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비고의 방식
* * *
긴 이야기를 마치고 재클리나는 상당히 조용해졌다.
지친듯한 모습이 역력해 말을 걸기도 애매해보였다.
내가 그녀의 눈치만 애매하게 살피고 있으면 오히려 그녀쪽에서 이 분위기를 어색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는게 기뻐서 너무 흥분했네요."
"아뇨, 그럴수 있죠."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하기 힘든 이야기가 있다.
그랬기에 이제껏 그녀가 홀로 말 못하고 앓아오던 거겠지.
"마르커스가 보고 싶네요. 우리 딸... 헬렌도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고요.
대장간에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이미 떠났대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몰라요.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잘 살고 있을거에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재클리나의 몸이 작게 떨렸다.
"저는 나쁜 엄마에요..."
"....."
"딸을 그렇게 맡겨놓고 찾아가지도 않았으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의 항아리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갔다.
뚜껑이 굳게 닫힌 항아리를 끌어안고 억지로 그 뚜껑을 열어젖히고는
그 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또 순수의 폭포수인가요?"
그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건 향수에요. 엠페레스를 떠나면서 숨어들었던 차량에
마침 들어있었던 향수죠. 상당히 고가의 상품이기도 해서 챙겼어요.
요즘 들어서는 잘 뿌리지 않았지만요. 이전에는 종종 뿌렸답니다.
헬렌은 이걸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기분좋은 향이 날 때마다
야생에서는 나지 않는 이 향수 냄새를 엄마의 향기라고 하곤 했죠.
언젠가 엄마의 향기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해줬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향수병을 다시 조용히 항아리에 집어넣었다.
"안뿌려보세요?"
"괜찮아요. 뿌릴 수 있는 도구가 없어요. 이 병은 그냥 유리병일 뿐이거든요.
열어두면 방향 효과는 있겠지만 뿌릴수는 없어요.
어쩔 수 없죠. 저 병은 리필용이니까요."
멍해졌다.
문득 스친 생각이 머리를 쾅 하고 두드린다.
나는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아주 오래 전에 헬렌이 내게 주었던 가습기를 꺼냈다.
가습기라고 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분수처럼 뿌려진다고 말했던 작은 기계.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헬렌의 흑역사.
나는 그걸 조심스레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받아주실래요?"
"네..? 이런 작은 기계는 왜..."
"당신이 가지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마 만든 사람도 그걸 좋아할 거고요."
재클리나는 마지못해 받아든 가습기를 올려두고 그 안에 천천히 향수를 부었다.
쪼르르 흘러들어간 향수가 천천히 물레방아 형태의 태엽을 돌리면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천천히 분수가 위로 솟아났다.
위로 향기롭게 뿌려지는 향수들이 천막 안을 은은한 향으로 가득 메웠다.
"이건..."
"만든 사람은 아마 이런 도구를 만들고 싶었을거에요.
본인 입으로는 가습기라고 했지만요."
"고맙습니다..."
떨어져 지낸다고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마 재클리나가 그녀를 그리워 한 만큼, 헬렌또한 엄마를 그리워한 거겠지.
엠페레스에서 생산되는 향수는 고급품이다. 헬렌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닐 뿐더러
산다고 해도 이미 이전의 그 향이 사라져있을 것이다.
그래서 헬렌은 자신의 첫 작품을 조용히 골동품들과 함께 모은 것이리라.
그 물건이 지금 원래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 뿐이다.
그녀는 가만히 그 가습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습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드신 분이 상당히 따뜻한 분이신 것 같네요."
"네?"
"그렇잖아요. 이 기계가 가습기로 쓰이려면 분명히 좁은 공간에서 사용해야 할 거에요.
크기가 작으니까요. 그런데, 엠페레스에서 지냈던 기억 상으로는 가습기를 구입하는 사람은 대부분
넓은 집에서 사니까 이런 소형 가습기로는 해결이 안되던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까 이 가습기는 가난한 사람의 작은 집을 위해 만들어진거에요.
제가 기계는 잘 모르지만 작고 서툴지만 정성스레 만든게 보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님은 페세티아 대륙 유레크로스의 서지스에서 가게를 하고 있어요."
말할 생각이 없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니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네?
"서지스에서, 작은 가게를 내고 살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그냥, 아는 사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내 손을 다시 꼬옥 잡았다.
"고맙..습니다..."
"그 가습기, 따님이 만드신거에요."
"...!"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염치없지만, 잠시 혼자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나를 살짝 떠밀었다.
또 그녀가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조용히 천막을 나왔다.
조용히 천막을 나오면 그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비고가 나를 보았다.
"잠깐 따라오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아까 쫒겨났던 그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가면 비고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잠깐 자리 좀 비워줘."
"뭐? 당신 정말 그 여자랑 뭘 하려고...!"
그렇게 장난이 섞인 목소리로 타박하던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비고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비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가서 우리 딸을 위로해줘. 엄마잖아."
"그래."
그렇게 말한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 희끗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천막을 나선다.
천막 문을 붙들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뭐가... 있었구나...?"
"그 애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그 말에 그녀는 투정하듯 핀잔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그래, 어련하시겠어."
나는 비고와 둘이 남아 무거운 분위기에 그가 건넨 물로 목만 축이고 있었다.
먼저 화두를 연 것은 비고였다.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셨겠죠."
"애비가 되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왜 그렇게 우울했는지만 물었으니...
면목이 없군.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과는 저한테 하실게 아니죠."
"그렇군. 하아...."
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아이를 혼자 두는게 아니었는데."
"이제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겠죠."
"듣자하니 헬렌을 아는 것 같던데, 내 손녀딸은 잘 지내던가?"
"네, 가게도 내고 자유롭게 살고 있어요."
"그 아이를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쩌면 전통이니 마법이니 하면서
우리 부족을 몰아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오늘은 일찍 자라. 천막 하나를 내어주지."
"네?"
"내일 엠페레스로 가야 할 것 아니냐.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거다.
너를 엠페레스에 내려주고 나면 오랜만에 손녀딸 얼굴이 보고싶군.
하기사, 이 초원에 너무 오래 있었지... 나갈 때가 됐지.
선조님들께서 몇 대를 이곳에서 보내셨다고 우리까지 그럴건 없었는데 말이야.
마법도 다루지 못하면서 너무 고집을 부렸는지도 모르겠어."
"감사합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재클리나에게 주었던 술, 더 있나?"
"아뇨, 따님이 너무 잘 드시던데요."
"물론이지, 누구 딸인데. 하하...하... 자랑은 아니로구만.
그렇게 먹인 것도 결국 내 탓이니. 그럼 술은 내가 준비하지.
한잔 들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어졌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항아리를 두 통 들고 돌아왔다.
상당히 큰 항아리였음에도 한 팔에 하나씩 들쳐메고 돌아와서 내 앞으로
작은 바가지를 툭 던졌다.
그리고 항아리를 열면 그 안에는 우윳빛으로 찰랑대는 독한 술이 들어있었다.
발효가 된건지 조금은 걸쭉해보이는 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코를 간질였다.
술은 부드럽고 고소했다. 그러나 탄산이 느껴지는 톡쏘는 맛과
그 뒤로 따라붙는 강한 알콜이 전혀 도수가 낮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실만 할거야. 초원의 술은 넓고 따뜻하니까 말이지."
"따뜻하다기 보다는 목구멍 전체가 뜨거운데요."
"화끈하지."
그는 확실히 족장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술이 강했다.
항아리 두 통을 전부 비울때까지 그는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기색도 없이 더 활기차고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 석양을 몰고오면 그제서야 천막의 문을 열어젖히며
재클리나와 그 엄마가 들어왔다.
"어우, 술냄새..! 나가라더니 이러려고 그런거야 당신?"
"하하... 맨정신으로 있기엔 좀 힘들더라고. 오늘 같은 날은 좀 봐줘."
"하여튼 술 마실 핑계만 늘어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나도 한잔 줘."
그러나 이미 다 비어버린 항아리에 바가지를 든 그녀의 손은 홀로 떨었다.
"벌써 다 마셨다고? 두 통이나 가져와서? 에라이 인간아!"
바가지는 비고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무참하게 부서졌다.
비고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문지르고는 날 돌아보고 물었다.
"그래, 이름이 에리아라고 했지, 더 마실 수 있겠냐?"
"술술 넘어가겠네요."
"그래, 좀 더 가져오지. 조심해, 아내는 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괜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아내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런건 아니고... 호호... 내가 만든 술인데 내가 못 마시면 좀 그렇잖아?"
"아, 직접 빚으신거에요?"
"그럼, 나랑, 우리 딸도 노력 좀 했지.
어머, 너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못들었나보구나?
하여튼 주책이라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팡팡 두드리는 그녀의 손길은 상당히 매웠다.
비고가 다시 술독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 뒤로 부하들이 술독 두 통을 더 들고 따라 들어와서
우리 앞에 내려놓고 빈 술독을 들고 돌아갔다.
"자, 마시지."
비고가 그렇게 말하며 바가지를 하나씩 나누었고, 족장가족과 나는 그렇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기어이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술이 다 동이 나면
그제서야 더는 마시면 안된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내의 등쌀에 비고가 바가지를 내려놓으며
우리의 술자리는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작은 천막을 배정받았다. 천막 안에는 임시로 급조한 것 같은 잠자리와
물이 든 항아리, 그리고 작은 불씨가 조용히 타닥대며 타오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누워서 불멍을 때리다보면 잠이 솔솔 왔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눈을 감기면 나는 거스르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수십, 아니 수백의 말발굽 소리와 푸르륵거리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 눈을 뜨면
이미 부족은 이동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천막을 하나하나 접는 그들이 모든 짐을 다 싣고 나서 나를 깨우려고 했단다.
나는 일어난 김에 그들의 준비를 도왔다.
"엠페레스는 무슨 목적으로 가는거지?"
한참 준비를 같이 하던 도중에 비고가 내게 물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거기 가보면 뭔가 알 것 같아서요.
어쩌면 엠페레스도 그냥 거쳐가는 길인지도 모르죠."
"오래 전의 조상님들께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지.
다만 그 목적지가 엠페레스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 정도만 다르겠군."
"그 사람 이름이 혹시 브루안느인가요?"
"알고 있나?"
"음... 어쩌다보니까요."
내가 예전에 숨어살던 이리야스 산맥의 집까지 찾아왔던 길잃은 조난자였다.
몇백년 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결국 도망쳐나왔다는 비고의 선조라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거 내가 한 말이니까. 왜 산 속에 숨어 사느냐고 물을 때,
그냥 여기서 살면 뭔가 알 것 같아서? 어쩌면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중일지도?
라고 대답했었는데 어째 그게 싹 둔갑해서 고 맹랑한 놈이 했던 말이 된건지.
이 부족은 바깥사회의 소식과는 동떨어졌으니 내 소식을 못 들었다지만
나를 그저 소녀로 대하는 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소소하게 듣는 옛이야기도 꽤 즐거웠다.
엠페레스까지는 몇시간 정도가 걸렸지만 확실히 금방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린 내가 바닥에 거하게 토악질을 쏟아내긴 했지만
시간은 확실히 단축할 수 있었다.
"말타는 법은 좀 배워야겠군.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살면서 두번 다시 말 안탈거에여으어...."
"그래,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초원으로 찾아오라고.
넌 이제 우리의 동료나 다름없으니까. 잘 가라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그 거대한 부족이 방향을 바꿔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아라카스트 쪽으로 우르르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화려하고 웅장했다.
"자, 나도 이제 가볼까..."
나는 그렇게 휘청이며 엠페레스로 발을 옮겼다.
머리가 아프다. 어으, 술 조금만 마실걸... 우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