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존재의 독립
* * *
"이런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자고요?"
내가 그에게 따져물으면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미안하다! 산 사람을 만나는걸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대등한 관계로 이야기를 나눠본지가 얼마인지 모르겠구나.
이게 익숙해져 버려서 말이지. 그럼 잠깐 이 친구들은 물려두도록 하자."
공간에 장막이 펼쳐지듯 단절되어 우리는 그들과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 장막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에도 손을 휘저으면
그곳은 그냥 허공이었다.
오히려 더 넓어진 것 아닌가 싶은 기분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공간마법에 차원 개념을 더한거란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알겠지?"
"데릭 때문인가요?"
"그래. 중요한 부분은 잘 전달 된 모양이네.
아마 너도 묻고 싶은게 많이 있겠지. 이쪽에서는 못 본 새에 많이 일이 틀어져 버려서
조금 걱정이 되기야 한다만 아마 너라면 잘 알아서 하겠지."
나는 어색한 손을 움직였다. 빈 손이 허공을 움켜쥐면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반투명한 유리잔에는
시원한 물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 물을 잠시 바라보면 그건 금새 커피로 바뀌고 만다.
나는 마른 목을 축이고 물었다.
"데릭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뭐죠?"
"솔직히 말하면 그 녀석이 위험할 요소는 없어.
나름 똑똑하기도 하고 집념이 강하긴 하지만 말도 잘 통하는 놈이고.
성격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온화한 편이거든. 다만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서 그렇지."
"신경이 쓰인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은발 머리를 살짝 옆으로 쓸었다.
그 얼굴에는 흥미가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첫번째 탈주자니까. 설마 그런 식으로 나를 속이고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물론 지금 제일 후회하는건 본인이겠지만.
원래 죽음이라는게 두려운 감각으로 다가오기야 하겠지만 다들 어떻게든 받아들이는 거잖아?
그런데 그 당시에 마법을 그렇게나 연구한 녀석이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겠지.
마법의 근원은 알고 있지?"
"마력이죠?"
"마력은 뭐라고 생각해?"
"글쎄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기록에 간섭하는 힘이야. 그러니까 과거 기록이 막 알려졌을 때에는
마법이 기록에 간섭하는 능력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많았어.
그리고 그 때문에 이론연구가 더 활발했지. 마법이 지금보다 더 강력했다는 의미야.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전의 마법이 요구하던 마력량을 기대하기 어려워졌지.
세상도 변해버렸고, 사람들도 마법을 잘 모르는 시대니까.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데릭은 널 알고 있을거다. 생명의 마력은 그리 흔한게 아니니까.
아마 어쩌면 너의 마력흔을 기억할지도 모르지."
"마력흔..."
내 마력이 남기는 흔적.
내가 어떤 마법을 쓰든
반드시 누가 시전한 마법인지 알아낼 수 있는 마력의 흔적을 이르는 말이다.
"그 녀석은 몸을 되찾기 위해서 널 찾아갈거야. 하지만 그건 너도 알겠지만."
"불가능하죠. 이미 몸이 썩어버린 후일테니까."
"그래, 잘 아는구나. 이미 뼈만 남은 존재니까. 그 녀석은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어.
너는 아마 데릭과 만날 때마다 고통스러워질 뿐이겠지. 그를 만나면 분명 너의 과거와 가까워지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지는 과거는 결국 너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난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난 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하겠지. 너의 저주를 지울 방법을 하나 알아.
선택은 너의 몫이지. 어쩌면 너도 이미 알고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고."
"해주세요."
"후회하지 않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그의 손은 두껍고 컸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래. 마음 단단히 먹으렴."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언가 무겁고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몸은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에 나는 바닥에 구토를 쏟아냈다.
그러나 쏟아낸다는 감각만 존재할 뿐, 나는 그 무엇도 쏟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몸에 가득 찬 이상한 마력이 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느끼면서
눈 한가득 눈물을 담고 콜록거릴 뿐이다.
"우욱...! 우웨에엑!! 콜록! 콜록! 우에엑!!"
그는 내 등을 말 없이 토닥여주었다.
내가 한참을 콜록이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 그제서야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나한테 뭘 했죠?"
"기록을 고쳤어."
"네?"
"엘타리스라는 존재를 너의 기록에서 봉인했단다.
너는 에리아로 살면 돼. 이제 그 저주도 더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럼 내 과거는...!"
"엘타리스는 여전히 기록에 남아있어. 다만 너를 엘타리스가 아니게 만든거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야. 기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이제 너는 천사의 반쪽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내가 엘타리스가 아니다...? 그런... 일이 되는 거였나요?
그럼...! 그럼 엘타리스는 어떻게 되는거죠?"
"아마 큰 변화는 없을거야. 여전히 죽지도 않을거고 늙지도 않을거야.
변화가 생기더라도 넌 분명 그걸 수습할 수 있겠지. 아마 기억에 관한 정도가 전부일 테니까.
하지만 이미 너로 굳어져버린 존재는 변하지 않을거야.
공장이 사라진다고 생산품이 없어지는건 아니듯이 말이야."
"그렇... 군요..."
나는 괜히 내 팔을 만져보았다.
원죄의 반지가 있던 손가락의 옅은 연녹색 무늬가 살짝 빛나보였다.
"그... 이건 어떻게 되는거죠? 원죄의 반지 말이에요.
이건 탈린에게 전해주지 않아도 되나요?
이제 엘타리스와 이어진건 제가 아니라 탈린이라는 말이잖아요?
이미 저는 이걸..."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탈린은 엄밀히 말하면 엘타리스가 아니니까.
그 힘과 저주를 빼낸 그릇일 뿐이지. 동질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결국 그건 탈린이지 엘타리스는 아냐.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원죄의 반지와 하나가 된거니까.
아마 이전보다 동화율이 높아졌다는 증거겠지.
굳이 엘타리스가 아니더라도 너는 반지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제 그건 네 거야. 그리고 아마 문제는 없을거란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내게 손을 다시 내밀어보였다.
그의 손등에는 검푸른 빛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나도 비슷한게 있으니까."
"그거... 반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에게 여유롭게 웃어보이며 다시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 더 궁금한게 있니?"
"난 자신을 가지고 살아도 되는 거겠죠?"
그는 잠시 벙 찐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넌 그럴 권리가 있단다."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에요? 난 과거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이젠 엘타리스도 아니라고요."
"엘타리스든 아니든, 너는 내 동생이니까. 이만 돌아갈 시간이구나.
가서 아르간티아를 만난다면 안부 전해주렴.
그리고, 못 본 새에 더 예뻐졌구나. 그리운 얼굴이네. 에리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눈을 떴다.
상담소에 딸린 방의 침대였다.
"아..."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과 땀에 젖은 등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찾아올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동생이라니. 더욱 모를 이야기만 하고 갔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발레리아가 묻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냐, 좋은 아침."
"이미 해가 중천입니다 무령님. 시간은 1시 26분입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웃어보였다.
"그렇구나. 그렇게 된 줄은 몰랐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물을 마시면서 괜히 손을 내려다본다.
반지로 인해 나타난 무늬를 바라보면 괜히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을 정리한다.
"오늘 일정 없지?"
"네. 가게 일정 외에는 없습니다."
"가게는 오늘 쉰다고 해.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알겠습니다. 오후 일정은 정리하겠습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야?"
"네."
"그래, 가자 그럼."
나는 발레리아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발레리아, 나 묻고 싶은게 있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넌 네가 대량생산된 존재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
그녀는 질문의 의도를 의아해하는가 싶더니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말했다.
"그 기회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저는 그 기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 감사라... 넌 역시 다른 아이들과 달라졌어.
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내가 우연히 만든 약이 있어. 이걸 마시면 넌 조금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거야.
여러 개체 속의 킬레리가 아니라 발레리아의 단독 개체가 될 수 있어.
강요하지는 않을게. 네가 특별한 존재로서,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서 존재하길 바래."
나는 그녀에게 어제 내가 만들엇던 포션의 효과를 설명했다.
순수함으로 다가가는 것이 그녀의 도구로써의 자아를 떨쳐내는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정중하게 거절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포션을 마시면 저는 조금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제 안에 남은 기반을 지워버리고 만다면 그건 제가 아니라고 해도 되겠지요.
저는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보다 더 불우했던 그녀마저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 어쩌면 네가 아직 감정에 미숙해서 그런거 아닐까?
난 분명 네가 이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비록 발레리아가 아니라 킬레리였다고 해도 저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졌고 그 본디 목적을 지워내는 것은
곧 제 정체성이 지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그 생각이 바뀔만한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는 그저 스스로의 본질을 거부한 존재가 될 뿐입니다.
저는 이미 제 스스로가 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의로 변해가는 것과 타의로 인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강제로 규정되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 구나..."
나는 그녀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던 포션을 가방 안으로 다시 밀어넣었다.
엘타리스는 없다. 난 그녀의 절반이라고 했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모든걸 알게되면
"무령께서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오늘 엔시온 플라이트 대공을 만날 생각이야."
대답을 짧게 했다.
그녀는 별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다만 내 앞으로 살짝 나서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와 발레리아를 보고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아도
그녀는 차분하게 내 앞에서 길을 안내할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큰 저택 앞에 당도했다.
문 앞에는 초인종이 있었다.
발레리아가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가?"
"무령님이십니다."
"금방 마중을 나갈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가 잠시 기다리면 안쪽에서 우아한 여성이 한명 내려왔다.
하인을 하나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직접 나와서 드레스의 치마를 살짝 잡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신지요. 여는 엔시온 플라이트라고 하옵니다."
"에리ㅇ... 엘라 세리타인이야."
별 생각 없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왠지 내 뿌리, 근본이라는게 괜히 떠올랐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오늘은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엔시온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이가 있어보임에도 상당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도 절대로 허리를 함부로 숙이지 않을 것 같은 도도함이 몸 전체에 배어있었는데,
그럼에도 내게 보이는 모습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가 있다고 해도 대공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젊어보이는데 어떻게 대공의 자리를 지키는 것인지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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