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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48화 (148/303)

〈 148화 〉 변화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

* * *

그 뒤로는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됐다. 지금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겠구나.

그래, 할 말은 했으니까 이제 가볼게. 후우..."

"...."

그렇게 말하고 그는 대번에 술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내 옆에 기대 곤히 잠을 자는 발레리아를 바라보고는 조용히 뒤로 돌아 가게를 나가버렸다.

분명 그가 가게를 나가자 마자 뒤따라갔음에도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또 그렇게 사라져버린 것처럼.

나는 빈 가게에 남아 술잔을 정리했다.

술잔을 정리하고 술병은 원래 위치로 돌려둔 후에 옆에서 자고 있는 발레리아를 들어

방으로 옮겨주고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홀로 거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덜컥 앉아서 한숨을 뱉었다.

착잡한 기분이었다. 이제와서 알게 된 비밀이 너무 무거웠다.

차라리 기억을 다 잃어버리는게 속이 편할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저 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에 무거운 몸이 자꾸 축축 쳐진다.

과연 오기는 할런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이대로 체헤게를 기다리는게 과연 맞는 일인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제 곧 있으면 도르테우스가 내게 찾아온다고 말했으니까.

대체 그가 찾아오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고,

과연 이 차원에 다가오는 것조차 못하는 그가 어떻게 날 찾아오겠다는 건지

다만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였고 결국 옆 방에서 잠을 자는 발레리아를 생각하면

괜히 이 공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당분간은 가게나 하면서 지내야지. 언제까지 발레리아에게 맡겨둘 수도 없으니까.

편하게 지내겠다고 해놓고서 너무 멀리 돌아온 것 같아.

이젠 편하게 지낼 수도 있으면서... 너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겠다. 지쳐 이제..."

뭐라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나도 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분명 시간을 그리 오래 쓰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밖은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전에 거리를 돌아다녔을 때와는 상당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밝고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었음에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조아렸고

골목마다 부대껴사는 노예들은 어느새 내 시선을 피해 깊숙한 골목으로 숨어들어간다.

이제 내게는 일그러진 일상에서 평화를 누리는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정체를 드러내면 어떻게 해서든 부자연스러운 관계로 남게 되었고

정체를 숨기면 그들과 다른 본질적 차이에 못이겨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내가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로서 그들 앞에 존재할 때 비로소 유지되는 이 불완전한 평화는

나를, 어쩌면 나의 목표를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내 어색한 걸음걸이에 흥미를 가지고 다가오던 이들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미리타엔에서라면 조금 편하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리타엔의 평화는 내가 원하던 그 자유롭고 여유로운 평화는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은 이런 시선을 받아들이고 살았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선이 역겹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냥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이 평화가 아주 우울하고 무거웠다.

내가 쟁취해낸 평화라고 받아들여야 했는데도

억지로 떠맡겨진 과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끝에는 아르간티아와 도르테우스가 있었다.

천천히 거리를 걷다보면 익숙한 골목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곳. 연구소의 뒷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은 이전보다 조금 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 먼지를 한군데로 뭉쳐 쓰레기통으로 버렸다.

그리고 머리를 비울 겸 자리에 앉아서 오랜만에 실험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만져본 시모르가루가 부드럽게 손에서 흘러내린다.

물에 잘 개어 이런 저런 재료를 넣고 괜히 섞어본다.

손에 익은 포션부터 하나씩 기억에 따라 만들어본다.

별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정해진 온도로 끓이고 정해진 약물을 추가하고, 정해진 대로 끓이면

정해진 반응을 어김없이 보여주는 그 포션이 묘하게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사회로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가끔은 내가 만드는 이 포션만이 내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괜히 새로운 재료를 집어넣어본다. 주문했던 안티움, 잿불 얼음, 검은 엄지곰의 이빨 간 것.

한참을 씨름해서 내가 만들어낸 포션은 오늘도 실패작이었다.

괴작이라면 괴작일 포션을 괜히 입으로 털어넣은 이유는 그래도 이 포션이 어떤 성능을 보일지가

괜히 제작자 입장에서 궁금했기 때문이다.

입에 닿은 느낌은 짙은 씁쓸함과 어딘지 모를 뜨거움이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비릿한 감상이 썩 달갑지 않았다.

눈앞이 천천히 어두워진다.

나른해진 몸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나는 의자 위에 기대어 몸에 힘을 뺐다.

살은 희게 변색되고 핏줄이 도드라진다.

가만히 기다리면 코피가 주륵 흘러나오고 목에서 케케한 통증이 올라온다.

땀이 삐질 새어나와 뒷덜미를 적시면 그제서야 축축하게 젖은 손을 편다.

언제 그렇게 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 앞에는 이미 한참을 쏟아진 코피가 책상을 적신다.

이거 아까운 피인데.

몇 번인가 느껴본 감각이다. 통증은 무뎌졌고 이제는 감정마저 흐릿해진

이전부터 실험을 하면 늘 따라붙던 감각. 죽음이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죽음은 원하던 것보다 어둡고 많이 아파서

왜 내가 그동안 그렇게 용을 써가며 죽으려고 했는지 회의감도 들었다.

그렇게 몇 백년을 죽겠다고 해놓고서 이제 와서 만든 얄팍한 인연 몇가지 때문에

나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기피하게까지 되어버린 것에

어딘지 모를 스스로에 대한 조소가 느껴진다.

한참을 끙끙 앓고 나서 나는 겨우 눈을 떴다.

내가 눈을 감았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어느새 쓰러졌던 모양이다.

죽음에서 눈을 뜨면 왼쪽 뺨에 말라붙은 피가 검붉은 색으로 떡져있다.

머리칼에 굳어서 떼내기도 피곤해보인다.

"이게 정말 뭐하는 짓이냐..."

포션은 사약으로 분류했다.

연구실에서 그간 꾸준한 수요를 보였던 R­PHC188을 만들어 채워넣었다.

그리고 나는 연구실 개발진들에게 내가 만들 포션의 레시피를 넘겨주고 나서 연구소를 나왔다.

거리를 걷다보면 모르는 얼굴이 내게 말을 건다.

"어이, 밤길은 위험하다."

"너... 누구...?"

"나는 벤이라고 하는데, 너같은 어린 여자가 혼자 다니기에 미리타엔은 위험한 곳이야."

"아, 고마워..."

"어른을 보면 버릇없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벤은 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아프다. 그러나 그 손길에 악의가 아닌 우려가 담겨있다는 점이 왠지 뭉클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왜, 어디 귀족가 따님이신가보지? 옷이 화려하긴 하네."

"어... 그래... 맞아...."

그의 반응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돌려 꾸벅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미리타엔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있는건가? 웃긴 일도 다 있다 싶어서 게비디의 저택을 찾았다.

이런 일은 함께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다.

마녀 혹은 무령, 뭐가 됐건 결국 나는 이 지역에서 유명인사였으니까.

콜로세움 옆 커다란 저택 문을 두드리면 그 안에서 킬레리가 하나 나온다.

"누구십니까."

"응, 에리아라고 하는데. 게비디 안에 있어?"

"마스터께서는 현재 바쁘십니다.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응? 나 무령인데 말만이라도 좀 전해주면 안될까?"

킬레리는 명백히 나를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무령의 증표를 꺼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무령의 뱃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면 킬레리는 주춤 뒤로 물러나고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킬레리가 무령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대충 교육받는 일은 없을텐데.

그녀를 따라 올라가면 무령이 왔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으로 내려온 게비디는

나를 보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말했다.

"누구냐."

"나야 나. 너까지 왜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의아한 얼굴로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무령님께서는 왜 그런 변장을 하셔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그러십니까.

하마터면 사칭으로 오해할 뻔 했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내 질문에 발걸음을 멈추고 킬레리에게 말했다.

"거기 너, 무령님을 모시고 욕실로 가서 시중을 들어드려라.

깨끗하게 씻으시고 난 다음에 반드시 거울을 가져다 드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는 정중하게 내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우선 목욕부터 하고 오시지요.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나는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 욕실로 향하게 되었다.

그가 말한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욕실에 따라가서 옷을 벗자마자 느껴지는 위화감.

이게 내 가슴이 맞나?

원래 평평해서 거슬릴게 없던 가슴에 조금이지만 볼륨이라는게 생겨있었다.

당황한 나는 뒤로 물러서거울을 보았다.

피가 묻은건 그대로지만 길어진 머리는 원래 내 머리보다 더 진하고 빛나는 금발로 변해있었고

키는 조금 더 자랐으며, 무엇보다도 내 몸에 굴곡이라는게 생겨서 이제 정말

17살에서 18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에서 24~25살 정도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살다살다 내 허리가 그렇게 잘록한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변화가 있엇는데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원래 입은 옷을 바라보니 그제서야 허리춤과 골반이 체형에 따라 억지로 늘어나다

결국 실밥이 튿어져 터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에 묻은 피떡을 떼내고 피부결을 쓸어보면서 엉덩이가 더 커졌고 가슴이 더 커졌다는 걸 느끼면

그제서야 뭐가 변한건지 원인을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운다.

"미안한데 킬레리, 나 혼자 씻고 나가도 될까?"

킬레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이러니 내가 무령이라는걸 몰라볼만도 하다.

나 스스로도 낯선 얼굴이니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바디 프로필을 다시 쟀다.

키가 더 커서 167정도가 되었다. 내 스스로 말하기엔 뭐하지만 순박해보이던 얼굴은

어딘가 더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게 원래대로 성장했을때의 내 모습이 아닐까 했다.

물론 그 원인은 여전히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마력은 정상적으로 내 몸을 회전한다.

조금 더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 마력회로도, 내 몸도 어딘가 깔끔하게 맑은 느낌이 든다.

어딘가 자연스럽고 말끔한 감각의 끝에는 내 반지가 있었다.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원죄의 반지가 사라지고, 손가락에 반지의 무늬를 따라

연녹색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면 내 눈동자에도 옅은 연녹색의 불꽃과도 같은것이

아주 조용히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준비된 옷을 받아 입으면서 나는 더 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원인은 그 약이거나 혹은 아르간티아의 이야기를 들은 것 중에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그 원인을 정확히 특정해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고 답답했다.

오히려 변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느낀 것은

이제는 정말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었고, 기어이 모든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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