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로드원의 이름을 대는 자들
* * *
우리가 식기를 내려놓고 남은 음식들은 킬레리의 몫으로 포장이 끝난 이후
게비디는 난처한 기색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결국 그 음식들을 받아서 돌아갔다.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정말 저걸 먹일 수나 있을런지도 궁금하다.
내가 콜로세움에서 노예신분으로 도전했을 당시에 나왔던 배급식이 저것보다 맛있었는데.
괜히 그의 짐에서 하나를 꺼내 챙겼다.
게비디가 의아한 얼굴로 그걸 왜 챙기냐고 물으면 나는 혹시 모른다는 말로 질문을 일축하고는
가방에 그 데레코즈가 만들어낸 음식으로 도시락을 챙겼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상당히 맛있어 보이기는 했으니까.
재료가 고급이라 그런가? 독을 넣지도 않았고 망칠 의도도 없었고
정성스럽게 만든 예쁜 요리가 맛이 그모양이라는 걸 알 사람은 많이 없다.
"그 혹시 최근에 걱정거리나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래서 그러신 겁니까?"
내 모습을 보고서 그런 걸 왜 굳이 챙기냐는 이야기를 애써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음식을 챙기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말인데 게비디, 혹시 최근 콜로세움에 들어온 노예 명단 같은건 있었어?"
"노예 명단 말입니까?"
"응. 찾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혹시 흘러들어왔는지 궁금해서."
"음... 일단 이름을 알려주시면 콜로세움 측에서 찾는 즉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번에 여쭈셨던 엘타리스에 대해서도 현재 거의 조사가 끝난 상황이라 빠른 시일 내에
결과 보고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고마워. 로드원이라는 성을 보면 무조건 상대하지 말고 내게 알려줘.
상대해서도 안되고 상대가 되지도 않을거야."
"로드원이라면 체헤게 로드원의 후손입니까?"
"본인일 수도 있고, 선대일수도 있고."
"저일수도 있겠군요."
뜬금없이 섞여들어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데레코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웃고 있었지만 명백히 눈에 진지함이 섞인 예리함이 있었다.
"데레코즈?"
그는 잠시 눈짓으로 발레리아에게 퇴실을 명했다.
발레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먼저 가게로 돌아가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데레코즈는 다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미리타엔의 대공중 한명인 데레코즈 로드원입니다."
아마 나는 지금 경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줄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내게 로드원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로드원이라는 이름을 이런 곳에서 듣게 될 것이라고는 나 역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당황해서 살짝 뒤로 주춤하면 그가 흥미를 한가득 안은 표정으로 물었다.
"로드원이라는 이름이그리 흔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만
어떤 로드원을 찾으시는지 궁금하군요.
아마 이제 로드원의 이름을 쓰는 자는 몇 없을 겁니다.
전부 대가 끊겨버린 상황이니까요."
"데레코즈 대공... 로드원이라고?"
"원래 미리타엔은 과거에 다르말록 신을 국교로 정했던 나라입니다.
로드원은 그 시절부터 다르말록의 종파 이단심문관을 담당한 자들이었고,
후에 분열되어 세계 각지로 파견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다르말록의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의 임팩트가 여실히 남아 아르간티아를 섬기는 자들 중에서도
이단 척결을 모토로 하는 신부들이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군요.
왜 제가 대공가의 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실권과 먼지 아십니까?"
내가 침묵하면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입에 에라옥신 파이프를 물고 대답했다.
"이 나라의 종교가 무색해질 정도로 쇠퇴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공이 넷이었던 체제 순환기에는 미리타엔이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로드원에서도 한 자리를 챙겼었지요. 이단 심문을 명목으로 마녀를 죽이고
숨어든 악마를 죽이고, 그런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그 당시에 등에 업었던 다르말록이 있었으니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기에 대공가로 발전하기까지는 금방이었죠.
물론 이제와서는 로드원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데레코즈 공작으로서 하등 득이 될 일이 없었고
무령님께서도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리라 생각하여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만
듣자하니 이미 어느정도는 다 알고 계시는 모양이로군요.
매 맞는 것이 두려워 잘못을 숨기면 나중에 더 많이 혼나게 된다고 어릴적에 다들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해주시지요. 지금 솔직히 고백하지요. 아마 제가 현대에 남은 유일한 로드원일겁니다."
"아...아니, 그럼 지금 로드원이 또 한 명 늘었다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이마를 짚었다.
마른 세수로 얼굴을 닦아내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체헤게 로드원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 많은 로드원을 전부 알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 무령님께서 기억하시는 로드원이라면 제가 알만한 시대의 인물도 아니겠죠.
왜 로드원을 찾으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명은 내가 찾아야 할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나를 찾으려 하는 사람이야.
둘 다 지금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겠지만."
게비디는 머리를 살짝 정돈하고는 지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나름 조사를 할 필요는 있다는 이야기군요.
다음주 콜로세움 일정에 조사까지 맞추려면 조금 빠듯할 것 같기야 합니다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데레코즈가 그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콜로세움 일정은 늘 있는 건데 그게 빠듯할 일이 되는건가?"
"나도 일반적이라면 그렇게 여겼겠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독특한 참가자가 있어서
운영측에서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네.
류해백이라는 놈이 섞였거든."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는 게비디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무령님께서 남은 전투용 포션을 독점적으로 공급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이제까지 납품받던 포션도 아직까지는 넉넉합니다만
현재 추세로 보아하면 머지 않아 다 소모될 것으로 보입니다.
류해백이라는 자가 참전하게 되면서 유레크로스의 개를 잡겠다고
미리타엔 젊은 귀족들 쪽에서도 따로 용병을 사서 출전시키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 콜로세움은 유난히 귀족들의 원조를 받는 이들이 늘어나버려서
포션을 비롯한 각종 도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데레코즈는 껄껄 웃으며 게비디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그 류해백이가 뭣 때문에 이 콜로세움까지 발을 들인건가?
아버지 장례도 아직 끝나지 않았을 시간인데 말이야. 하하...
미리타엔의 콜로세움이 물로 보일 정도로 만만했나보구만!"
"나도 처음에는 원정격파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런건 아닌 모양이더군.
정식으로 우승해서 미리타엔의 황제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을 오셨다고 하는 것 같더구만."
"소원?"
내가 말을 자리고 물으면 게비디는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작은 글씨로 적힌 요구사항이 있었다.
"이런걸 내밀더군요. 콜로세움에서 이길 시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인지 묻는 겁니다.
황제께 보고드렸고 황제의 허가가 나온 이후에 그가 콜로세움에 스스로 발을 들인 겁니다.
원칙대로라면 황제께서 들어주시는 요구 조건은 원래 한가지지만 이 놈이 머리가 좋은 편입니다.
무령님과의 1대1 대면을 하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아마 황제께 요구할 내용을 무령님을 통해 전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무령님 주위로 호위 역시 많이 붙일 예정이고,
무령께서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소원이기 때문에
짧은 미팅 정도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접수를 끝내고 정식 콜로세움 개최 전일 까지는 쉰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나 1등을 할 수 있는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겠지요."
"아마 그쪽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는 거겠지만.
근데 나는 왜? 나한테 오는 것보다 플로라한테 가는게 빠르지 않나? 날 한번 거치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해서 이득이 되는 부분이 없을텐데."
"그건...아닐겁니다... 아마 무령님만 모르시겠지요."
게비디는 그렇게 말했다.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니. 내 입장에서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유레크로스에서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껏 대화한 상대라고는 제임스나 데니스 정도였다.
이제와서 나를 필요로 하는 것도 의아하다.
괜히 혼자 생각해 보기로는 설마 나르딕을 처형한 것으로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길 바랬다.
그건 정말 너무나도 수지가 맞지 않는 불쾌한 제안일 테니까.
"뭐 그건 적당히 알아서 처리해줘. 난 이제 다시 또 여행이나 다녀올까 생각중이니까."
"제가 어찌 무령님을 막겠습니까. 다만 모레나 글피쯤 후에는 한번 들러주시지요.
조사가 끝날 것 같으니까요. 현재 조사가 막힌 부분이 기억의 미로부근입니다.
원체 조사가 어려운 부분인지라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소모되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미로 자체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라 금새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로에 변화가 생겨?"
"네. 더는 사람들이 같은 미로에 여러번 들어가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미로가 사람들의 기억을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는 건가?"
"그 반대입니다."
"반대?"
"들어간 이들이 하나같이 빈 껍데기가 되어버립니다.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킬레리들은 재교육을 시작하면 금새 배우기는 합니다만,
이전과 비교해서 판단을 요하는 명령의 실행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
이전에는 분명히 미로에 들어갔다는 기억 자체만 잊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제는 모든 기억을 날려버리게 되었다는 건가?
분명 도르테우스와의 자리에서 내게 이어진 무언가를 끊은 이후에 생긴 일이겠지.
도대체 그 기록이 뭔지 여전히 알 수 없어서 나는 괜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물리와 논리를 막론하고 그저 사실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기록이라니.
그게 정말 신의 영역이 아닌가.
분명 내가 한참 이리야스 산맥에서 연구하던 당시에만 해도
나름의 인과관계의 규칙성과 논리에 따른 개념의 존재법칙을 확립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 어떤 고생을 했더라...
연구의 방향도 생각이 나고 결과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연구했는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기야 몇 백년, 몇 천년이 지나면 잊는 것도 당연하다지만,
잊는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당황이 배가 된다.
"기록을 건드리면서 문제가 생긴게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면 아르간티아나 헬브람, 엘타리스와 도르테우스도
모두 잊혀지지 않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망각의 저주가 아니라 기억력이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까먹는 정도가 되었다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이제껏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정말 메모라도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된다.
하여튼 옛말이 틀린게 없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정말 집을 나오고 다시 세상에 어우러지면서
내게 낯선 변화가 너무 많이 생기고 있었다.
"에이씨, 모르겠다. 일단 말한대로 로드원에 대해서 조사해줘.
엘타리스 정리되면 연락 주고."
"네,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로드원 건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보고서를 따로 정리해서 줄 수 있나?"
데레코즈의 물음에 게비디는 픽 웃으며 대답한다.
"자네는 정보상에나 의뢰하게."
"정보상 놈들에게 비기지 않을 정도의 돈을 주지."
"돈? 아직 겨울에 땔감대신 지폐다발로 난로를 데워본 적이 없나보군."
"미친놈."
"정리하고 나면 따로 한 부 보내주지.
다만 그걸 읽고 난 후에 개별 행동은 삼가주게.
행동 전에 연락 한통 남기는게 어려운 건 아닐테니까."
"그러지."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째선지 모르게 나는 어딘가 찜찜하고 어둑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그런 불쾌함을 느꼈다.
그날 가게로 돌아가 남은 일거리를 정리하고 나서
나는 가방을 재정비하고 엠페레스로 돌아왔다.
엠페레스로 돌아오면 널스페이지 신문사의 부장실에서 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또 화들짝 놀란 모건이 마시던 커피에 사레가 들려 콜록댄다.
"다녀왔습니다."
"오셨...군요..! 콜록!"
"쉬고 왔어요."
"확실히 안색이 많이 밝아지시긴 한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잘 됐군요."
그가 그렇게 말하는 새 그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난다.
"죄송합니다. 저녁식사를 아직 못해서."
나는 가방에서 그 도시락을 꺼내 물었다.
"혹시 이거라도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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