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안정되지 않는 것들과 변화하는 것들 속에서 생각은 언제나 우리의 결정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 * *
몸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돌아가서 게비디의 앞에 섰다.
게비디는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간 무령께서는 작은 소녀의 모습만을 하고 계셨기에 저는 이런 모습을 하실 수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례를 저지른 점 사죄드립니다."
"됐어, 나도 몰랐으니까.
나도 내가 변한줄 몰랐는데 어떻게 알아보겠어."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그 모습은 마치..."
"이 모습이 어떻다고 생각하는데?"
내 물음에 게비디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성장하셨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군요."
성장이라. 이런 쪽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몇 천년간 가만히 지내다가 이제와서 성장이라니.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한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말에 어렴풋한 동의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말을 끊어내지 못하는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하고 싶어."
"부탁이라뇨.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엘타리스에 대해 조사해줘."
"엘타리스 말입니까?"
"어. 혹시 아는거 없어?"
"나름 조사는 해 보겠습니다만 이제는 문헌으로만 남아있는 듯 하여 아무래도
시간을 적지 않게 소모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타리스를 조사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조사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기야 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것 때문에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아니, 그런건 아니었어. 그런데 의문점은 해소된 것 같네."
"의문점이라 하심은..?"
"이 나라에서 내가 무령인걸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길래 그 이유가 궁금해서 그랬지.
그런데 이제보니 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였네."
내 말을 듣더니 게비디는 가만히 서서 잠시 고민하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만 들으면 괘씸하다고 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너그러이 넘어가시지요.
저도 킬레리 하나를 소모할 뻔 했습니다. 그나저나 대체 어쩌다가 그런 모습이 되신 겁니까?
짐작이 가시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걸리는 부분은 있는데."
나는 그에게 새로 만들었던 포션의 이야기를 전했다.
잠시 내 말을 듣던 그가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연구소에서 공장팀으로 실험을 돌리시지요.
생명보조 장치로 인해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을테니
효과를 시험하시기에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상실험은 역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신 포션이 있으십니까?"
"연구소 폐기물 처리상자에 담아뒀어. 처리까지 하루 정도 남았을거야.
그래도 만들어 줄 순 있지. 오래도 안걸려."
"흠, 킬레리!"
그 말에 킬레리들이 찾아왔다.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선 킬레리의 모습은 마치 군대와도 같았다.
게비디는 능숙하게 연구실 폐기물 처리상자의 포션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지 정확히 6분 19초 뒤에 킬레리 부대는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상자를 받아들고 포션을 빼내 가만히 바라보다 내게 물었다.
어떤 포션이 그 포션인지를 묻는 그에게 정확한 포션을 제시해주고 나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바라보았다.
게비디는 그 포션을 킬레리에게 건내주고 말했다.
"마셔라."
직접 폐기물 처리 상자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킬레리는 일절 거절하지 않고
바로 입으로 그 포션을 가져다댔다.
나는 곧 그녀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서서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내게 되물을 뿐이었다.
"이 포션의 복용 후에 신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없습니다. 도리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그래?"
"네, 다만 조금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그 한마디에 바로 그녀의 복부에 두꺼운 주먹이 내다 꽂히고 킬레리는 바닥을 굴렀다.
"멍청한 소릴 함부로 입밖으로 내지 마라."
게비디가 아주 정숙한 표정으로 한 손에 잔을 들고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뭔가 꺼림칙했다.
내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나서야 게비디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방금 자신이 가격해 바닥을 구르는 킬레리를 보고 물었다.
"어이 너. 가슴이..?"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는 일반적인 여성 정도의 크기가 되어 있었다.
분명 억지로 지방을 주입해서 키운 킬레리였음에도 약 복용 후에 정상적인 몸이 된 것이다.
그녀는 바닥을 구르다가 답했다.
"이 일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만 약물의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을 억지로 주입한 부분에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비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수술로 달아둔 자결용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포션이 분명 무언가의 효과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조건 죽는 포션이 아니었단말이야?"
나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포션을 연구소로 보냈다.
저택을 나오기 전에 게비디는 나에게 모귀드의 하녀를 이용하라고 말했다.
게비디는 나 역시 무령이 되었기 때문에 내 몫으로 나오는 모귀드의 하녀 클론이 있다는 사실을
고지했고 매달 수령하지 않은 수만큼 축적되니 원할 때 사용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들을 이용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구소로 나 역시도 발을 옮겨 진행 상황을 보게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각종 실험대상에게 포션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포션을 여럿 만들어 그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보시면 이번 실험대상은 황소와 샌들핀을 교배시켜 만들어낸 녀석의 DNA를
노예에게 주입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포션을 복용했을 때, 괴로움에 발작하다가
온 몸에서 피를 뿜고 사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때 인간의 형질이 약해지고
사망 직전까지 황소와 샌들핀의 성질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전에 실험했던 개조 인간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는 하지만,
기계화 병사나 수술을 통해 만든 병사들과는 다릅니다."
"알겠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백금색의 마력은 모이는데 반해 붉은 마력이 모이질 않는다.
분명 자연치유 효과도 그대로이고, 피로 마력이 강화되는 마력회로의 특성도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에스트로가 전해주었다고 하는 그 혈마법만 발동되지 않는다.
이 약의 효과는 아마, '순수하게 만드는' 약이었던 모양이다.
억지로 기계따위를 이어붙인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신체요소나 구성, DNA는
순수한 모습을 지향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개조인간은 개조된 쪽의 성질을 순수하게 했기 때문에 몸이 억지로 변화하는 과정중에
급변하는 신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에스트로가 혈마법으로 눌러놓았던 엘타리스의 모습이
순수함으로 인해 증폭되어 기어이 피의 마력을 누르고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아졌다고 하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제는 정말 저주에 더 취약해졌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괜히 남은 포션을 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고 나서 한숨을 내뱉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나는 상황 파악을 끝내고 상담소로 돌아왔다.
아침에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던 발레리아에게 인사하면 발레리아도 웃으며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나를 보고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오늘은 내가 할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차린 내 가게니까. 너는 오늘 좀 쉬어."
"알겠습니다."
내가 상담석을 이어받으면 다음 손님부터는 상당히 환호했다.
내가 무령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
나는 상당히 아름다운 새 상담원이었던 모양이다.
상담은 수월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한 포션을 전해주었다.
대부분은 이야기를 느긋하게 나누어주는 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인지
나도 상당히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와중 상당히 익숙한 얼굴의 인물이 나타났다.
이 사람 분명, 이름이 화이트였던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찾아오셨나요?"
"고민이 있습니다."
"네, 부담가지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제가 모시는 아가씨가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가씨께서 모르는 남자를 들이고
그 사람에게 너무 빠져 계십니다. 이전의 아가씨와 같은 총명함은 사라지고
눈에는 욕망이 서려 날밤을 잊고 짐승처럼 남자에게 휘둘리십니다."
"어... 그건 상당히... 어렵네요..."
"오랜 시간 아가씨를 따르기로 했고, 또 그래 왔습니다만, 요즘의 아가씨께서는
이전의 아가씨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시던 일은 꾸준히 진행하시지만,
이전보다 더뎌진 작업 속도에, 온 신경을 그 남자에게 투자하십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상당 수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음료를 주문했다.
마실 것을 달라는 그의 말에 나는 커피를 한 잔 내려주었다.
"천천히 말해보세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난 이제 필요 없어진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요.
그 남자가 문제에요."
"그 남자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거겠죠. 아니면 필요한 존재거나요."
"아가씨의 행복을 바라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가 직접 손으로 이룩하는 거였어요.
어디서 온건지도 모를 남자에 의한게 아니라고요.
이게 얼마나 착잡한지 모를겁니다."
"네, 이해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조금 진정하고 생각해볼까요.
아가씨가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아닌가요?"
"그 방식은 잘못됐어요.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은데,
고작 그런 정도로 다른 계획을 내던져버릴 정도로 쾌락에 빠져버렸다고요.
아가씨는 그런 길거리에 널린 아무 여성과는 다른 분이셨어요.
그랬기에 난 아가씨를 존경했고요.
그런데 내가 알던 아가씨는 이제 없어요.
아가씨보다 더 대단하고 화려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이제 대단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아요.
그저 날마다 남자의 밑에 깔린 채로 교성이나 내지르고 있다고요.
이런 식으로 살 거였다면 차라리 우릴 쫒아냈어야 했어요.
원대한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말에 동참했고 그렇게 몇년을 함께했는데
이제와서 고작 그런... 그런 일로 우릴 배신한 거라고요."
"확실히 착잡하실 만도 했네요. 그럼 그 남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시는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왜 아가씨와 만난 건지, 그리고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떻게 가까워진건지.
짧은 시간에 그렇게 가까워지려면 세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합니다.
정말 서로가 잘 맞거나, 원하는게 있거나, 약점을 잡혔거나요."
"확실히... 그래, 그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그래... 그게 문제였어...
고맙습니다. 반드시 꼬리를 잡아내고 말 겁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화이트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저 사람도 많이 힘들었겠지. 이전에는 내 훈련을 빼앗은 것만 생각했는데
저 사람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랬기에 미리타엔에서 유레크로스까지....어...?!
아가씨를 모시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미리타엔에서 타국으로,
그것도 적국의 군에서 훈련을 맡는다고? 그럼에도 전쟁이 끝난 지금 살아있다고?
어쩐지 머리가 또 아파온다.
대체 왜 모르는 것들 천지인지. 괜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은 그저 이렇게 살기로 했다.
미리타엔을 벗어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을테니까...
나는 여기서 살면 될거야...
그런 생각을 곤히 품어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