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휴식과 신
* * *
내가 한참을 고민하다 서류를 덮으면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한 모건도 일어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 자료는 다 보셨습니까?"
"네. 고마워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은 많지만요."
모건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무 피곤하게 지내신 것 아닌가요?
이왕 오신김에 좀 푹 쉬다 가시죠. 엠페레스만큼 쉬기 좋은 곳도 잘 없으니까요."
"그러게요. 요즘 도통 쉬질 못해서 자꾸 이런 쪽으로 빠지려나봐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가방에서 부적을 한 장 꺼냈다.
부적에 직접 마법진을 그리고 나서 그걸 방문에 붙였다.
마법진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화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문을 열면 문 반대편의 풍경은 널스페이지의 사무실이 아니라
미리타엔의 작은 상담소와 이어져있었다.
"고마워요 모건, 덕분에 잘 놀다 가는 것 같아요. 잠시 쉬다가 돌아올게요."
그는 벙 찐 표정으로 나와 문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 반대쪽에서는 발레리아가 무슨 일이냐는 듯 모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건은 어버버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쉬다... 오시죠..."
나는 멍청한 얼굴로 선 모건을 뒤로 하고 상담소로 건너가 문을 닫았다.
발레리아는 이제 내 등장에 당황조차 하지 않고 빠르게 차를 내 왔다.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쉬러 왔어. 내 가게니까."
"아, 그러시면 여기서 쉬고 계시지요.
무령님 앞으로 온 편지는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책상 두번째 서랍에 두었으니 확인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고마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 들고 소파에 누웠다.
발레리아는 내가 눕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소파에 누워서 편지를 하나씩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내게 온 편지는 약 5일 정도 전에 온 것이었다.
[에리아양, 소식은 들었소. 잘 지내는지 궁금하군. 아돌퍼스요.
나는 대장간을 나와 메카닉으로 활동하고 있소.
처음에는 회로파 기술자가 어딜 가서 뭘 먹고 살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이 있더군. 직접 찾아 만나고 싶었지만 가게에 없는 듯 하여
편지로 대체하는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네. 나는 교국으로 갈 생각이네.
교국에서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그때 다시 만나세.]
아돌퍼스로부터 온 편지는 왠지 나를 욱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날 싫어한다고 여겼던 그 대장간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로 느껴져서
왠지 더 먹먹해졌다.
그렇게 다음 편지를 읽어보면 상당히 고급 종이에 고풍스러운 붉은 색 실링 왁스가 칠해져
그 위에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열면 그 안에는 초대장과 함께 편지가 들어있었다.
[무령 에리아 귀하.
삼가 인사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로 안부를 대체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는 미리타엔의 대공 엔시온 플라이트라 하옵니다.
다름이 아니라 무령께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함을 사죄하고 자그만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초대장을 동봉하였사오니 언제든 편하신 때에 플라이트 저택을 찾아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대공 엔시온 플라이트.]
나는 이 편지도 잘 접어 안의 초대장을 따로 뺀 후에 옆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발레리아를 불렀다.
"발레리아, 혹시 펜이랑 종이 좀 가져다줄래?"
"네 여기 있습니다."
발레리아는 마치 미리 준비해뒀던 것처럼 칼같이 빠르고 정확하게 펜과 종이를 대령했다.
대체 킬레리들은 어떤 훈련을 받기에 이 정도로 신속 명확 정확한 걸까.
"고...마워... 혹시 미리 대기중이던건 아니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가게 물건의 배치는 전적으로 다 암기하고 있습니다."
"너도 한번 본건 잊어먹지 않는 편이야?"
"그런건 아닙니다만,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그래...? 상담소 일은?"
"방금 한명의 고민을 또 해결해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차분하게 그렇게 말했다.
사람의 고민을 해결해준 시간이 점차 늘어나서 그런지
왠지 이전의 그녀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괜히 한번 떠보는 식으로 물어봤다.
"너, 혹시 상담소 일을 하지 않는다면 뭘 하고 싶어?"
"음... 잘은 모르겠지만 무령님과 함께 여행이라도 하고 싶군요.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무령님께서 옆에서 명령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너 변했구나...?"
"아, 실례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바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자결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냐.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 같아서 좋다는 의미였어."
"그렇...습니까...?"
이전 같았더라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거나, 혹은 그런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했을 그녀가
이제 명분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스스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도구에서, 노예로서의 킬레리에서 인간 발레리아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괜히 그런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적당히 상대하고 오늘은 가게 일찍 닫자. 잠깐 편지 더 읽고 있을게.
가게 마감해줄래?"
"혹시 대기중인 인원의 고민상담까지만 추가로 처리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해."
"허가 감사드립니다. 지금 대기중인 인원까지만 금방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녀는 변했다. 분명하게. 대기 인원을 상대하기 위해 떠나는 그녀의 입꼬리 역시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뿌듯하게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음 편지를 꺼내들었다.
고급스러운 편지지인 것은 같았지만 실링왁스의 색과 문양이 달랐다.
마찬가지로 안에 초대장이 동봉되어 있었고, 내용도 엔시온의 것과 같았다.
어째 필체도 그렇고 느낌도 그래 보이는게
엔시온의 선방을 보고 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보낸 것 같았다.
당연히 보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데레코즈였다.
그렇게 다음 편지를 보면 이번에는 검은 편지지에 금빛 실링왁스에
엄지손가락 지문으로 보이는 두꺼운 손자국이 찍혀있다.
열어보고 나서 알았다. 게비디였다.
[무령님 그간 안녕하셨길 바랍니다.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미리타엔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워져 이렇게 편지 보냅니다.
무령께서 여행을 다니시던 동안 제가 대공이 되었습니다.
플로라 황제께서...ㄷ]
그 뒤로는 휘갈겨쓴 것 같이 알아볼 수 없었다.
시기를 보아하니 좀 지난 것 같은데 아마 이 편지를 쓰다가 내 소식을 들은거겠지.
편지를 읽다가 피식피식 웃었다. 누가 봤다면 되게 이상해보였을 테지만 어차피 여기는 나뿐이다.
아직 편지가 두편 더 있었다.
그래도 읽어보기로 한거 다 읽어보기로 했다.
상당히 최근에 온 것으로 보이는 편지는 글 없이 붉은 편지 카드만 있었다.
내가 그걸 손에 집어들면 내 마력에 반응한 것인지 붉은 카드의 가운데서
하얗게 글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곧 널 찾아갈거야.]
단 한줄이었다.
그래도 나는 누가 이 편지를 쓴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에스트로가 경고의 의미로 내게 보낸 편지였다.
덕분에 나는 잠낀 느낀 평화가 깨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드는 내가 읽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점점 희게 변하더니 결국 백지카드가 되었다.
머리를 짚고 마지막 편지지를 열었다.
어쩌면 제일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흰 편지봉투에 흰 편지지.
정석적으로 우체국을 통해 온 편지였다.
내가 편지를 열었을 때 그곳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짧은 말이 적혀있었다.
[오랜만에 한번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조만간 찾아가죠.]
투덜대면서 편지를 한곳으로 몰아놓았다.
"얘들은 왜 다들 못 만나서 안달이야 진짜."
그렇게 중얼대고 나는 편지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도합 네 통을 썼는데, 데레코즈와 엔시온에게 각각 금방 날을 잡아 찾아가겠다고 적은 후에
한통은 미리타엔 연구소 앞으로 적어서 필요한 재료를 미리 구입하게끔 했다.
그리고 남은 한 통은 플로라 앞으로 썼다.
곧 연구소를 통해 새로운 신약을 개발해서 발표하겠다고 말이다.
발레리아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플로라가 무력으로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을 때
플로라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구소장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연구소 총 책임자의 자리를 넘기지 않은 것은 내가 그 자리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처럼 기한을 정해 매번 신약을 발표할 필요는 없으며
여유가 될 때마다 신약을 내 주는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나에 대한 배려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연구소 직원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나오는 레시피에 혹사당하고 있어서
오히려 공장과 연구소의 가짓수는 늘어나도 생산량이 애매하단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연구소 총 책임자임에도 상당히 느긋하게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편지를 다 적고 나서 소파에 등을 기대면 발레리아가 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고 말했다.
"이거 배송해줘. 받는 사람은 적어뒀는데. 나 위치를 몰라서 말이야."
"어디, 아. 대공가로 보내시는군요. 네 다녀오지요."
"천천히 다녀와. 다녀와서 가볍게 한잔 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포션을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알코올도 보드카도 있었으니까 황홀한 한잔을 준비할 생각이다.
발레리아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도 있었으니까.
나보다 판단력과 지혜는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엠페레스의 일을 물어볼 생각이다.
발레리아는 빠르게 편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혼자 앉아서 잠깐 시간을 떼우고 있으면 그렇게 천국이 없었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에 푹신한 소파에, 주전부리로 집어먹을 패패루 육포도 있었다.
모든게 완벽했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만 없었다면 더 완벽했겠지만.
그제서야 나는 몸을 일으켜 가게 문을 살짝 열었다.
"벌써 왔나?"
당연히 발레리아라고 생각하고 연 문 반대편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발의 남자는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물었다.
"영업 끝나셨나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그의 눈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아르간티아 맞죠?"
"....."
나는 문을 열어 그를 환영했다.
"이젠 기억을 하기 시작하는군요."
"몰라보겠는데 그 아우라는 아무에게서나 나오는게 아니에요."
"아우라... 아우라라... 그렇군요. 참고하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가게 문은 닫은것 같던데 날 불러들인 이유는?"
"내게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마지막 편지는 당신이 보낸거죠?
흰 편지봉투에 편지지를 쓴 우채국에서 보낸 거."
"시스템은 이용하라고 있는 거니까요."
"당신이 신이라고 해서인지 묻고 싶은게 꽤 많은데, 들어줄 수 있어요?"
"어떤게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요."
"술은 좋아해요?"
나는 그의 앞으로 위스키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말 대신 내게 잔을 내밀었다.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나 생각하다가도 금방 나는 그걸 머리에서 지우고
그의 투명한 유리잔에 내 잔을 가볍게 가져다 대 쨍 소리를 냈다.
"건배!"
"건배."
우리가 그렇게 술 첫잔을 마시면서 한마디 대화도 서로 나누지 않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온 발레리아가 문을 열면
그 분위기는 아주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와 술을 마실 생각이었던 것 같은 발레리아는 의아한 눈으로 아르간티아를 바라보다가 내게 묻는다.
"이분은?"
"불청객인데, 어쩌다 보니까 잠깐 대화를 하게 됐어. 금방 끝낼게 먼저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발레리아는 내 소파 옆자리에 앉아 내게 딱 달라붙는다.
그녀가 보기에도 본능적으로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흐음...' 하는 낮은 숨을 뱉고 그는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