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카페 베어핏
* * *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게 대체 다 뭔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고, 분명히 신경쓰지 말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나서 저 많은 케이크가 있고, 넬리스씨는 무릎을 꿇고 있고...
오히려 이럴 수도 있겠다고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더 부담스러웠다.
"저기 모건씨...?"
"네."
"분명히 신경 안쓴다고 한 것 같은데 이러시면 제가 너무 부담스러워져요.
대체 이 많은걸 언제 다 준비하신거에요. 화장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의 사죄입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게 있으시면 말만 하시죠."
"아니 정말 없었는데요..."
착잡함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일단 무릎을 꿇은 넬리스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정말 신경 안써요. 여기 무령 지위를 달고 온 것도 아니고요. 관광 목적으로 온 거에요.
일어나세요... 저도 제가 어려보이는거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그제서야 넬리스는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서 모건에게 따진다.
"뭐야, 신경 안쓰신다잖아요."
모건은 착잡한 것 처럼 가만히 나와 넬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에리아씨가 너그러우신거지 결코 네가 잘한게 아니잖아 넬리스."
넬리스는 나를 다시 바라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를 한 후에 내게 되묻는다.
"그렇게 도저히 안보이는데 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시기에 그러세요?"
나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웃고 질문을 흘렸다.
그리고 대신 짧게 덧붙였다.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많지도 않아요."
내 말에 모건이 경악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괜히 헛기침을 하고
괜히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인다.
넬리스는 그런 모건을 슥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일단 저 케이크는 편하게 드세요. 제가 잘못한 것도 있는 거니까요.
커피값은 어차피 저 할아버지가 낸다면서요?"
"네, 그렇긴 해요."
내가 수긍하면 모건은 끄응 하는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주머니를 뒤적인다.
지갑에서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뒤적이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넬리스에게 묻는다.
"넬리스, 내가 지금 돈이 그렇게 많지가 않은데..."
"그건 제 책임이 아니잖아요? 케이크를 이렇게 주문해놓고 이제와서요?"
"하... 대외비로 빼야겠구만..."
"또 또 회삿돈 쓰는 것 좀 봐!"
"어허...! 이건 귀빈 응대로 나간 돈이니까 괜찮아."
어떻게든 그러려니 하는 변명을 던지는 모건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금화를 여럿 꺼내 내밀었다.
"이정도면 계산이 될까요?"
넬리스는 거절하는 기색도 없이 내 손에서 금화를 채갔다.
"어머~ 충분하죠. 역시 씀씀이가 크시네요!"
이 빵쪼가리가 그정도의 값어치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은 넘기기로 했다.
내 행동을 보고 놀란 것으로 보이는 모건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조용히 지폐를 다시 지갑으로 구겨넣는다.
상황이 정리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모건은 내게 꽤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숨을 푹 쉬고는 잠시 다녀오겠다고 카페를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넬리스와 둘이 남았다.
"카페 분위기가 상당히 좋네요."
"그렇죠? 엄마가 만든 카페에요. 에드먼드 브리깃과
시그릿 플뤼네가 종종 찾았던 걸로 유명하죠."
"시그릿 플뤼네요?"
"네, 6귀족의 일원이었죠. 46년 전에 숙청당한 귀족이기도 하고요.
사후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상당히 골초였다는 것 같아요.
엄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같고요.
왠지 자주 찾아오는 바람에 상당히 골치아프다고 하셨어요."
"자주 찾아오는데 골치아픈 고위직 정치인... 알만하네요."
"자세한건 모건에게 물어보세요. 모건이 젊었을때 자주 마주쳤다고 하니까요."
"그것도 흥미롭네요. 그래도 카페는 그만두기 어려운 장점이 있잖아요?
카페 운영하시면서 불만이나 힘든 점은 없으시고요?"
"카페를 운영하는건 참 좋아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새로운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일이 설레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보다 잘 맞네요. 저도 그래서 카페를 했었답니다.
지금은 상담소를 운영중이지만 정작 제가 관리하는 건 손에 꼽네요."
"어머, 카페를 하셨다고요? 궁금한데 주방이 있으니까 한번 아무거나 내려주시면 안되나요?"
그녀는 들떠서 내 손을 꼬옥 부여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이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어... 이거 어떻게 쓰는거에요?"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앞에는 기계가 있었는데, 고급 로스팅 머신이었다.
아무리 기계가 고급이어도 내가 쓰는 법을 모르니까 그냥 고철덩이일 뿐이었다.
"네? 머신 못 쓰세요?"
"네, 잠시만요, 도구는 다 있거든요. 지금 꺼낼게요."
내가 가방에서 도구를 하나하나 꺼내는 것을 보면서 그녀도 경악하는 것 같았다.
내가 꺼내는 도구를 신기한 눈빛으로 하나 하나 만져보면서 '호오' 하는 소릴 낸다.
도구를 다 꺼내놓고 나서 볶아둔 콩을 갈아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면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내게 말한다.
"이런 도구를 써서 커피를 내리면 확실히 특별하긴 하겠네요.
그런데 그러면 손님들 주문에 맞출 수 있어요?"
"가게 규모가 워낙에 작아서 괜찮았어요. 손님은 예상보다 너무 많아서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이 속도에 맞춰주던데요. 돈이 필요해서 장사를 했던게 아니라서."
"그거 되게 낭만적인 말이네요."
커피를 내리는걸 가만히 구경하던 그녀는 내가 커피를 내리자마자 받아들고
커피 향을 맡았다.
"와, 혹시 취직하실 생각 없으세요?"
"외국에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네요.
제 가게도 있거든요."
"아쉽네요. 정말 맛있는데."
"그리고 본인이 말했잖아요? 이래서는 손님들 주문 못 따라간다고."
"그건 제가 하면 되는데요? 언니는 그냥 나 마실것만 해주면 되는데.
아, 언니라고 불렀네? 그래도 되죠?"
"네, 편하게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있을때 어딘가에서 삑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을 팍 구기며 넬리스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무슨 시간인데요?"
"가게 오픈이요. 오후 타임이거든요. 쉬었으니까 다시 일 해야죠.
사실 오늘치 수입은 다 땡기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내가 준 금화를 반짝반짝하게 들어보인다.
반성을 하게 되었다.
금을 이렇게 시중에 풀면 결국 유통가가 낮아질텐데 너무 생각없이 금화를 뿌린 것 같다.
가벼운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내 짐을 주섬주섬 챙겨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게요?"
"이제 가봐야죠. 영업하실텐데."
"삼촌 올 때 까지만 앉아있어요 언니, 할 것도 없잖아요?"
"삼촌이요?"
"모건 말이에요."
"할아버지라고 부르더니 왜 삼촌이라고...?"
"그거야 놀리는거죠. 사실은 정말 삼촌같은 존재에요.
정말 우리 엄마 좋아했던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나중에 꼭 알아낼거에요. 과연 저 사람이 좋아했던 여자가 누굴지.
근데 어째 반쯤은 이미 아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넬리스는 쿡쿡 웃었다.
장사준비를 마치고 가게 앞 팻말을 OPEN으로 돌려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젊은 목소리 하나가 가게에 찾아온다.
"이 가게는 왜 맨날 지 꼴릴때 열어? 아주 손님을 좆으로 보고 말이야.
하여튼 커피는 모두에게 평등한데 카페는 마음에 드는 데가 없어."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익숙한 반다나가 보인다.
"해피...?"
"어... 너...?"
아마 당황하기로는 서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 둘의 얼굴을 차분히 번갈아 바라보던 넬리스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둘이 아는 사이에요?"
"아하하... 어쩌다보니까요?"
내 대답에 그녀는 캐스빅을 바라보고 싸늘하게 말했다.
"질리지도 않고 오네. 대충 앉아. 또 그거지?"
"알면서 물어봐?"
캐스빅은 적당히 자리에 걸쳐앉아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 넬리스는 커피를 내리고 그 앞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콩 볶은 물이 뭘 좋다고 허구한날 먹으러 오면서 그렇게 지랄을 해?
싫으면 오질 말지."
"누가 콩 볶은 물 마시고 싶대? 케이크나 가져와."
"없어. 가게에 있던 케이크는 전부 나갔거든. 그거나 쳐먹고 꺼져."
상당히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콜린에서 경비를 서야 할 사람이 왜 엠페레스에 있는지는 둘째치고,
나는 우선 그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해피."
"해피 아니라니까!"
"그건 그렇고, 왜 여기까지 온 거에요? 콜린에서 경비를 서야 하는것 아니에요?"
"그거야 잘렸지 뭐. 너 그날 이후로 콜린 가본 적 없구나?"
그는 투덜대며 내게 쏘아댔다.
"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너 때문이잖아. 좀 조용히 도망가던가 하지 그렇게 야밤에 지랄 발광을 하면서 도망가니까
경비병이고 사람들이고 우르르 몰렸잖아. 거기서 올리브가 그렇게 됐는데 정부에서 파견이 안오고 배겨?
당연히 딴 짓 하다가 얼굴 한번 안 비쳤으니 잘리는게 당연하지 않겠어? 덕분에 모험가로 전직했어.
사고는 거하게 쳐놓고 순수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쳐다보지 말아줄래?
증말 답답하고 짜증나니까."
"저 지금 말씀하시는걸 보니까 좀 고소해질 것 같네요."
"고소? 고오소오? 야 너 내가 고소할거야. 가만 있어 진짜!"
그가 씩씩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리에서 케이크를 건네주었다.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였다.
"하아... 그래, 고소는 취하할게. 땡큐."
캐스빅은 그렇게 말하고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입에 넣은 후에 오물오물 입을 움직인다.
참 쥐방울만한게 까칠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왜 여기 계시는 거에요?"
내 말에 옆에 있던 넬리스도 거들었다.
"그러게? 엠페레스는 모험가들에게 그닥 우호적인 국가도 아닌데?
차라리 교국이 더 좋지 않아? 여기서 얼마 안걸려. 교국으로 가서 활동하는게
실적 쌓기에도 더 좋을텐데? 여기는 모험가라는 직업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야생동물이나 변종이 나오는 곳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 캐스빅은 오히려 따져묻는다.
"아 뭐! 불만 있어? 내가 여기 있겠다는데 왜 너희가 지랄이야?"
"이 쪼그만 게 입만 험해가지고는."
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캐스빅의 머리를 꾸욱 누른다.
캐스빅의 머리가 휘청이면 넬리스는 그런 그를 보며 한마디 더 한다.
"여자 힘으로도 휘청이면서 무슨 모험가를 하겠다고."
캐스빅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게 화를 참는 것 같았다.
이걸 참네.
구경하고 있다 보니까 입이 심심해서 케이크를 또 하나 떠 먹었다.
이번에는 오렌지가 들어간 것 같았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퍼진다.
부드러운 사이에서 톡톡 튀는 과육이 좋았다.
그리고 그때 모건이 돌아왔다.
그는 한 손에 작은 반지를 들고 돌아왔는데, 큐빅으로 보이는 보석이 붙어있고,
거기에는 작은 새가 그려져 있었다.
"가시죠. 소개해드릴 곳이 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모건의 말에 나는 케이크를 한입 더 먹으면서 말했다.
"사주신건 다 먹고 가야죠. 너무 성급하게 나갈 필요도 없잖아요?"
내 말에 그는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준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이미 원죄의 반지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편에 끼웠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모건에게 반지의 의미를 물었다.
"그래서 이 반지가 뭔데요?"
"엠페레스에서 귀빈에게 지급되는 반지입니다.
어딜 가시더라도 그 반지를 보여주시면
홀대받거나 차별대우 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죠."
"디자인이 예쁘네요."
"원래 6귀족에게 하사되는 반지의 디자인을 차용한 겁니다.
그 동물과 보석의 색으로 구별하곤 하죠."
"그 6귀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듣고 싶어졌어요."
"그건 나가서 설명드리죠."
나는 그 말에 분주히 떠먹던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 후에
남은 케이크들을 캐스빅의 앞으로 몰아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내가 살게요."
"야, 먹던걸...! 야!"
나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뒤돌아 가게를 나왔다.
뒤에서 발끈한 캐스빅과 킥킥대는 넬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건은 가게를 나오자 마자 내게 물었다.
"실례했습니다. 저 남자는 이제껏 엮여서 좋았던 적이 없어서 일단 자리를 옮기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6귀족이라고요?"
"네. 듣자하니 시그릿 플뤼네라는 귀족을 아신다고 하던데요."
"하아..."
그는 말을 꺼내자마자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주름이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말만 걸면 10년씩 늙어가는게 보인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도 알건 알아야겠어.
오늘은 좀 많이 피곤한 하루겠지만 동참해주셔야겠네요 모건.
나는 그의 한숨에 적적한 응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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