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기록 위에 적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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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를 함께 들으면 좋겠지만, 인간이 들어서 좋을게 없을 이야기군요.
죄송하지만 먼저 주무시죠."
아르간티아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간단한 동작에 내 어깨 위로 픽 쓰러지는 발레리아는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잠에 빠졌다.
발레리아가 쓰러지는 걸 보자마자 나는 그를 쏘아봤지만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좀 더 편한 곳에 눕혀 주는게 좋지 않을까요.
한나절은 잘 겁니다. 인체에 무해하니 안심해도 좋고요."
"이제 보는 눈도 없는데 서로 말 놓고 물어보지?"
내 말에 그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말했다.
"그래, 그러지. 오랜만에 봤는데도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나봐.
엘타리스였을 때부터 그랬지. 가끔 걱정도 돼.
그러다 정말 망각의 저주가 언제 다시 떠오를지 모르니까."
"무슨 일로 왔어?"
내가 그렇게 물으면 그는 술이 든 잔을 입에 가져가 한모금 마시고는 태연히 말했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다만 몇가지 말해주고 싶은 것 뿐이니까.
아버지가 널 만나고 싶어하셔. 그리고 데릭이 널 찾고 있어.
에스트로에게서 얼마전에 연락이 들어왔거든."
"데릭..? 아버지..?"
"아직 전부 아는건 아니겠지. 자세한건 그때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여기서 지금 말해줄 수 있는 내용도 얼마 없고.
이미 알겠지만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어. 이제 기록은 기록일 뿐이야.
기록이 곧 모든 것이던 시대는 끝났다고. 이제 인간들은 인간들의 시대를 살아야지.
그래서 말인데, 너도 이제 여행을 마치고 조용히 살면 어때?"
"여행을 마치고 조용히 살다니? 착각하나본데, 너에게는 내가 친구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제 고작 몇번 얼굴을 마주한 낯선 사람일 뿐이야.
말 조심해. 내가 여행을 하는데 끼어들 권리는 없어."
그는 내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네. 그럼 우선 내 이야기를 잠깐 할게.
알다시피 나는 아르간티아였어. 지금은 알, 아간틴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난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았어. 사는데 회의감이 들 정도로 말이야.
그럼에도 내가 죽지 못하고 살아있다는건 분명 무언가의 의미가 있었을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너희 셋을 지켜보는데 남은 시간을 쓰기로 했어."
"셋을 지켜본다고?"
"그래, 남는게 시간이었으니까. 저주를 받은 너와 멜타이트, 그리고...."
"헬브람."
"아, 그런 이름이었나? 미안해. 분명 그게 지금의 에스트로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술을 마셨다.
그 스스로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술잔을 기어이 비우고 나서 그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너는 헬브람이라는 존재를 기억하는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어. 도르테우스의 사원에서 기억을 엿보기 전까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헬브람이라는 존재가 있었던 거겠지.
내 기억속에는 없는 이름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너희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너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어떻게 세계가 변해가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더 이상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 만으로도 인간의 세상에 간섭하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원치 않게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이건 인과에 어긋나는 일이었어.
그래서 그저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거였고. 그런 내게 너희를 찾는 것은 최우선 순위였지.
물론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어. 너와 에스트로는 꾸준히 움직이는데 반해
멜타이트는 그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 멜타이트가 아르간티아와 함께 다르말록에게 대적했던 인물이겠지?"
"그래. 최초의 정령 멜타이트. 정이 죽고 나눠진 존재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엇 하나 이해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새로운 정보들이 물밀듯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팔을 휘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하나씩 해. 이해가 되는게 없잖아. 대체 정이 뭔지부터 시작하자."
"음, 정은 소멸하지 않는 존재야. 이렇게 설명하려니 너무 어렵네.
정령은 알지?"
"대강."
"그럼 그냥 정은 잊어버리고 정령으로 기억해도 돼.
최초의 정령, 정령왕 멜타이트는 소멸도 하지 않고 저주를 받을 수도 없는 존재야.
그래서 다르말록은 그 멜타이트를 무력화해 감금했지. 다르말록이 가진 절반의 기록은
아무리 저주를 받지 않는 멜타이트라도 이기기 어려웠으니까."
"저주를 받지 않는데 무력화를 당했다는게 무슨 의미지?"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법에 의해 체포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법을 지켜야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일까.
기록의 강제력으로 묶어둔거지."
"대체 그 기록이 뭐야? 그게 뭐길래 자꾸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해?"
내 말에 그가 조용히 수긍했다.
"하아... 언젠가는 들려줬어야 할 말이었지. 그래, 말해줄게.
기록은 말 그대로 모든것의 기록이야.
그 어떤 존재도 피해갈 수 없는 모든 존재의 기록이자,
새로운 존재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게 무슨 소리야...?"
"기록에 적힌 것은 무엇이든 그 순간 존재하게 되고,
존재하게 된 것은 기록에 적히지. 심지어 일어난 일과 사건, 행위마저도.
하나의 거대한 사전이라고 보면 돼. 거대한 힘을 담은.
다르말록은 그 기록의 절반을 가지고 있었어.
그 절반의 기록 안에 저주가 있었던거고.
기록에 적힌 '개념' 자체를 우리에게 저주로써 걸어버린거야.
최초의 인간에겐 '불로'와 '불사'를,
최초의 천사에게는 모든 것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망각'을,
최초의 악마에게는 그 영혼이 이 세상에 속박되는 '환생'을.
최초의 정령은 가진 모든 힘을 '탈취'라는 개념으로 빼앗아버렸어.
그리고 그 껍데기를 이 세상 어딘가에 쳐박은거지.
저주가 아니라 힘 자체를 빼앗겨버리니 힘도 기운도
모조리 사라져 느껴지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었고."
즉, 방해가 되는 우리를 외압으로 묶어 구속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도저히 묶어둘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고
그를 구속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무력화 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의아함에 물었다.
"우리에게 저주를 걸 필요가 있었나? 죽이면 되는 이야기일텐데."
"기록이 남은 존재는 죽거나 소멸하지 않아.
기록에 남은 존재를 기록으로 죽일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거야 말로 모순이잖아. 그래서 죽이지 못하는 존재에게 저주를 가한거지."
"그럼 대치상태에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니야?
다르말록은 지금 신도마저 이단으로 취급될 정도로 무력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사람들은 유일신 다르말록이라는 이름 대신
아르간티아 신을 더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그런데 이야기만 들어보면 다르말록은 절대 패배하지 않는 존재라는 이야기같아.
대체 그럼 다르말록이 봉인당한 이유는 뭐야?"
"다르말록에게 없는 다른 반절의 기록에 '봉인'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니까.
다르말록 또한 기록으로 만들어진 존재니까 죽일 수 없어. 그래서 기록으로 봉인해버린거야
서로 결판을 낼 수 없는 존재에게 제약을 걸고 강제로 전쟁을 끝낸거지.
우리는 어떻게든 활동을 하고 있는것 뿐이고, 다르말록은 그러지 못한 것 뿐이야."
"잠깐, 다르말록에게 없는 기록을 사용한 사람이 있다는건,
그럼 남은 기록 절반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
"그 존재는 다르말록에게 패배해 소멸했어. 기록에서 존재가 지워졌지.
그리고 그 기록을 물려받은게 바로 도르테우스야."
소름이 돋았다.
헬브람이라는 존재는 엘타리스라는 존재를 새로 기록하기 위해
대신 존재가 지워지는 것을 선택했고,
다르말록의 저주를 이용해 다른 존재로 환생하면 그 순간부터는
저주에 묶인 것은 헬브람이 아니라 헬브람의 환생체인 존재가 된다.
이때 헬브람을 지웠기 때문에 헬브람은 없었던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르간티아도 헬브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나 역시도 그를 기억하지 못해야 했다.
하지만 헬브람을 지우고 나서도 기록에는 여백이 모자랐고,
엘타리스는 엘라 세리타인을 기록하기 위해서 엘라와 탈린으로 나뉘어졌다.
나는 그렇게 엘타리스가 아닌 엘라 세리타인으로 기록에 남았고,
완전한 엘타리스가 되지 않으면 저주를 피해가게 되었다.
그러나 탈린은 아니었다. 기록에 적히지 않아서 그녀는 그저 반쪽짜리 엘타리스일 뿐이었다.
물고기를 기르던 어항이 깨져 물이 새기 시작할 때,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용기로 물고기를 옮겨 담으려고 보니 용량이 작은 그릇 뿐이었고,
겨우 그릇의 크기만큼은 물을 옮겨 물고기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남은 어항은 비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그릇에 담기 벅찰 정도로 물을 많이 담게 되면
결국 물은 흘러넘칠테고, 물고기도 빠져나가버릴 것이다.
나는 그 작은 그릇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생겼는데, 저주를 불완전하게 피해간 내가
헬브람을 기억한 채로 기록되어버린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억한 채로 기록되어 버렸는데,
이 때문에 기록은 헬브람의 존재할리 없는 정보를 싣게 된다.
정작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내가 진상을 알아내겠다고 설치던 와중에
탈린으로 분리해낸 기억과 힘 모두를 되찾아버리면 다시 내 저주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작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기록에는 남아있던 정보를
도르테우스가 내게 전해준 것이었다.
"맙소사..."
착잡함에 목이 탔다.
나는 술을 들이마셨다.
"건배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성금하게 혼자 다 마시지 마."
"후우... 그래, 건배."
나는 가볍게 그와 잔을 부딫혔다.
그리고 잔을 기울이면 독한 알콜이 혀를 감고 지나간다.
왠지 더 쓰고 뜨거운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마신게 술이 아니라 물이었어도 비슷했을 것 같다.
"이제껏 나를 도와준 이유도 그런 거였어?"
내가 그에게 물으면 그는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별 생각 없었어. 그냥 늘 몇번이나 기억을 리셋당하고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과거의 기록을 찾는 모습을 보니까 도와주고 싶었던것 뿐이야."
"아까 셋을 지켜본다는 말을 했지. 나, 에스트로는 둘 뿐이야.
원죄의 반지는 다섯개 준비되어있어. 너와 네가 아직 찾지 못한 멜타이트를 빼면
네가 관찰하는 마지막 한명은 누구지?"
"아버지야."
"아버지...?"
"남은 기록의 반절을 가진 존재, 도르테우스."
"도르테우스가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이 세상에 접근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지.
아버지는 기록의 절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다르말록의 입장에서도 저주를 어설프게 걸었다가는
다른 절반의 기록에 적힌 개념들로 저주를 파훼해버릴 수 있었어.
그래서 다르말록은 적어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간섭하지 못하도록
이 세계에 발을 붙이지도 못하게 추방했어.
다르말록이 가진 기록에 적혀있거든.
수많은 평행우주와 다차원 공간 사이의 자그마한 우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차원우주의 개념이 존재하는 거였다고...?"
"어딘가에는 또다른 우주가 있을거고, 또다른 세상이 있을거야.
아버지는 그 모든 공간에 계셔. '차원'의 개념을 갖고 계시니까.
그래서 흔히 차원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해. 우리 세계가 존재하는 차원에서 추방당한 거니까.
아버지는 다르말록이 만든 이 세계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존재를 기록해서 다르말록이 소멸시키지 못하게 다른 차원으로 빼내지.
그건 우리가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는 의미야.
이 세계에서 죽는 순간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존재하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모든 존재를 다르말록의 해방을 견제하는 불멸의 군대로 만들었어.
아버지가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는 이상 영원히 존재하는 자들이지.
그게 '네메시스'야."
"그래서 체헤게가...!"
네메시스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까 말한 데릭은 그 네메시스의 최초의 탈주자고,이름은 데릭 브라이어야.
당연히 죽음을 맞이했고, 아버지는 그 자를 네메시스로 부르려고 했어.
기록에는 '인간'은 존재하지만 '개별 이름의 개체로서 구별된 인간'은 없어.
따로 기록해야 그 존재가 보장받는다고 할 수 있지.
기록의 시점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인간은 그저 인간 1, 인간 2에 불과하지.
기록의 '인간'이 각 세계에 태어날 때, 설정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특징을 부여받는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의 이름을 기록하려고 했어.
그리고 데릭은 아버지에게 거짓으로 이름을 댄거지.
데릭 브라이어는 데릭 로드원이라는 가명으로 기록에 이름을 남겼어.
그래서 데릭 브라이어는 기록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는데,
데릭 로드원이라는 인물이 새로 기록에 생겨버린거지.
죽은 존재는 데릭 브라이어였고, 그걸 증명해줄 수단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기록에 이름을 남기자마자 그는 데릭 브라이어가 아니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네메시스의 차원으로 빼내려고 한 '데릭 브라이어'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어.
생명 활동도 멈춰 죽은 인간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버린거지.
부활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부활하고서도 몇 천년을 족히 지냈고,
시간이 지나 생명활동이 멈춘 몸은 썩어서 뼈만 남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지.
그런데 마침 생명의 마력을 가진 누군가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본래의 생명마법을 되찾았어.
그의 입장에서는 존재를 보장받은 자신을 멀쩡한 인간으로 되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난거야.
당연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로드원...이라고?"
"그래. 아버지는 그래서 데릭 로드원, 데릭 브라이어, 데릭 브라이어 로드원을 같은 존재로 정의하셨어.
기록으로 확실히 남았기 때문에 이제 데릭을 잡으면 확실히 네메시스로 끌고 갈 수 있지.
다만 문제는 그 자가 여기 남아있는 동안 뭘 했을지 모른다는거지.
흑마법을 평생 연구했던 사람이니 말이야."
"그럼 혹시 로드원이라는 성은... 그 사람 하나가 다야...?"
"내가 알기로는."
머리가 아득해진다. 만약,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도르테우스에게서 탈출한 로드원이
만약 자녀를 만들었다면... 그래서 그 존재가 도르테우스와 아르간티아를 적대한다면...
그래서 만일 그 자손이 다르말록의 신자로 살았다면... 이어져 내려온 족보 어딘가에는...
분명히...
마녀 사냥꾼 체헤게가 생기게 된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나는 그의 말에 차마 한마디도 잇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