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50화 (150/303)

〈 150화 〉 성희

* * *

상담소는 생각 외로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나는 그저 정해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음료를 내주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몇 명의 손님을 상대한 이후에 연한 푸른 빛의 머리카락을 한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전체적으로 피부는 짙은 브라운색으로 태운 편이었는데 윤기가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닝같았다.

그건 그녀의 건강미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옷은 흔히 비키니 아머라고 부르는 옷에

얇은 시스루 천을 덧대 가슴부터 복부까지를 덮은 매끄러운 옷이었고,

허벅지와 다리는 탄탄한 구릿빛 근육이 다져진 모습이 당당히 드러나 있었다.

짧은 치마가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검은 천이었기 때문에 가릴 곳만 겨우 가렸음에도

묘하게 관능적이라기 보다는 건강한 육체미에서 나오는 활달한 귀여움이 있었다.

어깨에도 견갑을 올렸는데 견갑은 비키니 아머와 이어져 있었고, 팔에 천으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점원이 바뀌었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상당히 볼륨이 굉장하신 분이셨었는데."

"저는 점장이에요. 이 가게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가게에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손님을 맞고 있어요. 우선 서비스로 한잔 드릴게요. 받으세요."

나는 그녀에게 에스테리카를 건넸다.

"고마워요. 저는 샤인이라고 해요. 머스캣의 장녀죠."

그녀는 뒤로 묶은 포니테일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지고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상당히 쾌활한 느낌이 들었다.

"이 가게의 점장은 제가 알기로 에리아 무령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네, 제가 에리아에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눈으로 나를 흩어본 후에 말했다.

"사실은 요즘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거든요. 미리타엔의 에리아 무령에 대해서요.

교국에서는 이 일을 상당히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에게 지속적으로 접근 명령을 내리곤 해요.

사실상 감시 혹은 견제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근성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사성의 한명이죠. 그래서 제가 파견나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한동안 이 상담소에 지속적으로 얼굴을 비추곤 했어요.

사실 소문으로 듣기로는 에리아 무령은 아주 미스터리한 인물이었거든요.

상냥한 면도 있고 친절하고 미리타엔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이지적이고 너그러운데

가는 곳마다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며 각종 강력 범죄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으니까요.

사실 걱정도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보니 기분좋은 느낌이 드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커피를 대번에 비우고 말했다.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요. 특히 마카 다미아가 엄청나게 흥분해서 떠들었거든요.

그래서 교국에서 말하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맞지 않는 발언에 여론도 소란스러운 편이고요."

"교국에서는 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가 돌고 있나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교국에서는 당신을 올리브 살인 용의자로 확신하고 있어요.

물론 안카 숲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조사할 수 없었지만

정황상 그 안에서 올리브를 죽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아,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진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냥 당신이 궁금해서 온 거니까요.

잡아간다거나 싸우겠다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교국에 속하긴 했지만 신을 믿는 편은 아니라서 그닥 소속감도 없고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다 마신 빈 커피잔에 에스테리카를 다시 채워주며

그녀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올리브 살해 외에는 어떤 죄목으로 의심받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머지는 솔직히 제가 봐도 억지인 일들이죠. 전쟁을 불러 일으키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이요.

그냥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 아닐까 싶어요. 마녀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니까요.

언제부터 그런 걸 또 신경썼다고. 엘프나 오크에, 남부지역에서는 수인들도 좌시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마녀나 아인종에게 엄격한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제 그러려니 하는 정도까지는 온 것 같아요.

어느 나라보다 차별이 심하고 폭력이 강제되는 미리타엔에서

차별 없이 저를 받아들여주는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덕분에 가게도 내고 안락하게 살고 있으니 나름 만족스러운 편이에요 요즘은."

"소속감을 느끼시는 건가요?"

"소속감이라... 그럴 수 있겠네요. 이곳이 저에게 안식처라는 느낌을 주니까요."

"저는 그런 부분이 없거든요. 조금은 부러웠어요.

사실 저는 성희라는 자리를 갖고 싶지 않았거든요.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농사만 지었는데 최강이 되어있었다는 아류 무협지 같은거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왼손으로 뒷목을 살살 긁었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투박한 손은 굳은 살이 박혀 단단할 정도로 갈라져 있었고 팔 또한 단단하고

강한 근육이 꽉 뭉쳐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가볍게 쥐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농사는 아니지만 나무꾼을 했었어요. 주로 목재를 위주로 떼서 가공하고 파는 삶을 살았죠.

흔히 말하는 몰락귀족이었거든요. 가진 거라고는 모두 아버지 대에서 팔아버리고

남은거라고는 작은 나무 집과 딸린 산 하나였어요.

산에서 나무를 떼다 팔고, 버섯이나 과일을 채집해 팔고, 종종 사냥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산에서 마주친 남자가 다짜고짜 공격해오길래 제압했더니

선대 성희였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최강이라는 사람이 그래요?

덕분에 저는 팔자 펴고 좋지만요. 그 사람, 범죄자였다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을 제가 잡고 나서 그 사람이 공식적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한 후에

교국에서 사성을 관리하겠다고 비공식적으로 정한거고요."

"그러면 교국에 오히려 소속감이 있으실법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녀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교국에서 사성의 관리를 담당한건 사실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하지만 원래 사성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존재하던 거였습니다.

누가 제일 강한가? 를 따지던 것에서 교국의 앞잡이로 인식이 변한거죠.

교국에 속하기 이전에는 어디에 속했겠어요?"

"무소속 아닌가요?"

"그럴리가요. 그랬다면 길드에서 1급 모험가 자격을 보장해주지 않았겠죠.

원래 사성은 길드에서 그 위치를 보장해주는 거였어요. 비공식적이지만 길드 소속이었죠.

모든 모험가가 그렇듯이요. 그렇지만 그 순수한 강함에 대한 열의를 교국이 윤리나 도덕을 내세우며

그대로 자국에 흡수시킨 후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요.

최강에 대한 성의 표시라는 명목으로 매달 교국에서 내려오는 지원금은

교국의 의뢰를 거절할 수 없게 하는 명분을 만들거든요.

그 명분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지원금을 거절하면 사성으로서 윤리적인 규범을 준수하지 않아

모험가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오죠.

그렇지 않고서야 왜 사성씩이나 되는 범 국가적 단체가 교국에 본진을 두고 쩔쩔매겠어요."

"하지만 사성은 일인 군대라고 들었는데요. 영향력도 상당할텐데 교국의 압박을 이길 수 없다고요?"

"아이러니 하긴 하네요. 그래서 교국은 윤리적인 규범 외에 한가지 조건을 더 내걸었어요.

언제든 사성을 물리적으로도 견제할 수 있도록 군대를 만드는 일이었죠.

본디 교국에는 종교적인 부분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기도 했고,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많아요. 팔라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특출나게 대항할 수단이 하나 있다면 그게 신성력이겠죠.

신성력을 기반으로 성마법을 다루는 부대가 나타나는건 당연합니다.

그 부대의 육성을 사성에게 맡겨버린겁니다. 도의적 책임을 이유로요.

그게 바로 교국의 성마도 부대입니다. 그래서 이 군대의 압박으로 인해 타국에서도

각종 부대를 편성하게 되는 거고요. 오히려 교국이 스트레스라고요."

그녀는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왼쪽 귀에 건 귀고리를 톡톡 두드렸다.

귀고리는 빛의 입자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모여들어 빛나고는 거대한 양날도끼로 변했다.

그녀는 그걸 한손으로 들고 말했다.

"이 배틀액스 말고는 남은 것도 없어요. 그 돈 받아서 할 것도 없고요.

교국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기어이 성연 마카의 가족은 교국으로 끌어들여 자국민으로 만들었고,

저는 돈으로 묶으려고 하죠. 이번에 새로 성제로 임명된 젤라토의 경우도 교국에서 정한 거고요.

성신이 유일하게 통제되지 않는 요소로 남아있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야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물었으니까요."

"미끼를 물었다고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네요. 저도 모든걸 다 오픈할수야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도 묶을 수 없었던 그녀를 과연 무엇으로 묶은 것일지 나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이야기를 종합하며 내가 느낀 것은 과연 교국은 선인지 악인지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래서 교국을 마냥 좋게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리타엔이 이런 부분에서 더 자유롭지 않나 생각도 드네요. 사람을 편안하게 함으로서 묶어두는 법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저는 그래서 당신에게 관심이 생긴 거였어요.

죽지 않는 사람, 마법을 다루는 사람, 어쩌면 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 어떻게 미리타엔에서 사는지.

부럽네요. 어떻게 이 나라에서 그런 관용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고요.

커피 잘 마셨어요. 혹시 괜찮으면 내일 또 와도 괜찮을까요?"

"언제든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싸구려 담배였다.

불을 붙여 빨아들이더니 그녀는 상담소 밖으로 나가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하늘로 사라져갔다.

통제되지 않는다는 말은 상당히 무거운 것 같았다.

결국 누구나가 고민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쾌활하게 미소를 지으며 담뱃불을 붙이는 사람이나

조용하게 기회를 노리며 삭히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말이다.

그 이후로도 얼마간의 손님이 더 찾아와서 상담을 했지만그들 중 대다수는

그저 가게에서 고가로 살 수 있는 포션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포션을 팔면 그들은 신이 나서 포션을 들이키고 돌아가곤 했다.

대다수의 상담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발레리아가 포션을 분류하고 전해주는 것보다 내가 즉석에서 꺼내주는게 당연히 속도가 더 빨랐기에

가게는 생각보다 금방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무거운 몸을 침대로 옮기고 누워 잠을 청했고

창 밖을 두드리는 옅은 빗소리를 따라 의식을 천천히 옮겼다.

내 숨이 꺼진 것은 그때였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가게가 아닌 텅 빈 것 같은 어두운 공간이었고

나는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에 어색하게 허우적대며 그 무엇도 닿지 않는

캄캄한 공간에서 애써 보이는 빛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엘타리스. 언젠가 너라면 다시 그 모습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내 잠시 너를 아공간으로 빼냈단다. 대화를 하고 싶어서 말이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도르테우스라고 한단다."

그렇게 말하면 어두운 공간에서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공간에서 떠오르는

그의 모습은 은발을 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투구따위는 없는 중장갑은 검푸른 색으로 빛나고

어딘가 서슬푸른 빛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검이 그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긴 머리는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서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당신이 그 도르테우스군요."

"또 이렇게 널 데려오게 되었구나."

"괜찮아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그래, 오랜만에 또 꽤 긴 이야기를 하겠구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공에 앉아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그 순간 나 역시 몸에 균형이 잡히고 허공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곧 이어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 공간 위로 자연스레 팔을 얹을 수 있게 되었다.

"내 공간에 온 걸 환영한다."

그의 말이 끝나면 마치 꺼진 조명이 켜지듯 그의 등 뒤로 차츰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 수만...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의 혼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존재들이 그제서야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것이 네메시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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