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엘프의 구슬
* * *
"그런데 대체 뭘 믿고 내게 그런 이야길 하는거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날 바라보며 말을 돌려주었다.
"믿지 못할 이유는 뭐죠?"
"아니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건 아닌데, 초면에 신뢰가 너무 두텁다고 느껴져서."
"저희 어머니는 사제셨습니다. 정확히는 엘프의 제단을 관리하셨죠.
언제였을까요, 아마 당신이 아직 여행을 떠나기 이전의 이야기겠죠.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사제 일을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엘프에게 있어 사제의 일은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요.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두려워 떠시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으니까요."
"충격을 받았다?"
"한 엘프가 구슬을 옮기던 와중에 그걸 깨뜨린 겁니다.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구슬은 깨졌고 안에 담긴 마력이 주변으로 흩어졌습니다.
짙은 마력이 공기중에 퍼져가는 것을 느낀 그들은 처음으로 쾌락을 느꼈습니다.
그럴수밖에요. 마력을 흡입했으니까요. 엘프가 쌓은 마력은 인간의 수십배.
오랜 세월을 자연과 함께하며 모은 맑고 깨끗한 마력이니까요.
마력은 그 성질을 본따 적성을 띄게 된다고 했나요.
자연의 마력이니 당연히 싱그럽고 맑은 감각이었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 페마르가 지금의 환각성분을 띄게 된 건...?"
"사제들의 짓입니다. 어머니는 죄책감에 못이겨 사제를 그만두셨습니다.
그 쾌락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구슬을 깨뜨린 엘프가 도망칠 수 있던 것도 마력에 취한 엘프들이
순간적으로 멍 하니 마력을 흡입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엘프가 내 거처까지 도망쳤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이후 엘프의 행방을 찾으러 간 동료들은 하나같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엘프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겠지요.
귀쟁이 마녀년들이라고 욕하며 인간을 엘프를 잡아 불태웠습니다.
그때문에 지금까지도 엘프는 인간을 적대하는 것이겠지요."
"국가적으로는 마찰이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페마르의 물가가 유난히 고가였긴 하지만 거래를 하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페마르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엘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과거 문헌에 남아있던 엘프의 기록이 분명 있을텐데도
그들은 염치없이 아라카스트에 친선관계를 요청했습니다.
엘프들은 국고를 위해서, 그리고 발전을 위해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까칠한 건 어쩔 수 없죠.
대륙 우측으로는 오크들과, 좌측으로는 인간들과 적대하다보니
엘프는 자연스레 고립되었습니다. 그게 싫었던 엘프들은 숲으로 돌아갔고
마침내 고립된 엘프들이 아라카스트에 모인 겁니다.
여타 엘프들은 지역의 특색에 맞게 이웃 국가나 종족과 교류하며 종을 늘렸지만,
아라카스트는 폐쇄적이다보니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결과는..."
"근친상간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이엘프, 즉 엘프의 혈통이 유난히 높다는 것은 다시말해
고립된 사회에서 유전자가 섞여들 틈이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연히 유전적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력회로가... 지나치게 작은거죠."
"아...!"
"마력회로가 작아진 엘프들은 더이상 이전처럼 자연의 마력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다룰 수가 없어진 겁니다. 이래서야 인간들의 말처럼...
그냥 '와꾸 반반한 섹돌' 이죠... 수명 빼고 나은게 없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럼 구슬은 계속 나오는 건가요?"
"네, 페마르를 마시다보니 몸에 마력이 쌓이기는 합니다.
다만 순도도 떨어지고 크기도 작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체내 마력이 변질되죠.
쾌락만 추구하다보니 마력 자체가 마약과도 같은 적성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그런 구슬이 나오면 또 그걸로 페마르를 생산하는 거고요."
"그걸 관리하는건 사제들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엘프의 죽음은 곧 어머니의 제단으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사제들은 이 비밀을 간수해야 할 의무가 있죠.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나서 사제를 그만둔 저희 어머니께서는..."
"눈엣가시였겠군요."
메리모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그녀는 검은 상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구겨진 종이로 몇 겹이나 층층이 쌓인 무언가가 있었고
조심스레 그걸 그녀가 꺼내들어 포장을 한겹씩 벗겨내면 그 안에는
반짝이는 푸른 구슬이 들어있었다.
"이건...?"
"어머니의 구슬입니다. 보시다시피 최근 엘프들의 몸에서 나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깨끗하고 맑은 구슬이죠. 원래는 크기가 더 컸습니다만, 공기중으로 마력을 방출하고 있다보니
천천히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이게 왜 여기에 있는거죠?"
메리모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사제들은 어머니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였죠.
어머니는 그런걸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당신께서 죽고 나면
그 구슬마저 저들의 마약으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느날 제게 말씀하셨어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그러니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이죠."
"부탁 말인가요?"
"그건 제단에 올라갈 어머니의 시체를 훔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구슬을 빼돌리는 일이었죠."
"구슬을 빼돌린다...?"
"저는 그날 이후 페마르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될만한 물건을 팔아가며 페마르를 구입했습니다.
집이 조금 협소한 것도 그 탓이죠.
그리고 어머님이 숨을 거두셨을때, 저는 대량의 페마르를 숨기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윽고 어머니께서 제단에 올라가시고,
어머니의 모습 대신 구슬이 나타날 그 타이밍에,
저는 숨겨둔 페마르에 불을 붙였습니다. 장례식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다들 환각에 취했고, 저는 어머니의 구슬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다고요?"
"페마르를 태운 연기를 제가 마셔버렸다는 점이었죠.
외출 할 때도 연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한번 들이마신 연기의 쾌락은 상당했습니다.
어머니의 구슬을 볼때마다 저는 두려운 생각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중으로 포장을 하고 숨겨둔 거에요."
"페마르는 마약성 물질이니 중독성이 심한 것도 이해해요.
메리모드씨, 정말 잘하셨네요."
"잘한 거겠죠...? 하아... 현재 페마르는 사제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슬마저 그들의 손에서 가공되죠. 미친놈들.
엘프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을 저지르고도 사람들을 기만하고 농락하는
천하의 쓰레기들입니다. 그 결과로, 이제는 페마르에 중독되지 않은 인간은
아까 보셨듯 마스크를 쓰고 페마르를 피우는 이들을 습격하거나
외부인을 공격하고 금품을 갈취하게 되었어요.
페마르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하고, 돈을 모으면서
이 아라카스트의 비밀이 빠져나가지 않길 바라고 있어요."
"확실히 골치아프네요."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시니까...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적어도 아까와 같은 아이들을 보신다면
부디 해치지 말아주세요. 그 아이들은 아직 어립니다.
페마르에 중독되지 않은 엘프들이야 말로 아라카스트의 미래이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메리모드를 보며 헤세리티를 떠올렸다.
두명은 철저히 상반되는 입장에서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한 명은 권력을 이용해 공익을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키고
그 책임을 자신이 직접 나서게 된 원인과 환경의 부조리로 돌렸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변화를 위해 권력을 포기하고 소수의 노력으로 공익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 책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둘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너무나 비슷해보였다.
무엇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그랬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니 알겠더군요. 늙은 엘프 하나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요."
"하지만 열심히 하셨어요. 기어이 어머니의 부탁은 들어주셨고요."
"그래요, 어머니의 부탁은 겨우 들어드릴 수 있었던 딸아이도 이제 노인이랍니다.
이제는 이전같은 부탁을 다른 누군가에게 받더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호호..."
"하지만 행동하셨죠. 저를 막아세우셨잖아요. 제게 이야기를 전해주셨고.
아직 무언가가 바뀌기를 기도하시는 것 아닌가요?"
"역시 에리아씨네요. 저보다 오래 사셔서인지 다 눈치를 채시는군요."
"눈치채달라고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없죠."
메리모드는 다시 정성스레 구슬을 포장했다. 그리고는 상자에 조심스레 넣어
원래 있던 서랍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는 저 구슬을 지킬 거에요. 저 구슬이 다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나면,
그땐 어머니도 바람을 따라서 여행을 떠나실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요..."
"오래 사실거에요..."
"하나 묻고싶은데 괜찮은가요?"
"네."
"처음 에리아씨를 이곳으로 데려오면서 물었죠.
한 엘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에리아씨와 함께 살았던 그 엘프는 행복했나요?"
"행복... 했을거에요. 비록 떠나온 곳에서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 제가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라고요?"
"당신은 엘프를 행복하게, 엘프답게 살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일리가 없으니까요.
아까도 제가 막아서긴 했지만, 그 엘프들 외상은 없었던걸 보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고요."
"메리모드씨..."
"고맙습니다 에리아씨."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라카스트에 찾아온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건
그것만으로도 감사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미랍니다.
죽지 않고 돌아간다, 또한 죽이지 않고 돌아간다.
게다가 에리아씨는 아라카스트에서 안좋은 의미로 유명하신 분이시죠.
불쾌하실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절 이해해주시는 분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런 사람이 잘 없었거든요."
"우리는 아직 과거에 사는 사람들인건가요?
과거를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현재로 발을 내미는 사람들.
미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래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
인간의 언어로 이런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 있던것 같은데 혹시 아시나요?"
"음, 꼰대라는 말은 하던데요."
"호호... 그러네요. 꼰대라,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네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야말로 즐거웠네요. 아라카스트에서는 되도록 정체를 들키지 않는 편이 좋으실 거에요.
괜찮으시면 인식 저해나 투명화 계열의 마법을 추천드릴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아무 힘도 없는 그 나이든 엘프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따뜻하고 부드럽네요. 제 주름진 손과는 다르게...
엘프와 인간같지 않나요? 엘프는 수명이 길었는데도 이렇게 사그라지고 있고,
인간은 계속 계속... 새로운 변화를 기록하니까요."
"아까 구슬을 오래 보고 계셨던 것 같네요. 조금 취하셨어요."
"하하... 그러네요."
그리고 나 역시 조용히 생각했다.
이 나라를 조금 더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고.
인식저해 마법을 걸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거리에 널브러진 엘프들도 있었고 이동수단에 탄 채로 덜덜거리며 이동하는 엘프도 있었다.
어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까와는 또 다르게 느껴져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카스트라는 이 평화로워보이는 곳에서도 사연이 있었다.
흥미가 생긴 나는 어머니의 제단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그 제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 눈으로 보고싶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사원은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주변으로 푸른 마력을 스멀스멀 뿜어내고 있었다.
아라카스트의 예쁜 담홍색 땅은 사원 주위에서 흑갈색 흙의 빛을 띄었다.
주변대지에 담긴 마력도 어쩌면 천천히 뽑혀나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다만 신비감을 주는 것은 새어나오는 마력 뿐이었다.
그러나 메리모드의 집에서 보았던 것 같은 선명하고 밝은 푸른 빛보다는
칙칙하고 어두운 암청색의 마력이었고, 공기보다 무거운지 끈적하게 가라앉아
아래를 긁듯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불길한 마력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마력 내성이 부족한 하이엘프들에게는 치명적인 중독증세가 나타날 법도 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단은 일그러진 것 같은 암청색 구슬이 쌓여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라고 모든 일을 다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라카스트보다는 빨리 엠페레스로 가고 싶었다.
이 공간에서 느껴졌던 푸근함보다는 불쾌함이 스멀스멀 다리를 기어올랐다.
식물을 사랑하고 자연에 어울려 살던 엘프들이 지금은 마약에 찌들어
선조들의 영혼을 더럽히고 근친교배로 점철된 종족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내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나는 주야로 걸었다. 끊임없이 걸어서 아라카스트를 벗어났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