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쫒기는자들
* * *
"아냐... 아니라고... 이러면 안된단 말이다..."
조용한 동굴 가운데서 작게 중얼거리는 남자는 쿨럭이며 작게 피를 토한다.
기침에 섞여나오는 불쾌한 쇠맛이 입안을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
거품으로 얼룩진 핏덩이를 뱉어낸 후에야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말했다.
"에리아... 에리아아....!!"
깡마른 몸은 오랜 기간 도주한 탓인지 야위어 있었다.
손에 겨우 든 검은 지팡이를 짚고 동굴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의 뒤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비웃는 여성의 목소리도 따라붙었다.
"기어이 그런 힘에 집착하고 비루해진 몸으로 내 손에 빌붙어다닌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나라면 진작에 혀 깨물고 죽었을거야.
혹시라도 힘들면 말해. 그정도는 도와줄테니까."
"젤라토..."
주먹을 쥔 손이 바닥을 겨우 받치고 섰다.
피골이 상접한 것 같은 몰골을 한 젤렌지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며
비참하다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애처롭게 꿈틀거렸다.
분명 그렇게 고생을 해서 집어삼킨 마녀의 피였는데도,
결국 주사한 것과 마신 것에는 차이가 있다.
토혈을 할 때마다 점점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약해지는 감각이
그의 몸을 무겁게 한다.
빠드득 갈리는 이를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나서 맨 손으로 입에서 흐른 타액을 닦아낸다.
피가 질척하게 섞여 붉게 번진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들에도 이제는 나름 익숙하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또한 검붉은 핏덩이를 또 바닥에 내뱉는다.
"미리타엔에서 하극상을 일으켜서 그 편한 후작의 자리에서도 반 추방당해서
서로 연락도 없이 살던 여동생의 손을 빌려 겨우 목숨이나 연명하는 주제에
꼴에 자존심이라는 건 아직 달고 있나보지? 역겨운 새끼."
젤라토는 가차없이 그렇게 말하며 모욕했으나 젤렌지는 그런 것은 어찌 되든 상관 없다는 듯
겨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모욕보다는 피와 영생에 조금 더 치우쳐 있었으니까.
"그 괴물들을 처리하고 나면 그 다음은 너야.
물론 이제와서는 네가 악마보다 더 꼴도 보기 싫지만 말이야.
그 꼴을 봐. 누가 널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어?
본색을 드러내기만 해. 바로 죽여버릴테니까."
젤라토는 그렇게 말했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다.
저 상태의 젤렌지는 아마 굳이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옅게 느껴지는 호흡을 억지로 이끌어 온 것도 자신이다.
도움을 요청해온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숨겨주면서 동시에 성제의 자리를 얻어내는 것은
그녀로서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기어이 젤렌지를 도와준 이유라면
미리타엔에서 무령에게 거슬러 도피하는 그 쓰레기가 자신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도 꽤 찜찜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운 것이었지만, 사실 그렇게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악인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악마를 한 평생 죽여왔던 그녀로서도
악인을 도왔다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의 판단에 고민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거나,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나름의 감정적인 이유가 그녀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판단에 한번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시적일 뿐일 테니까. 일이 해결되면 젤렌지는 늘 그렇듯 젤라토를 버려두고 떠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닥에 웅크려 허덕이는 젤렌지를 살려두는 것이다.
젤렌지는 주머니를 억지로 털어내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붉은 피가 담긴 작은 시약병을
억지로 입안에 벌컥벌컥 들이부으며 붉게 충혈된 눈의 실핏줄이 터지도록 한참을 꾸준히 목 뒤로 넘기고 있었다.
그가 미리타엔에서 후작이었을 당시에 그의 휘하에 있던 수많은 노예들에게서 뽑아낸 피였다.
에리아의 피를 마신 뒤로는 한동안 쓸 일이 없었음에도 꾸준히 가지고 다닌 것은 그의 일그러진 집착 때문일 것이다.
피는 각종 병이 없는 건강한 노예나 희귀 혈액형, 혹은 특수한 형질을 가진 사람들을 위주로 모은 것이었다.
개중에는 몰락한 귀족이나 과음으로 인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의 귀족들도 있었다.
귀족의 피는 성능과는 별개로 콜렉션 느낌으로 수집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상황이 변하자 젤렌지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마구 삼켜댔다.
한참 피와 불사의 조사를 하던 도중에 생겨버린 그의 이상한 집착은 결국 그를 이렇게 변화시켜버린 것이다.
바닥에 빈 유리병이 쌓이면 젤렌지는 결국 철퍼덕 엎어져버린다.
그가 억지로 저렇게 삼켜대는 것이 미리타엔의 노예, 혹은 중견급 귀족의 피라는 걸
알고 있는 젤라토의 눈엔 그녀의 오빠는 사람보다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가까웠다.
정이나 혈연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모른 척 하려고 하는 그녀의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에 순간 피가 통하지 않는 감각에 저릿한 통증이 올라오면 그제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폈다.
아직은 죽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겨우 그녀의 손을 멈춘다.
그러면 피가 통하지 않아 희게 변색되었던 손이 혈색을 띄며 지릿하게 무겁다.
싸늘한 바람이 느껴지는 순간, 젤라토는 그 동굴에 젤렌지를 버려두고 밖으로 떠나며 말했다.
"잠시나마 사람이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
너 같은 새끼가 그렇게 간단히 변할리가 없었을텐데."
"하긴 인종의 다양성도 이해하지 못하고 악마니 괴물이니 사냥하려 드는 너의 시각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
새로운 정보와 문물은 처음에 낯선 법이라지. 이해할 수 있어."
"이해는 무슨 이해야. 그딴걸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입 닥쳐.
뱀파이어도 아니고, 그렇게 사람들의 피를 뽑아 마시는 모습이 설마 정상이라고 생각해?"
"걱정마라. 곧 너의 도움 없이도 홀로 서게 될 테니까."
젤라토는 변함 없는 그의 태도에 살짝 지치기도 해서
먼저 그를 버려두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병신새끼. 알아서 해봐 그럼 어디 한번."
그리고 괜히 손에 꽉 쥐고 있던 단검을 마구 휘둘러 눈이 쌓인 언덕을
화려하게 휘날리는 사슬 끝 칼날로 더럽히는 그녀는 속으로 울분을 삭히고 있었다.
같은 어머니를 두고 태어난 남매였지만 둘의 성향은 꽤나 달랐다.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추구했던 젤렌지는 젤라토에게 일종의 스위치였다.
자신은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합당한 이유와 논거 위에서 필요한 정도의 힘을 행사하는데 반해
그는 언제나 과감하고 과격했으며 절제되지 않은 무력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녀는 그런 젤렌지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남매는 부모의 성향을 반씩 물려받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젤렌지는 아버지의 광기와 집착, 어머니의 끈기를 물려받은 결과물이었고,
젤라토는 어머니의 이상에 아버지의 수단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과격한 수단으로 선을 쟁취하려 하는 그녀는 이미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방식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젤렌지가 보여주는 그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을
눈으로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악을 상대하려면 언제까지나 순수하고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그녀는 다짐하고 있었다. 악이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게 된 사상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멈추고 그녀는 바닥에 침을 퉤 뱉어버리고 교국으로 사라져갔다.
여전히 동굴 밖의 매서운 눈발은 싸늘하게 휘날렸다.
젤렌지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미 옷이며 손발이며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가 그렇게 발작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미리타엔에서 에리아가 자가실험을 통해 순수한 존재로의 변화를 보일때,
그 피의 영향을 받은 이들 역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에리아 역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한번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에리아의 몸은 구성이 변해 있었으니 그 피가 이전만큼 매개로서 뛰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고통만을 수반하던 것도 아니었다.
젤렌지 본인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또한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다.
에리아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지만 분명히 아주 옅은 생명의 빛이
그의 마를대로 말라버린 마력회로 어딘가에 남은 것이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력회로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더없이 나약하고 가늘어 제대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던 자라고 해도
외부적인 요소로 강제적인 마력을 경험하게 된다면
거기서 영감을 받아 회로의 사용에 익숙해지는 자들이 있다.
에리아가 유레크로스의 군대에서 보여주었던 훈련 방식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금 설원 한가운데 작은 동굴에 쳐박혀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흐느끼던
깡마른 남자의 몸에서도 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눈치챈 또 한명의 남자가 있었다.
젤렌지가 쏟아내던 피에 섞인 어렴풋한 에리아의 마력은
에리아를 쫒아 엠페레스 인근까지 찾아왔던 데릭에게 있어서
미리타엔으로 갑자기 이동해버린 에리아로 오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젤라토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발소리. 선명하게 들리는 또각거리는 소리에
젤렌지는 조용히 한보 뒤로 물러나며 몸을 숨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좀 할까 하는데요."
분명히 들리는 말소리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으로 전해진다.
머리에 직접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감각.
젤렌지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고 있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몸을 바깥으로 옮긴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은 로브를 두른 해골이다.
"리치...?"
"리치라,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겠군요.
여기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마력반응도요.
아마 당신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으실까요?"
젤렌지는 낮은 한숨을 내쉰다.
"죽을 때가 되긴 했나보군. 헛게 다 보이고..."
"확실히 죽을 때가 되시긴 하셨습니다.
피를 그렇게 쏟아내셨으니까요. 아무 피나 닥치는 대로 드셨던 모양인데
운이 없었군요. 에이즈 환자가 하나 섞여있는 줄은 모르셨나 봅니다."
"에이즈..?"
젤렌지의 눈 앞에 선 해골은 자리에 살짝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래 뵈도 마법 연구는 꽤 했던 몸이라 그정도는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댓가는 분명히 받아야겠지만요."
"하아... 그래, 뭘 원하시오?"
"그 피 속에 섞인 생명의 근원을 연구하고 싶은데요."
"에리아군."
해골은 잠시 멈칫하다가 되묻는다.
"에리아?"
"미리타엔의 무령이라네. 마녀라는 별칭이 있고, 죽지 않는 존재지."
데릭은 깊고 음습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젤렌지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내고 동시에 젤렌지의 마력 회로 어딘가에 남은
에리아의 생명의 마력을 탐지해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빛무리의 편린을 찾아낸 데릭은 기어이 그것을 천천히 당겨왔다.
공포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각에 젤렌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데릭은 불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손을 놓았다.
"다 됐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빛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걸 어떻게 당신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가지고 계셔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확인해본 당신의 마력 말인데,
아주 불쾌하고 짜증나는 감각이네요. 덕분에 빛이 더 밝게 부각되어 보입니다.
에이즈는 우선 겸사겸사 치료해 두었습니다만, 다시... 만날 일은 없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데릭은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고 젤렌지는 멍하니 남아서
자신이 너무 지쳐서 헛 것을 보았다고 단정 한 후, 동굴 벽에 기대서 잠을 청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