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35화 (135/303)

〈 135화 〉 개와 인간

* * *

아라카스트를 벗어나 담홍빛 대지가 다시 적갈색으로 변해가는 곳에서

나는 드디어 아라카스트를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이 앞으로는 문명이 없는 자연구역만 남아있을 것이다.

내쉰 숨이 흩어졌다.

척 보기에도 끝없이 늘어선 초원만이 보인다.

나무 몇그루, 바위 몇 개가 그저 늘어선 공간이

이제부터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하면 착잡함이 느껴지는 것도 별 수 없었다.

당장 뒤를 돌아서면 보이는 붉은 나무들은 아름답게 흐드러져

나를 이 나라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겨우 발을 옮기면 마른 나뭇가지가 밟혔다.

"엠페레스가 이렇게 멀었나..."

가속 마법을 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분주히 달리지 않으면 제때 도착하지 못할 테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

대장간을 들르지 않았다면 도착하고도 남았겠지만, 어쩌겠는가.

기어이 대장간에 들렀고, 유레크로스의 전쟁을 바라보았는데.

억울하고 서러워도 결국 누가 알아주겠냐만은.

그래도 투덜거릴 권리 정도는 남아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륙을 건너왔기 때문일까, 텔레프란 대륙은 상당히 더웠다.

기온 자체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옷의 단추를 일부러 조금 풀었다.

국립자연공원에서는 개발이 금지되어있다. 인간이 발을 들일 요소가 잘 없고,

오로지 연구를 위해서 간혹 사람들이 찾아올 뿐이다.

내가 옷을 조금 개방적으로 입는다고 지적할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흔적이 남지 않은 땅은 우거진 풀이 억세게 자라있었다.

그래서 다리가 자꾸 베이는 탓에 빨리 걷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몇걸음 가지도 못하고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예리한 칼로 풀을 베어내며 천천히 나아가다보면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이 들어왔다.

초원에서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매시키나와 야생마, 멀찍이 보이는 테러보어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숨을 죽이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물들이 떼거지로 덤벼들어도 쉽게 떨쳐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동물을 죽이는 취미는 없었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어려운 일을 택하느냐고 하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물들에게는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는게 제일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풀숲에 숨어 몸을 낮춘 건 좋은 선택이었다.

문제라면 그러고 있는다고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게 문제겠지.

발을 내딛은 순간 몸의 균형이 일그러진다.

고꾸라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오고, 단추를 풀었던 옷 틈으로 진득하고 뜨끈한 흙탕물이 들어온다.

옷을 더럽히며 빠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잔뜩 더렵혀진 가운데 애매하게 뜬

흰 색 뼈였다. 아마 동물의 것이겠지.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실수라는 의미였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밟았다고 생각한 땅이 실은 질척한 진흙으로 덮인 늪이었다.

몸이 점점 아래로 꺼져가는 순간은 유쾌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언제라도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껏 새로 산 옷을 더럽히게 되는 것도, 축축하고 찝찝한 기분을 맞는 것도 사절이었다.

하는 수 없이 허우적대며 몸을 뒤로 눕히고 조금씩 꾸덕한 진흙 속에서 발을 구른다.

내 몸이 작고 가벼워서인지 발을 구를 때마다 몸은 조금씩 떠올랐고

어떻게든 기어올라오려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수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수영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찰박대는 소리가 나긴 했다.

"컹! 컹컹! 컹컹!"

"아르르르....컹! 컹컹!"

기어이 헤엄을 치다가 일을 냈다는건 금방 알았다.

허우적대던 내 시야에 들어온 검은 개 두마리가 언제 날 찾았는지

나를 보고 컹컹대며 짖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개들이 늪에 막혀 내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

나는 숨을 고르고 개들을 피해 반대로 몸을 밀었다.

억지로 몸을 밀어낼 때마다 개들이 나를 따라 늪 외곽을 따라 돌았고

하염없이 컹컹대는 소리에 이어서 딸랑이는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뭐가 있어?"

그렇게 말하며 달려온 것은 처음보는 남자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상당히 구시대적인 의복이었는데,

어디가서 돈주고도 못 살 것 같은 느낌이 강한 투박한 옷이었다.

아마 짐승의 가죽이나 그에 준하는 장식을 주렁주렁 단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딱히 화려해보이지는 않는 옷이었다.

상당히 널널한 사이즈의 옷이어서 그런지 그의 배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배로 집중될 뻔 했던 시선은 순식간의 손으로 옮겨갔다.

배로부터 천천히 손으로 땀이 난 피부를 닦아가며

마침내 이마의 땀을 닦아올리는 모습이 그랬다.

검은 피부에 산뜻한 머리를 한 남자는 개들을 진정시키고 늪을 바라보았다.

"어...! 여자...! 기다려라! 도와줄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지고는 속옷 차림으로 늪으로 뛰어들었다.

늪이 상당히 익숙한듯 슥슥 미끄러져오는 남자는 나를 한팔로 휙 낚아채고는

나보다 능숙하게 늪에서 미끄러져 뭍으로 돌아왔다.

"어쩌자고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여길 떠나."

"고맙습니다."

남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벗어둔 옷가지를 개들의 등에 적당히 걸치고

속옷만 입은채 방향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요."

내 말에 그는 고개만 슥 돌려 나를 바라보고는 흥미 없다는 듯 돌아갔다.

괜히 나는 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저벅저벅 들리는 발걸음소리가

이어져서인지 그는 불쾌한 것처럼 나를 돌아보고 따졌다.

"집에 가라니까? 나가라고 했잖아."

"엠페레스로 가고 있어요."

내 대답에 그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비웃음을 던졌다.

"엠페레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엠페레스를 가겠다고 여길 들어왔다고?

그만 가라. 여기 더 있다가 족장님께 걸려서 좋을게 없을테니까."

"족장이라고요? 부족인가요?"

"그래, 위험한 부족이지."

그는 질린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아마 내가 떠나길 바란 것이겠지만, 그런 걸로는 도망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부족이라는 말에 흥미가 동한 것도 사실이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등을 따라 걸었다.

"왜 따라오는데?"

"사람을 주웠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그게 무슨 소리... 하아..."

그는 내 뻔뻔한 말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보모인줄 알아? 널 받아줄 생각도 의무도 없으니까 이제 가라고.

내가 구해줬으면 적어도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해야지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하면 안되잖아?"

"구해달라고 안했는데요."

"그럼 맨정신에 늪에서 수영이나 하고 있었던 미친년이라고?

상태를 보아하니 아예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또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죽게 놔둘걸 그랬나... 그래, 원하는게 대체 뭐야?"

"없는데요. 엠페레스로 가고 싶을 뿐이에요."

내 말에 짜증이 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면서 천천히 마른세수를 한 남자는

개들을 둘러보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양 옆에서 남자의 눈치를 살피던 개들은 어느 순간 자세를 낮추고

나를 바라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르르르..."

"그르르르..."

"엠페레스? 미치겠군."

그가 개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적당히 쫒아내."

개들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빠르게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팔을 물렸을 것이다.

아무리 체력적으로는 자신이 없다지만 이럴 때는 날렵하다.

검은 개들은 내 주변을 배회하며 내 빈틈을 노리는 것 같았다.

기어이 개들이 내쪽으로 다시 뛰어올랐을 때, 나는 다시 거리를 벌리며

내쪽으로 주둥이를 들이미는 개의 얼굴을 밀어냈다.

"컹! 컹컹!"

개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짖어대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본 남자는 말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벗어둔 옷을 뒤적이다 그 안에서 수통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

자기 얼굴을 씻어내고나서 옷을 어떻게든 주섬주섬 입는 모습이

꽤나 급해보였다.

"이제 늦었다. 기회를 줬는데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 분명한 적의를 드러냈다.

내가 이유를 물어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개들이 컹컹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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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그런게 궁금하시다고요?

대답해드리지 못할 것은 없지만 흔히들 아는 내용 아닙니까?

유레크로스를 떠나서 이 세상에 개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오크들도 개를 기르는 시대인데요."

노인의 목소리에 한가득 담긴 불쾌함과 의아함을 억지로 무시하며

능글맞게 그들은 질문을 이었다.

기자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늙은 노인을 괴롭히는 그 장면은

누가 보기에도 썩 안타까워 보일 법한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별 악의는 없어보였다.

"네, 개가 궁금하네요. 교수님께서는 분명 아실테니까요.

개라는 동물이 인간과 함께 산 지도 정말 오래 되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지만,

종의 차이, 그리고 개체의 차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시면 아는 선에서 대답은 해드리죠... 전공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멀로이 교수는 전쟁이 끝난 유레크로스의 도심에서 벗어나 임시거처에서 지냈다.

여러가지 의미로 혜택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한사코 그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는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허튼 질문이나 툭툭 던져대는 기자들의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도 전쟁에 참여했다보니 원치 않아도 임시거처에서 지내게 되었다.

같은 페세티아 대륙이라고 해도 유레크로스와 이리야스 산맥은 거리차가 있다.

그의 거처까지 오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절벽도 많았고, 뭐니뭐니 해도 돌산이니까.

그러나 지금 그가 유레크로스의 임시거처에서 지내게 되자,

이제껏 그의 자택으로 가는 길을 이유로 멈춘 발걸음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레크로스의 국민들은 그에게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멀로이를 초빙하고 싶다는 교육기관만도 6곳이 넘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응답하지 않았는데, 그건 자신에 대한 한심한 감정이 원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 앞으로 온 요청을 모조리 거절해버렸다.

"내가 대체 뭘 해야..."

잠깐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도 사실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유레크로스의 전쟁은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정작 유레크로스 출신도 아닌 기자들이 억지로 섞여들어와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물어대는 저 질문들이 거슬렸다.

그래서 더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멀로이는 괜히 잘 마시지도 않는 술병에 눈이 갔다.

그렇게 혼자 잠시 중얼거리던 그의 앞에서

혼자 발랄한 여자가 그의 기분은 파악하지 않고

신이 난 모습으로 노트를 들고 물었다.

"개요, 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니까요."

멀로이는 수염을 메만지다 입을 열었다.

그깟 개고 나발이고 짜증이 난 그는 되는대로 쏘아붙였다.

"개는 늙으면 죽는 생물입니다..."

그의 쓴 표정이 잠깐 얼굴 위로 번진다.

"그런 장난은 하지 마시고요. 개의 특성이라거나 종에 따른 차이라거나 하는 그런?"

"개의 일생은 사람인 제가 알 수야 없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저는 재료를 연구했습니다. 소재연구에 생물군은 포함되어있지 않았거든요.

잔공 분야가 다릅니다. 제가 아는 개라고는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 것 말고요. 이제껏 하셨던 대로요.

사냥의 의미가 퇴색되고 나서 인간이 개를 여전히 데리고 사는 이유는 뭘까요?

정서적 안정이라면 다른 동물도 있을텐데, 여전히 개가 인간과 공존하는 까닭이요.

그렇게 따지면 개의 역할이 다른 부가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용되는 것이니까

재료로서의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그런... 하아... 알겠습니다. 아는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알려 드리죠.

그거라면야... 오랜 기간 함께 해오기도 했고, 충성심도 높잖습니까...

호감도 부분에서 작용한 부분도 있었고, 대체할 수 없는 이점이 있었으니까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오지라거나, 기피하는 더러운 구역을 담당한다거나...

물론 아직도 사냥에 사용되는 곳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 자식도 충성심이... 높겠지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렇군요..."

"개가 재료라니... 그렇게 도구처럼 쓰고 버리는게 맞다고 생각하는건가..."

그녀는 멀로이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아마 노인의 혼잣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렇게 그의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 이 일이라면 저보다 다른 교수를 찾아가시는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학회에서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 있을텐데요. 생물학 교수라거나..."

멀로이의 눈이 가늘게 길어진다.

약간의 피곤함을 담은 눈은 기자를 썩 기껍게 보지 않는다.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기자는 말 대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그에게 내민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계속 하시죠."

"이런 사탕은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요. 대체 무슨 일로 절 찾으신건지 들어야겠습니다."

그의 시선을 애매하게 회피하던 기자가 입을 열었다.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모습이 아직도 당당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번 유레크로스의 전쟁 사건으로 인해서 학회에서는 유레크로스 출신의 학자와

교수진들에 대해서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발표했어요. 2일 전의 일이네요.

이후 학회에 소속된 학자들은 연구목적의 합숙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뼈의 저택으로 떠났고요."

"뼈의 저택이라, 오랜만에 듣는군요. 그러니까 유레크로스 내에서는 현재 교수가 없다?

그래서 학회를 등지고 나온 제게 질문을 몰아서 하고 있다... 그 말인가요?"

"그래도 교수님이시니까..."

"돌아가 주시죠. 그닥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대체 그 개를 질문하는 의도부터가..!"

"개가 왜요?"

"아...아닙니다..."

멀로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가주시죠."

"네? 아직 질문이 조금 남았어요!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시면..."

"나가라는 말이 안들립니까!"

멀로이가 소리쳤다.

기자들은 늙은 노인을 버려두고 그 거처를 떠나며 말했다.

"병신같은 늙은이... 저러니까 학회에서도 추방당하지...

고집만 세가지고선. 어울리지도 못하고... 누구는 오고 싶어서 오나?

에이 씨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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