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40화 (140/303)

〈 140화 〉 죽은 예술가의 거리

* * *

사방이 거대한 장벽으로 막혀있는 국가. 초기 건국 당시부터 왕의 지시로 지었다는

그 길고 큰 장벽은 보기에도 거대해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웅장함을 자랑했고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따른 긴장이 내 등을 쓸고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 두꺼운 장벽을 내게 열어주었을 때부터 상황은 변했다.

엠페레스에 처음 발을 들였을때 내가 느낀 것은 자유로움이었다.

형식적인 자유라기보다는 무언가 예술적인 자유로움에 더 가까운 느낌을

거리 전체에서 물씬 풍기는 나라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들었다.

길목마다 보이는 아틀리에와 카페, 그리고 술집까지 꽤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표방했는데,

곳곳에는 기술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름냄새를 풍기며 맥주를 한손에 들고

작업을 하고 있었고,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거리에는 자동차 외에도 자전거가 분주히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각자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저마다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풍경만 보아서는 재클리나의 이야기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상당히 밝은 분위기에 긴장이 풀려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참을 걸었다.

국경을 큰 성벽으로 둘러둔 모습을 보았을 때 까지만 해도 상당히 폐쇄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보내 내부에서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느긋하게 돌아다닌 결과 미리타엔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어쩌면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미리타엔보다 안전하면 큰 무리없이 지낼 수 있으니까.

긴장이 풀려서인지 슬슬 배가 고파와서 식당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몰린 식당을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대기는 없는 것 같았고 나는 혼자 왔다는 이유로 창가에 남은 테이블을 안내받았다.

점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대부분은 고기 요리였는데,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이 매시키나 스테이크에

새우와 키조개 관자를 곁들인 요리였다.

나는 선뜻 메뉴를 선택하고 나서 와인을 주문했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점원이 자리를 비우면 잠시 뒤에 다른 종업원이 찾아와 말했다.

"저기 손님, 실례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다른 손님과 합석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음식값은 10% 디스카운트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종업원이 상당히 뻘뻘대며 내게 묻는 모습이 애처로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종업원은 그나마 표정을 좀 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종업원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내 앞자리로 찾아왔다.

나이는 40대 정도로 되어보이는 남자였는데, 안경을 살짝 위로 올려쓰고는

점잖은 자세로 내 앞에 앉아서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합석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로서도 꼭 여기서 식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살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네...? 안그러셔도 되는데요..."

"아니오,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필기체로 모건이라고 쓰여있었다.

널스페이지라는 신문사의 부장이라는 것 같았다.

"반가워요 모건."

"저야말로요. 숙녀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저는 에리아에요."

"반갑습니다 에리아 무령님."

"다 알고 있었군요?"

"네, 일단은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만나뵙게 뵈어서 기쁘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종업원을 불러 내가 주문한 메뉴와 같은 것을 주문하고는

추가로 매시키나 알 볶음과 매시키나 튀김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별미입니다. 한번 드셔보시죠. 아마 어디서도 드셔보신 적 없는 맛일 겁니다.

이 가게에서만 사용하는 특제 소스가 있거든요. 그리고 엠페레스의 매시키나는

유명한 먹거리중 하나니까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매시키나와는 다르죠.

크기라거나 맛이라거나 육질까지 여러 방면에서."

살짝 부담스러운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느낄 정도의 이야기부터 엠페레스의 사회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네요.

확실히 이전까지의 미리타엔 고위층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들리던 이야기가 정말이었군요."

"들리던 이야기라고요?"

"미리타엔의 무령이라기엔 사람이 너무 여리고 친절하다는 이야기부터

소속감이 잘 없어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요.

저도 일단은 기자이다 보니 몇가지 궁금증은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조금 괜찮을까요?"

"네, 편하게 하세요."

그 말에 그 역시 웃으며 주머니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어보이면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미리타엔의 무령이 된 건지부터 엠페레스의 방문목적까지.

여러가지를 차분히 물어보며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역시 신문사의 부장정도 되면 이런 쪽으로 스킬이 늘어나는 구나 싶었다.

"그래서 엠페레스는 그저 관광목적으로 방문했다고 이해해도 괜찮은...아, 식사 나왔네요.

드시면서 하시죠. 이 집 요리는 정말 맛있거든요."

"그렇군요. 아, 혹시 그래서 오늘 꼭 여기서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하신 거였나요?"

"음, 그건 좀 다릅니다. 오늘은 제 오랜 친구의 기일이거든요.

아마 엠페레스 국립 미술관에 가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지도를 그려드릴까요?"

"음,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네요.

그나저나 기일과 미술관은 무슨 연관성이 있죠?

혹시 친구분께서 미술을 하시던 분이셨나요?"

"네, 제 친구의 이름은 에드먼드 브리깃, 과거 6귀족이었던 예술가입니다.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 6귀족이라는 분들이 이 엠페레스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크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에네도르라는 귀족분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에네도르... 현재 에네도르는 공석입니다. 그것도 48년 전의 일이죠.

하...하하... 원래 규정대로라면 에네도르의 자리를 이어받을 적합한 후대를 찾아야 했습니다만,

선대 에네도르의 가주였던 안드리안 에네도르께서 유언을 남기시길,

절대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또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가주로 잇지 말라고 했었죠. 결국 그러려니 하고 지금은 돌아가신

안드리안 에네도르에서 그 대가 끊기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48년 전 목숨을 잃었던 귀족의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니까요.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6귀족은 상당히 그 형태가 변했습니다."

"그 혹시 모건씨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제 나이가 궁금하신가보군요? 저는 올해로 일흔 둘이군요."

놀랐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정하다 못해 4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동안이시네요."

"꾸준히 운동하고 자기관리를 하다보니까 이렇게 되더군요.

하하, 역시 이걸로는 아무래도 설명이 조금 부족하겠군요.

실은 마흔이 조금 넘었을 때 선물로 받은 음료수를 마시고 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음료수요?"

"네, 어쩌다보니 일로 만난 분이 주셨지요.

덕분에 정정합니다. 어찌 하루하루 늙어가는게 체감이 되는데

외관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흥미로운 키를 가진 것은 이 남자가 아닐까 싶다.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이해를 하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 역시도 아직도 잘 모르겠으니까요.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드릴 수 없는 점은 죄송합니다만

저도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뭐라고 답해드리기가 어렵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 브리깃은 사후에 재평가된 예술가입니다.

그 작품의 상당수가 기구한 사연이 엮여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죠.

그중 제일이었던 작품은 임종 직전에 남겼던 자화상과 모친을 그린 그림이겠군요.

매년 이 맘때만 되면 미술관에서 이벤트를 하니까 꽤 볼만 하실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내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썰었다.

부드러운 속살이 잘리면 나는 그걸 입으로 옮겨 넣었다.

확실히 부드러웠지만 씹는 맛이 좋았다.

조류라는 걸 몰랐으면 정말 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입에 좀 맞으시나요?"

모건이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 관자도 맛있으니까 썰어서 소스에 찍어드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소스 종지를 내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흔들릴 정도로 말랑말랑해 보이는 관자는 입에 닿으면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산뜻한 맛에 부드러운 소스가 어우러져 전혀 질기지 않았다.

같이 나온 새우는 과장을 조금 섞어 팔뚝만한 새우였는데,

머리를 떼고 그대로 그을릴 정도로 그릴에 구워서 간을 하고 그 위에 버터와 시즈닝을 얹어

살짝 녹인 것 같았다. 과하지 않게 시즈닝이 되어 짭조름하고 부드러우면서

탱글탱글한 새우살에서 육즙이 좌르르 흘러내린다.

과연 이정도라면 6귀족이 자주 찾았다고 해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모건씨, 왜 6귀족은 별도의 이름이나 호칭 대신 6귀족이라고 하는거죠?"

모건은 잠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말했다.

"원래 엠페레스가 처음 6귀족을 선발하던 때 까지만 해도 전원 공작이 아니었으니까요.

상인이었다가 섞여들어온 남작도 있었고, 전시 중에 왕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백작에서 6귀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공장과 회사를 운영하던 사업가도 있었습니다. 귀족 작위를 그때 처음 받아 백작이 되었던 사람이죠.

그러니까 6귀족이라는 이름은, 구성원의 작위가 다르고 이들이 서로 무언가 이름으로 속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기에

왕이 임의로 귀족이라고 부르던 것입니다."

"까다롭네요."

"유치한 사람들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매시키나 알 볶음과 매시키나 튀김이 나왔다.

따끈따끈한 알 볶음은 주변에서 나는 붉은 콩과 알싸한 맛을 내는 세이버리를

루와 함께 볶아 특유의 플랫브래드와 함께 나왔는데,

같이 주문했던 매시키나 튀김에 찍어먹으면 맛이 상당했다.

튀김은 황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튀김옷의 물결무늬는 바삭바삭한 식감을 자랑했다.

곁들여 나온 알싸하고 달달한 꿀 소스도 좋았다.

"정말 이 맛에 한번 빠지면 이 집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드먼드도 여길 좋아했겠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튀김위에 알 볶음을 얹은 후에 소스에 푹 찍어 입으로 넣었다.

바삭바삭한 소리가 상당했다.

나도 그를 따라서 튀김을 볶음과 함께 먹었다.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바스러지는 튀김옷 사이로 뜨거운 기름과 육즙이 흘러나왔다.

고소한 기름이 볶음과 어우러지면서 살짝 매콤한 맛이 돋보였다.

매시키나의 알은 반숙으로 익어 고소하게 터져 입안에서 섞여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입천장이 데는 느낌이 들었지만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은 고소한 맛이었다.

씹을 때마다 바샥바샥하는 소리가 입을 가득 메운다.

겨우 목 너머로 삼키고 나서 뜨거워진 입에 시원한 와인을 쏟아붓는다.

"어때요, 맛있죠?"

"이럴때 뭐라고 해야 했죠..? 이런 맛있는걸 엠페레스 사람들만 먹었다고요?"

"엠페레스 대표 음식이죠."

"정말 맛있네요."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일단 마저 드시고 계속 이야기 해볼까요?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엠페레스 안내를 좀 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저야 감사한데, 그렇게까지 해주셔도 되나요?"

"저야 미리타엔의 무령님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기 싫은 것 뿐입니다.

외교적이라는 대의명분을 따져물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기삿거리라도 나올지 모르니까요.

물론 저는 신문기사로 없던 사실이나 악의적인 내용은 싣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것부터 마저 먹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매시키나 스테이크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었다.

이런 맛이라면 다음에 기회가 될 때 플로라와 게비디에게도 먹여주고 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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