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44화 (144/303)

〈 144화 〉 허울 위의 성

* * *

모건은 지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정말 오늘 휴가를 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골치아파졌을지 상상도 되지않는군요.

정말 요 몇달간 겪을 맘고생을 오늘 다 하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입니다."

"뭘 벌써 그러세요, 아직 만난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더 지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작은 건물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략 4층에서 5층 정도 되어보이는 크기의 낮은 건물 외벽에는

널스페이지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들어오시죠."

그가 작은 열쇠로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였다.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따라 올라간 작은 사무실에서 그는 작은 책상 앞 의자를 내어주며 말했다.

"여기저기를 더 보여드리고 싶기야 하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으니

천천히 한번 이야기 해 보지요.

분명 6귀족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셨다고 하셨으니까...

일단 제가 아는 시그릿 플뤼네 부터 해 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먼지쌓인 선반의 자료를 뒤적이며 날짜가 빼곡히 적힌 파일을 찾다가

마침내 푸른 색으로 칠해진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게 6귀족의 기록입니다. 원하시는 정보가 있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우선은 시그릿 플뤼네에 대해 아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모건은 내게 서류를 건네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 사람은 상당히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이제와서 고인을 욕하는 것 같아서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만, 한 평생 독신으로 산 데도 이유가 있겠죠.

종종 호위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베어핏 카페에 들러서는 시가를 물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저와 넬라 누님을 모욕하고는 했었죠. 돈이라면 무엇이든 다 되는 줄 알고 있었던

전형적인 책으로 세상을 배운 귀족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지위를 들으면 우리가 자신을 떠받들 것이라 생각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을 만났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지위를 배제하고 나면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처세술은 상당히 부족했다고 평할 수 있겠군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걸 깨닫기까지도 상당히 오래 걸렸고요."

"그럼 그 이전까지는요?"

"왜 매번 찾아와서 진상을 피우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설마 악의가 없었을 거라고는 몰랐죠.

그래서 저도 그 당시에는 상당히 젊었었던지라 꽤나 과격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고요. 그건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그랬습니다.

적어도 이야기를 나누고 풀 수 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싶기야 하지만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서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가 준 서류를 펼쳐보았다.

시그릿 플뤼네의 이름 옆에는 여우로 보이는 개과 동물이 그려져있었다.

"이건 여우인가요?"

"네, 플뤼네 가문은 여우를 문장으로 사용하는 가문이었으니까요.

다른 가문들도 그에 맞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슴이나 코끼리, 독수리와 뱀 같은."

"아마 뱀이 에네도르였죠? 들은 기억이 있어서요."

"네. 그렇습니다. 현재는 그 여섯 가문도 달라져 있습니다.

과거 사슴의 문양은 브리깃을, 여우의 문양은 플뤼네를, 독수리의 문양은 에그니아를,

코끼리가 겔데어스 가문, 악어의 문양은 반 가문, 마지막으로 뱀이 에네도르를 상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에그니아, 반 가문만이 6귀족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고, 다른 가문은 멸족하거나

그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남은 네자리는 공석입니다. 그래서 현재 쓰이는건 독수리와 악어뿐이죠.

형식상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날 귀족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보는게 더 자연스럽겠지요.

에그니아는 상당히 과격하고 진보적인 세력이고, 반 가문은 보수적이고 정통을 중시하는 세력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로 흔히 줄을 선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세력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에그니아는 선대 가주였던 놀란드 에그니아 사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여

놀란드 에그니아 2세로 정권을 잡았고 반 가문은 그레고리 반 데어믹스의 차녀, 제인 반 데어믹스가 가주입니다.

즉, 이전과 지금의 6귀족은 엄연히 다른 존재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시그릿 플뤼네 공작은 그럼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면 되나요?"

"그렇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회를 잘 몰랐던 사람이기에

분위기의 흐름이나 정치권에서의 폭탄돌리기의 희생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기사에 실을 수는 없었지만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고요.

분명 당시에는 이 국가의 교육 체제를 정리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칭송받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이 나라의 교육 체계부터 시작해서, 책과 출간, 각종 정보의 기록을 잠당했던 사람이니 만큼

머리 하나만큼은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재수가 없고 눈치가 부족해서 그렇지."

"상당히 직설적이시네요."

"이런걸 돌려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노트를 꺼내 페이지를 몇 장 넘기더니 말했다.

"아마 도서관에도 많은 투자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설립부터, 기부금이며 지원금이며 교육 목적으로 그쪽으로 빠지는 자금이 많았다고 나오거든요.

어쩌면 정말로 순수하게 교육의 기틀을 잡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 점점 더 모르겠어요."

"그게 정상입니다. 이후로는 종종 왕성에 얼굴을 비추고 6귀족으로 활동함 이상의

무언가 특출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나는 그가 내게 넘겨준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그렇게 보면 정말 신기한 나라라고 생각이 드네요.

국가가 어떻게 생긴건지도 정확히 모르고, 건국 이래로 남아있는 용도 모를 벽에,

귀족을 모아 구성한 정치체제는 붕괴했는데도 공석으로 내버려두고,

남은 세력은 둘로 나눠서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정치의 빈자리를 예술로 대체하는 중이다...?

제가 이해한 내용이 맞나요 지금..?"

"뭔가 상당히 꼬여있는 느낌이지만 현상만 보면 맞습니다."

분명히 이야기만 들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엠페레스라는 나라는 분명히 이름만 두고 보면 왕권이 상당히 강할 것 같은 국가임에도

왕이 어디서 넘어와서 어떤 방식으로 건국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무하다.

게다가 초대 왕이었던 남자는 베델그 엠페레스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젤데리스에서 넘어온 베델그라고 하면 당시 공작을 맡았던 베델그 게멘데르 공작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산에 틀어박혀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 이리야스 산맥을 넘어

아라카스트로 넘어가는 공작의 이름을 잊을 사람은 아니었다.

왜 중간에 엠페레스로 개명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

여하튼 그는 젤데리스를 떠나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이후 젤데리스는 현재의 유레크로스가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유레크로스에서 떨어져나온 국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다시 성벽을 떠올렸다.

그 성벽은 분명 단순히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무언가로부터 엠페레스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기상으로 엠페레스의 건국 당시에는 젤데리스가 엠페레스를 위협할 만한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도리어 엠페레스로 망명한 베델그가 젤데리스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젤데리스는 위협은 커녕 발판으로서 좋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델그는 엠페레스에 성벽을 쌓기를 택했고,

젤데리스는 그렇게 연명하여 유레크로스가 되었다.

과연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그 길목을 틀어막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6귀족은 각자 왕이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가문으로 이어져 온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두고 왕을 보필하도록 한 것이다.

분명 모건이 내게 건네준 자료에는 그렇게 나와있다.

꼼꼼하게 밑줄도 쳐 두고 각주도 달아두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초대 에그니아의 가주는 미리타엔의 소속이었고,

우연히 자연공원의 사냥중에 생명의 위기에서 왕을 구출한 것으로 나와있다.

확실히 다른 귀족들과 그 계를 달리하고 있었다.

정치, 교육, 법체계, 자본, 외교 및 대외활동을 맡은 각 가문과 달리 에그니아는

그 시작이 왕의 생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내 예상은 그렇다. 왕은 무언가를 두려워 하고 있었고, 그 왕을 위협하는 모종의 요소를

에그니아가 막아냈다. 그로 인해서 왕이 에그니아를 중직에 앉힌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또 생긴다. 과연 왕의 군대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그 위험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왕은 병사를 대동하고 다니기 마련이다. 그게 자연스럽다.

혹은 왕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무방비하게 습격을 당했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망국을 떠나 새로운 개척지로 와서 국가를 세우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성벽을 쌓을까?

그런 판단력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분명 왕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의 생명을 무언가가 노린 것이다. 병사들로는 막아내기 벅찬 정도의.

그게 과연... 뭘까....?

"잘 모르겠네..."

내가 서류를 덮으며 그렇게 말하면 모건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히 이해가 될 내용도 아니기는 합니다.

워낙에 사료가 적어서 제대로 조사하지도 못하고 있는 시점이니까요.

그 자료는 제가 엠페레스 전역을 돌며 찾아낸 정보를 취합한 것입니다.

만약 엠페레스의 역사에 관해 서술된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거기 나와있지 않다면 최근 3년안에 나온 자료라는 이야기겠죠."

"젤데리스에 분명히 그 시작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과거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이제와서 젤데리스가 엠페레스를 바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엠페레스의 의문점은 여기 있는 동안 해결하고 싶어서요."

모건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역시 듣던대로 호기심의 해결에는 적극적이시군요."

"그러네요. 하하... 케이크를 든든히 먹어두길 잘한 것 같아요. 벌써 당이 떨어지는 걸 보니."

"그렇습니까, 다음번에는 정말 제가 사겠습니다.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가시죠.

아까와 같은 실수도 없을 거라 자부합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왜 왕이 단 두 명의 귀족만을 남겼는가. 정치 외교를 담당하는 반 가문과

강한 군대의 에그니아 가문을 남겼다는 것은

다시말해, 이제는 교육이나 법 체계를 더 정비하는 것보다는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 더 상책이라고 느껴져서 필요 없는 이들을 쳐낸건가?

이제와서? 대체 왜?

살짝 머리를 식힐 겸 나는 가볍게 손을 튕겨 마력을 쏘았다.

마력회로를 살짝 움직여서 몸을 풀어준 것이다.

날린 마력은 예쁜 빛으로 반짝이며 틱틱대더니

방 가운데서 팟 하고 터져 반짝이는 마력을 하늘하늘 흘리며 퍼졌다.

마치 방 안에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됐어요."

그 말에 머쓱한 듯 모건이 반짝이는 마력가루를 손으로 받으며 묻는다.

"아쉽군요.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이 반짝이는건 대체...?"

"그냥 머리가 아파서 예쁜게 좀 보고 싶어서요."

아무 생각 없이 쏜 마력에는 생명의 힘이 담겨 닿는 것 만으로도 따스하고 포근해졌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한번 더 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방금 한번으로 두통은 이제 좀 괜찮아졌는데요."

"꼭 같은 이유로 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나는 다시 손가락을 튕겨 마력을 쏘아주었다.

다시 불꽃놀이처럼 타닥대며 피어오른 마력은 또 한번 픽 하고 터져

마력가루를 사방에 흩뿌렸다.

"꼭 같은 이유일 필요는 없다... 그런가?!"

생각이 변했다.

그 위험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졌다고 한다면?

만약 현왕이 그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다른 이유로 귀족을 쳐낸 거라면?

6귀족의 위임과 숙청이 별개의 이유로 일어난 다른 사건일 수도 있는 거였다.

"또 뭔가 깨달으신 모양이군요?"

"네, 고마워요. 잠시 집중 좀 할게요."

"그러시죠. 전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모건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딱 보기에도 편안해보이는 자리로 가서

푹신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에 몸을 뉘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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