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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38화 (138/303)

〈 138화 〉 버리고 버려지다.

* * *

그녀의 눈물이 마르고 난 후 내가 겨우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위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끝냈으면 안되는 거였어요.

나는 나쁜 사람이에요. 그렇게 나를 기다려온 사람의 등에 칼을 꽂았다구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잖아요. 힘드셨잖아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어요.

당신이라면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맞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얼굴은 술기운인지 울분인지 모를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은 마를 일이 없어보였다.

이제껏 그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그녀는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던 거겠지.

"나는 그 이후로 천막을 나가지 않았어요. 유목민족은 천막을 접어야만 이동할 수 있어요.

그 작은 천막 하나를 접지 않아서 아버지는 늘 말떼를 몰고 멀리 떨어진 초원까지 이동해

말들을 먹이고 오셨어요. 여자들은 모두 이 구역에 터를 잡고 정착하다시피 했고

아버지는 그렇게 마을의 남자들을 모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셨죠. 저 때문에요.

그렇게 6달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날 배려해줬어요. 난 잘한게 하나 없는 사람인데.

그동안 제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도 화가 많이 나셨던 거겠죠.

그동안 아버지는 베일슨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져 있었어요.

못난 딸 하나 때문에 지나가는 길목의 거슬리는 이들을 모두 처참하게 밟아버리셨다고요.

간혹 귀금속 같은 것들을 얻으시면 제게 가져다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문명의 잔재를 싫어하시는 분이 절 위해서요."

나는 그녀의 양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눈물을 닦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한명 찾아왔어요."

"저 같은 사람...?"

"엠페레스로 가고 싶다고 국립공원에 발을 들인 사람이죠.

그 사람은 마침 여자뿐인 부족에 자연스레 들어왔어요.

그리고 나를 발견했죠.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그 남자는 적극적이었어요. 날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줬어요.

처음 본 그 날부터요. 방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던 제게 꾸준히 찾아왔고

그때마다 제 방에는 문명의 산물이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것을 내게 휙 휙 던졌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팔찌, 귀고리, 반지따위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크게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은팔찌로 보이는 물건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이었고,

귀고리에 달린 진주는 값이 싼 가짜 진주고, 에메랄드 반지로 보인 것은 유리였다.

"나는 그에게 넘어갔습니다. 제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던 시기여서인지,

혹은 그저 다시 발전된 문명의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인지, 그때는 그가 좋았으니까요.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저는 마르커스의 빈자리를 그로 메꾸려고 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이버 프리스트노브. 제 전남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물을 떠서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서는 세수를 하고 남은 물을 천말 밖으로 휙 뿌렸다.

"후우... 남자는 절 사랑한다고 했어요. 기꺼이 우리 부족으로 들어온다고도 했고요.

아버지는 너무 기뻐하셨어요. 드디어 제가 우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그 남자가 들어온다면 분명히 새로운 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은 엠페레스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도시에서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거 가질 필요 없는데."

"그래도 결혼은 하셨네요."

"네. 저는 그렇게 엠페레스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국립공원을 떠나겠다고. 그리고 엠페레스로 그를 따라 가겠다고 말이에요.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굽히지 않았죠.

당시에 저는 마르커스가 절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저와 함께 이 초원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을거라고 믿었죠.

이번에도 그깟 조건 때문에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다가 질러버린 거에요."

"질러버렸다고요?"

"내가 없어도 부족은 멀쩡할거라고요.

오히려 최근에는 오히려 짐이 되지 않았냐고요.

그리고 이깟 부족에 묶여있고 싶지 않다고 말이에요."

"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말이 없었다.

표정은 금방이라도 썩어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가방을 열어 약품을 찾았다.

RIC­9호를 찾아 그녀에게 건넸다.

"천천히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진정이 될거에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마셨다.

컵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야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한풀 진정된 모습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결국 저를 보내주셨어요. 저는 그를 따라 엠페레스에서 지냈고요.

엠페레스에서의 생활은 정말 편안함과 안락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껏 직접 해야했던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이 모두 편리한 도구로 대체되었으니까요.

제 남편, 이버는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게 그런 물품을 가져다 주었겠죠.

우리는 형식적으로 엠페레스로 돌아왔고,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도시에 대해서, 초원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그저 일반적이라는 그의 말에

배란 유도제를 잔뜩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하혈의 빈도나 통증이 변해버렸고요.

그리고 저는 첫날, 바로 그의 아이를 임신했어요.

저는 아이의 이름을 루니라고 지었어요. 초원에서 보았던 달을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이버는 그날 이후로 두번 다시 저를 안아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시는 건가요?"

"아마 그랬을거에요. 저는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였고, 동시에 국립공원과 분노의 사막 일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던 비고 베일슨의 유일한 딸이었으니까요.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그 길목을 틀어막은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남편은 엠페레스로 돌아오자마자 인원을 꾸려 아라카스트로 통하는 무역로를 열었어요.

그리고 국립공원을 통해 아라카스트와 육로로 교역을 성공시켰습니다.

전 그 과정에서 이용당한거죠. 딸아이는 인질과 같은 거였고요."

"이런 미친..."

그녀는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톱이 살갖에 파고들어 주륵 핏줄기가 흘렀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저는 괜찮았어요. 그래도 이버가 절 사랑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가... 마약으로 절여진 엘프를 양 손에 끼고 여관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요.

아라카스트의 엘프를 상대로 마약을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엘프를 사서 놀고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산다는 충격과, 남편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충격,

그리고 더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이

제게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저는 그날 집을 빠져나와 도망쳤어요. 하지만 이제껏 남편이 해준 것들을 그저 받았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지 않았던 저는 오히려 화려한 문명의 초원에 서있었습니다.

모든것이 편리하고 화려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무엇 하나 할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죠. 저는 집을 나가 근처 모텔에 거주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할 수 있던거라고는 그게 전부였더라고요.

처음에는 남편이 분명 저를 찾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모습이 보이면 돌아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제가 사라진 사실조차 모르더군요. 그저, 무역로를 확보한 이후로 제 가치는 0이었나봐요.

성욕도 애정도 남지 않은 저는 그저 의무, 혹은 짐이었으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빈 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 잔에 RIC­9호를 다시 따라주었다.

그녀는 작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말을 이었다.

컵을 든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결국 남편은 저를 찾았어요.

인질이 멋대로 도망쳤다고요.

잡혀온 저는 초원의 천막보다 더 작은 방에 감금당했어요.

하루 세끼 밥이 나오고 화장실을 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좁은 방.

우울증은 심해졌어요. 저는 그게 우울증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방에 갇힌지 2달째 되던 날, 저는 아이를 유산했어요."

"저...런..."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내 약을 꾸준히 마시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격정적으로 감정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오랫동안 억압받으며 표현을 묵살당하고 감정을 삭힌 결과일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남편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증거가 남는다고 말이에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저는 또 다량의 배란유발제와 함께 두번째 아이를 임신했어요.

정말,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초원의 태양이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

어두컴컴한 방에서는 마치 내가 쓰레기보다 못한 것 같았거든요.

아이의 이름은 헬렌으로 지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손님이 찾아왔죠. 공작이라는 것 같았어요. 겔데어스라는 이름의.

그날 저는 오랜만에 방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껏 부른 배와 함께요.

남편은 손님의 앞에서 연기를 했습니다. 정말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그렇게 연기를 하더군요.

저는 두려움에 그저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 마침내 남편이 말했죠. 가서 차라도 내오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거였어요. 남편이 고용한 가정부가 내려준 차를 그저 받아서 가져다주는 일.

차 비율조차 몰랐던거죠.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리고 가정부의 눈을 피해 도망쳤어요.

가정부는 차를 끓였는데 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남편은 한 시간이 지나도 차가 오지 않자 절 찾아나섰습니다.

저를 잡겠다고 남편은 사람을 고용했죠. 정말... 두려웠고...무서웠어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도망쳐서, 저는 남편의 무역 짐차에 숨어들었습니다.

박스들 사이 몸을 감추고 2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채로 숨어있었어요.

이윽고 출발일이 되어 차가 아라카스트로 출발하고,

그 과정중에 우리 부족이 차를 멈춰세워 검문을 시도할때, 저는 소리쳤어요.

살려달라고. 여기 재클리나 베일슨이 있다고요.

저는 겨우 구출되어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껏 없을 정도로 화가 나셨고, 아예 국립공원 전부를 통제하셨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후문으로는 아라카스트와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한 이버는

계약상 큰 빚을 지고 파산해 미리타엔의 노예로 팔려갔다고 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창자가 심각하게 꼬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면 안될 것 같았다.

그녀는 내 표정을 가만히 보다가 우울한 웃음을 지었다.

"제 벌이겠죠. 마르커스를 버린 벌..."

"그...그래도 헬렌이...!"

"헬렌... 그래요,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어요.

절 빼닮았죠. 제 어린 때를 보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저는 고생으로 인해서 주름도 파이고, 얼굴도 흉해졌지만요.

저는 정말 죽지 못해 살았어요. 14년간은 말도 한마디 꺼내지 않았고요.

자해도 많이 했었죠. 지금도 여전히 스트레스가 쌓여있지만요.

헬렌은 너무 잘 커줬어요. 애비없는 아이라느니,

애미가 병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한번도 절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 해줄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어린 아이에게 충격을 줄 수도 없는 거였으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느꼈죠.

헬렌은 너무 순수하다는걸요. 이 아이를 이렇게 초원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고요.

이렇게 문명을 모르고 엄마처럼 순진하게 살다가 사랑에 눈이 멀어 시집을 간다고 하면...

그떄 정말 버티지 못할 것 같았어요. 딸아이 운명도 망칠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나 아라카스트는 인간을 배척하고, 엠페레스는 제게 지옥이었어요.

제가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게 마르커스였습니다. 비록 결혼은 했겠지만... 제자 정도는 들여주길 바라며

저는 그렇게 그해 겨울, 대장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맡겼어요.

부디 잘 살아주길 바라면서요... 이름처럼 밝게 살아줄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실소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오래 이야기해본건 오랜만이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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