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오래된 연인의 이야기
* * *
그제서야 나는 비고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요?"
"그랬으면 굳이 널 부족으로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거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남은거지...
그래, 이야기는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때 생각은 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부라렸다.
반쯤 협박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나 역시 어디가서 꿀릴 사람은 아니었기에 괜히 까치발을 세우고 대들어봤다.
"아뇨! 싫은데요!"
"싫다?"
"네. 제가 굳이 부족에 합류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는 이런 부족에 묶이기 싫어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남편의 옆에서 재잘대던 늙은 아내의 얼굴도 굳어지고,
내게 제안을 했던 비고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 공간에서 다만 어안이벙벙했던 것은 오직 나 뿐이었다.
내 옆에서 아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 하나만이 어색하게 서있었다.
그건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큰 충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너처럼 말한 아이가 있었지."
비고는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숙연해진 분위기였다.
나는 그 표정에서 어딘가 모를 착잡함을 느꼈다.
"나가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천막에서 나와 엠페레스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섰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잠시만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그곳에는 음침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용하고
말이 없었던 중년의 여자가 내 옷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처량함같았다.
"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뭐 그러세요."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조심스레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작은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천막 바닥을 정리하고
바닥에 불을 작게 지폈다.
"앉아요."
그녀의 말은 짧았다.
어쩐지 눈가가 조금 부어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다고 하신 이야기는 뭐죠?"
"그냥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서요. 별건 아니에요. 잡담이 하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만난 외부 사람이거든요."
거짓말이다.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어두운 표정은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소매만 안쓰럽게 잡고 있던 그 팔이 떨어지고 나면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불편할텐데."
"아뇨, 그런건 딱히 없어요.
음, 제가 살아온 이야기라고 해봐야 별 것 없어요.
그냥 한 평생 혼자 도망치듯 살다가, 친구를 만났어요.
그러다가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죠.
이유도 행방도 모르지만 다시 만나보려고요. 그래서 여행중이에요."
"친구... 말인가요?"
"네. 헤어지기 전에 말했거든요. 엠페레스로 갈 생각이라고.
혹시 거기 있다면 만날 수 있겠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좋은 친구네요. 떠난 사람을 찾아간다니. 그럴 용기가 있다는건 대단한 거에요.
다시 만나길 바래요. 그 친구는 절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네요.
그 좋은 친구 덕분에 쓸데없이 여러군데를 돌았지만요.
유레크로스에서 미리타엔으로, 미리타엔에서 망각의 미로,
미로에서 다시 방향을 꺾어 대장간에도 갔다가 결국 다시 유레크로스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이제 아라카스트를 거쳐서 엠페레스로 가려고 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저도 그런 친구가 있었답니다.
저는 이제 사이가 안좋아져버렸지만요."
"아..."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하고 불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뒤적이더니 작은 항아리를 가지고 왔다.
항아리는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아리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걸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이건 순수의 폭포수에요."
"순수의... 폭포수요?"
"네, 순수의 폭포의 물을 받은거에요...
타인의 거짓을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해요.
아마 도움이 될 거에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시는거에요?"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요."
"예전의 당신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길어질텐데, 들어보겠어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녀는 입술 사이로 겨우 새어나오는 웃음을 머금고
조용히 내 눈을 응시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보다시피 오래 전부터 부족을 떠난 적이 없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부족은 내 작은 세상의 전부였고요.
초원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밤에 빛나는 별만 있다면 행복했고요.
그게 언제까지나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죠.
아버지는 내게 늘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어요.
문명이 이곳을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거라고 했어요.
전 그 말을 믿었고 단 한번도 이 땅을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거든요."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찰나 떠오른 그 얼굴 끝의 순수한 미소는 금새 주름 사이로 사라졌다.
"내가 열 여덟이 되었을 해였어요. 아버지는 드디어 절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했어요.
그 말은 제가 성인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고,
천막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에서 천막 밖의 세상을 누비는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였어요.
우리는 양과 말을 기르고, 그 말들의 목초지를 찾아 헤메고 있는 유랑민이니 만큼,
성인은 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먼 길을 달렸어요. 달릴 수 있는 길은 모두 달렸고 밟을 수 있는 땅은 모두 밟았죠.
그리고 2년이 지나서 깨달았답니다. 이 국립공원은 너무 좁다는걸요."
그녀의 눈에서 옅은 반짝임이 보였다.
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지금의 당신처럼요.
아버지는 족장이었어요. 어디든 갈 수 있었죠.
겨울이 오면 우리는 이리야스 산맥을 넘어요.
산맥을 넘으며 분노의 사막을 지나죠.
이유는 간단해요. 말들은 국립공원의 겨울을 날 수 없으니까요.
물론 산을 넘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요.
노력도 그만큼 필요하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산맥을 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죠.
그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이기도 했어요.
국립공원에서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요. 단 하나만 빼고요."
"무기인가요?"
"네. 호신용품이에요. 도시인들은 검과 창, 화살로 무장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싸워 이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반격할 정도의 준비는 해야 했죠.
그래서 대장간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떠나는 거에요.
대장간의 화산 주변은 지열이 있어서 말들도 얼어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대장간에 도착했을때 저는 그곳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잠시 심호흡을 하다가 숨을 내뱉고 말했다.
"미안해요. 조금 울컥했네요. 그 남자는 늘 차분해보였고, 자만하지 않았답니다.
기술자들밖에 없는 그 도시에서 기술에 취해 자만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르게 계속 노력했어요.
문명에 취해서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들. 제가 배운 기술자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모습은 달랐답니다. 마법이라는 것을 상실하고 떠돌아다니는 우리보다
하나에 열중해서 기어이 붙들고 늘어져 새로운 것을 이루는 모습이 정말 인간같다고 느꼈어요.
저는 그래서 그 남자에게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주변에 놓인 물양동이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마시고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혹시 그럴리 없겠지만 술 있어요?"
"없ㅇ...아, 있어요..."
발레리아가 준비해준 술을 챙겼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위스키 병을 내밀면 그녀는 내게 다시 물었다.
"마셔도 될까요?"
"드릴게요."
그녀는 컵도 없이 병을 들고 술을 마셨다. 분명 그렇게 마시기에는 독한 술일텐데
생각보다 잘마시는 모습에 그녀가 술을 마시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우울한 기색이 어제오늘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세요. 한 평생 문명을 모르고 살아온 저에게 대장간의 시설은 충격이었답니다.
기계와 회로, 그리고 어디서나 물을 쓸 수 있는 환경까지도.
그때 저는 처음으로 느꼈어요. 우리 부족은 전통을 위해서 인간성을 포기한 건 아닐까 하고요.
부족은 대를 잇기 위해서 다른 국가, 다른 부족의 누군가를 꾸준히 만나고,
발 닿는 지역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해요. 저는 그게 대장간이었고요.
이후로 저는 겨울이 기다려졌어요.
그 남자는 늘 한결같이 성실하고 친절했어요.
그게 내게는 그 남자가 내 좁은 세상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죠.
그리고 대장간을 떠나던 날, 깨달아버렸답니다. 제가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걸."
"당신이... 재클리나...베일슨인가요...?"
"맞아요. 하지만 아니에요. 내 이름은 재클리나 프리스트노브.
모두에게 버림받은 여자에요. 날... 아는군요?"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날 욕할 건가요? 아니라면, 날 동정할 건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무 난처한 질문을 했네요.
잊어주세요. 전 그를 사랑했답니다. 더는 부족의 좁은 환경에 갇혀있기 싫었어요.
바람과 별을 보고 행복하기에는 전 너무 커버렸던 거였죠.
처음으로 돈이라는게 고파졌어요. 처음으로 내 몸에서 나는 말 냄새가 싫었고
내 옷이 초라해 보였어요. 그와 함께 있을때 나는 유목민 비고의 딸이 아니라
여자 재클리나 베일슨이었어요.
그리고 그해 봄, 아버지께 처음으로 말했어요.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당연히 허락이 나올리 없었죠. 아버지는 반대했어요.
그것까지는 상정범위 내였어요. 문제라면 대장간에서도 절 탐탁치않아했다는 거였죠.
어쩌면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놓아줄 수 없는 거였겠지만요.
아버지는 조건을 걸었어요. 그 사람이 대장간을 떠나 부족에 합류한다면,
그리고 한 평생 쌓아온 기술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자연속에서 살 수 있다면...
그때 허락해 주겠다고요.
저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떠올랐어요.
제가 사랑했던 남자가 과연 대장간을 떠나서도 행복할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게 그 남자인지, 아니면 대장간에서 빛나는 그였는지도
나는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도 알아요. 마르커스는 저의 말을 묵묵히 들었어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기뻤어요.
다음 해 겨울만을 진심으로 기다릴 정도로요.
그런데 어느날 문득 보았을때, 느꼈어요. 부족의 결혼한 여성들이
하나같이 천막에서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 일들에 시달리고 허덕이고 있었다는 걸요. 물론 도시의 여성보다 야생적인건 알아요.
그게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그걸 보고
덜컥 내 자유를 빼앗기는게 싫다고 생각해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 해 겨울, 대장간에 발을 들였을때, 저는 덜컥 두려워졌어요.
결혼을 하면, 그는 대장간의 기술자가 아니게 되고,
나는 부족의 여느 여성들처럼 살이 찌고 배가 나온 아줌마가 될거라고요.
그럼에도 내가 결혼을 놓지 않았던건 그가, 아니, 이제 당신도 알겠군요.
마르커스가 날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마르커스가 날 사랑해준다면 그것들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구요.
그리고 그날, 제 앞에 나타난건 헤세리티라는 여자였어요.
그날, 모든게 어긋나버렸죠."
그녀는 빠득 이를 갈았다.
붉게 물든 눈시울에 겨우 담겨있던 그녀의 오랜 울분이 그렇게 뺨을 타고 흘렀다.
뺨에 그렇게 후회의 자욱을 남기면서 흘러내린 눈물은 턱 끝에서 떨어졌다.
"그 거짓말에 속아 저는 도망치듯 대장간을 빠져나왔어요.
그 반지가 정말 그가 만든게 아닐 거라고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어야 했는데.
그가 준게 아닐거라고 한번이라도 의심하고 그를 찾았어야 했는데..."
"그건 마르커스씨가 만든 반지가 맞을겁니다."
"....네..?"
"당신을 위해서요."
침묵.
긴 침묵.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가 천막을 흔들때마다 펄럭이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긴 침묵을 뚫고 그녀가 마침내 입밖으로 말을 내뱉었을때 겨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런건.... 어찌되던.... 좋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침을 넘긴다.
울대에서 미처 다 넘기지 못한 눈물이 쏟아졌다.
또 거짓말이다. 이 사람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랬다간 정말 자신을 원망할 것 같아서겠지.
"그걸... 그때... 알았다면...."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