽팽하던 분위기가 얼어붙고 상대에게서 분명한 적의가 느껴진다.

그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엘프이니만큼 활을 꺼내리라고 예상했는데

확실히 시대가 변하기는 변한 것인지, 요즘에는 어딜 가나 권총을 들고 다니는 것 같다.

"엘프 매매범 주제에 여길 다시 기어들어와?!"

그렇게 말하고 쏘아대는 총알은 내 다리에 정확히 맞았다.

탕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다리에 전해지는 통각에 나도 뭔가 오해를 사고 있음을 알았다.

"좋아, 이쪽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이거지?"

"닥쳐라!"

상대는 엘프 셋이다. 하나같이 적의가 있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달려드는 상대를 공격해야 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의 도전에 응하기로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공격한건 엘프들이니까.

"숲을 버리고, 자연도 버리고 이제와서 마법도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이렇게 생명으로 가득한 땅에서 나를 적으로 몰겠다고?"

마력을 모아 땅으로 흘려보냈다.

아라카스트의 담홍색 토양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하고,

진흙의 자동인형이 솟아올랐다.

아라카스트의 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질 좋은 토양이다.

선대 엘프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땅으로 돌아가면서 그 세월과 마력을

다시 대지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더는 마력을 돌려보낼 수 없다고 해도

대지의 마력을 뽑아쓰는 이가 없다보니 땅에 과할 정도로 생명력이 포화된 것이다.

"미친..."

"마법이라고...? 인간이... 역시 마녀는 마녀인가..."

그들은 그럼에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을 하려고 해도 자동인형이 휘두른 팔에 총알은 맥없이 막혔고,

죽지 않는 자동인형은 그들을 끝없이 공격했다.

내가 마침내 그들을 모두 붙잡아 정보를 캐내려고 했을때,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멈추시지요. 에리아 씨."

내가 진흙골렘의 어깨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그냥 보기에도 나이가 상당해보이는

엘프 여성이 조용히 나를 가로막았다.

"누구시죠?"

"그냥 조금 오래 산 엘프지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그 아이들을 용서하시지요."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죠.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는거죠?"

"오래 전의 한 엘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이든 엘프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 땅이 지금처럼 변하기 전에 제일 먼저 변화를 눈치챘던 엘프의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당신이라면 분명 알고 있겠지요. 그 아이들은 그저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이미 기절한 엘프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늙은 엘프에게 말했다.

"어디로 갈건가요?"

"제 집이랍니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전 메리모드라고 하죠."

"에리아에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안내했다.

골목골목을 돌며 헤메는 것 같은 길을 열어나가면 그 끝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되어보이는 외관에 아늑해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내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고,

두 명이 다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는 문을 닫았다.

문은 닫자마자 걸어잠근 그녀는 곧바로 창문을 하나하나 내리고서

따뜻한 물을 받아 차를 우렸다.

"차는 좋아하시나요?"

"보통은요."

"다행이군요."

그리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녀는 차를 우려 내게 건넸다.

"당신도 오면서 봤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페마르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아, 그 사람들 말이군요."

"엘프의 구슬은 본디 엘프의 몸에 쌓이는 마력체입니다.

제가 오랜 시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마력회로...였나요?

그것이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는 엘프들의 12번 척추에서 굳어진 겁니다."

"아...!"

"보아하니 아시는 것 같군요. 엘프는 과거부터 자연과 교감하던 종족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연과 교감하며 마법을 사용하던 엘프들은 마력회로가 발달했고,

그만큼 죽었을때 체내에 축적되어있던 마력량도 많아 12번 척추같이

회로가 꺾이는 구역에 쌓인 마력이 구슬 형태로 굳어지는 것이죠.

엘프는 이제껏 그걸 모아 자연에 환원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푸른 빛이..."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페마르는 그 구슬을 부숴 비료로 준, 그러니까...

엘프의 마력을 먹고 자란 참나무입니다. 그러니 태웠을 때 마력에 취해

환각 증세를 보게 되는 겁니다. 참... 선조들께서 보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시겠죠."

"그게 이제 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까닭은 아마도..."

"네, 이제 엘프들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요.

당연히 사후에 나타나는 구슬의 크기도 빛깔도 예전만 못합니다.

비축해둔 구슬의 양은 점차 줄어가는데, 생산량은 따라가지 못하는거죠.

그럼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의 구슬을 가지고 과연 페마르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1등급 페마르를 생산한다고 가정하면 참나무 한 그루에 엘프의 구슬 하나가 들어가죠.

참나무 하나 분량의 페마르. 얼마인지 가늠이 되시나요?"

"그럼 저는 하나분량의 구슬을 빼돌린 사람이 되는 거군요."

"아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저 자들은 그래서 일부러 당신의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자신들이 엘프의 구슬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지우고,

선조들의 축복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엘프들은

페마르를 선조의 축복이자 자신들의 긍지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들에게 엘프의 구슬을 노리고 엘프를 납치한 범죄자인 상태죠.

정작 그 반대인데 말이죠. 저는 그들에게 반기를 들고 이곳으로 쫒겨났습니다."

"하아..."

어째 가는 곳마다 사고밖에 없는 느낌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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