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조우한 불경
* * *
처음 보는 천장이다.
흰 천장은 조명이 군데군데 박혀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위를 덮고 있다.
"참... 이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호자분 맞으십니까?"
"일단은 그러네요."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냥 급성 쇼크로 인한 과호흡입니다.
연세가 연세이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참... 이런 어르신이 아직까지 현역인 것도 대단하네요 정말.
아니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어... 그게 그러니까...."
차마 도시락을 먹고 그 맛이 너무 충격적이라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디 그럴 면목이 있어야 말이지.
도시락 하나 먹었다고 사람이 병원에 실려온다고?
하다 못해 식중독도 아니고 충격으로 인한 과호흡?
할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는게 정상이다.
의사는 가만히 그의 상태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잘 찾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아무리 정정하시다고 해도 조금 늦는게 큰 차이가 있거든요."
한쪽 팔에 수액을 꽂고 누운 그를 가만히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나요?"
"의식만 돌아오시면 바로 가능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나는 그의 병원비를 계산한 후에 말했다.
"퇴원 후에 주의할 점이 있나요?"
"음...글쎄요, 뭐니뭐니 해도 충격을 받지 않는게 제일 좋겠죠."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나 역시도 그를 쉬게 놔둬야 한다는 생각에 방을 나왔다.
그리고 엠페레스 거리를 괜히 전전하며 돌아다니기로 했다.
어차피 쓰러져 누워있는 사람을 더 귀찮게 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익숙한 여성의 뒷모습이었다.
'저건 분명 린의 뒷모습인 것 같은데..?'
그녀의 뒤를 자연스럽게 밟았다.
마치 나를 인도하려는 것처럼 페이스를 조절해 나아가는 그녀는
골목을 여럿 돌아 안쪽으로 나아가다가 작은 가게에서 멈춰섰다.
내가 기척을 숨기고 그녈 바라보면 그녀도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조용히 문을 열고 그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내가 그 가게의 간판을 바라보면 음습한 느낌의 퇴폐적인 아틀리에였다.
가게 창문은 모조리 선팅이 되어있고 그 마저도 어둑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내가 그 가게의 문을 두드리면 안쪽에서 나이가 적잖이 있어보이는 여자가 나와서
내 얼굴을 흝어보더니 말했다.
"작품 사러 왔어?"
"둘러보려고요."
나는 작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답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말했다.
"작품은 안팔아. 오늘은 다 나가서."
이 기회를 놓치면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에 나는 문을 닫으려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막아세웠다.
내가 문틈을 붙잡고 그녀를 저지하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안판다니까? 용건 없으면 돌아가야 착한 아이지?"
"종속."
"얘, 너 뭐하는 애니? 돌아가라니까!"
"규제."
"참 별 이상한 아이 다 보겠네."
"명령."
종속과 규제, 명령의 마법을 하나씩 조합해 그녀에게 붙여넣는다.
일시적이지만 그녀를 발 아래 둘 생각이었다.
잠시 기다리면 그녀의 눈에 선 핏대가 서서히 풀리고
안구 근육이 풀어져 느슨해지면 초점없는 두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여기는 뭐하는 가게죠?"
"지하... 아틀리에... 외설물이나... 국가차원에서 규제된... 예술품의 암시장..."
모건이 말한 이 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어두운 부분인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들어가도록 도와달라고 하면 그녀는 힘이 빠진 고개를 떨구며 끄덕이더니
문을 열어 나를 안으로 들이고 다시 조용히 문을 닫는다.
"안쪽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나요?"
"경매.... 해요...."
나는 그녀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엔 상당히 엄숙한 분위기에서 하나같이 동물의 얼굴을 본따만든 가면을 쓰고
조용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싸구려 시설에 맞지 않는 고급 와인을 마시는 이들이 모여
물건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너무 소란스러울 경우에는 단속이 뜰 수도 있기 때문일까.
나 역시도 동물 가면을 받아 머리에 착용했다.
그러나 금새 그녀에게 제지당했다.
"토끼가면은...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침입했을때, 눈속임용으로 주는 가면...
토끼가면을 받은 사람은... 외부인이거나 단속반... 그걸 쓰면 경매는 종료되고...
순식간에 사람들은 사라져요...."
그래서 나는 그녀가 주는 올빼미 가면을 착용하게 되었다.
토끼가면에는 없었던 음성 변조기가 붙어있었다.
확실히 나름대로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미리타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위험한 분위기가 났다.
나름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입구에서 저지가 실패할 경우에 의도적으로
토끼와 기린, 사슴과 같은 초식성 동물의 가면을 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다시 경매장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육식성 동물만 남아있었다.
비는 자리에 착석하고 나서 다시 경매장을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린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옆에 어딘가 체격이 큰 남자가 한 명 같이 앉아있다는 점이 걸린다.
그리고 경매 상품이 또 한번 바뀌면서 진행자가 새로운 상품을 제시한다.
"이것도 고급이죠! 미리타엔의 랜덤포션! 지금 한창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입니다.
인생 한번의 대박당첨을 노릴 수 있지만 동시에 실패의 리스크도 있는 재미있는 물건입니다.
자, 50델부터 시작합니다."
"55"
"70"
"90"
"1캐럴"
"1캐럴 50델"
"자, 1캐럴 50델까지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3캐럴."
"3캐럴 나왔군요. 더 없으십니까? 세 번 부르고 낙찰 마무리 짓겠습니다.
3캐럴, 3캐럴, 3캐럴. 네, 이번 상품은 하이애나에게 낙찰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온 상품은 꽤 커다란 알이었다.
아이들이 흔히 차고 노는 축구공 정도 크기의 알이었는데,
어스름한 은은한 노란 빛으로 빛났다.
"다음은 천각룡의 알입니다. 모험가들이 열을 내고 찾으려고 한 그 전설의 알이죠!
아시다시피 천각룡은 위험 등급부터가 아주 높은 괴수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대개 불완전한 상태로 부화하고 진화하지만,
혹시 모릅니다! 이 알에서 진퉁 천각룡이 부화할지도!
바로 5캐럴부터 시작합니다!"
그때였다.
"5캐럴 1크레딧."
조용히 손을 들고 말한 것은 내가 린이라고 점 찍어둔 여자의 옆을 지키던 남자였다.
어딘가 불쾌하고 낯선 감각. 그러나 동시에 익숙하고 날이 서는 감각.
나는 저 알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모르더라도 내가 반드시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캐럴."
그래서 따라오지도 못할 10캐럴이나 되는 금액을 덜컥 쾌척해버렸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을 느끼면 솔직히 우월감도 든다.
어차피 미리타엔에서 포션장사만 해도 돈은 차고날 정도로 벌리니까.
"10캐럴... 1퀴트 나왔습니다! 1퀴트 이상 내실 분 안계십니까?"
그러나 저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한건지 다시 손을 들고 말한다.
"1퀴트 1크레딧."
나는 사회자가 진행하기도 전에 다시 손을 들고 말했다.
"2퀴트."
내가 그렇게 금액을 끌어올리는 걸 보다가 옆에서 나를 걱정하기 시작한 여자가 말했다.
"여기서 돈... 못내면... 끌려가요.... 잘 생각해요..."
당연하게도 2퀴트 이상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천각룡의 알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가방에 천각룡의 알을 집어넣었다.
저 앞쪽에서 내게 알을 뺏긴 남자가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다음 상품입니다.
케이 겔데어스 가주의 숨겨진 보물! 퀸 엘도라도 그랜드 호의 입찰권입니다!
15델부터 시작합니다."
"20!"
"27!"
"33!"
"50!"
"67!"
"75!"
올라가는 숫자는 매섭게 치솟는다.
이번 경매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여러가지 상품들이 나왔지만 하나같이 그냥 흘러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린이 관심을 보이는 상품이 나타났다.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죠!
그 데릭 로드원의 흑마도서입니다! 영혼 및 논리학 위주로 서술되었다는군요!
30델부터 시작합니다!"
린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잠시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는 손을 들어 말했다.
"5퀴트."
"5퀴트...?! 5퀴트 나왔습니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금액입니다!!
이 위로 없으십니까!! 없겠죠!! 세번 부르고 낙찰 하겠습니다!
5퀴트! 5퀴트! 5ㅋ...!"
"6!"
회장의 분위기가 쏠린다.
6퀴트를 부른 것은 젊은 여자다.
흰 곰의 가면을 쓰고 있던 이제껏 조용하던 여자다.
"6퀴트 부르겠어요. 이 위로 자신 없으면 다 꺼져."
린이 그녀를 째려보며 손을 올린다.
그러나 그것보다 흰 곰 여자가 더 빨랐다.
"10퀴트."
린은 머뭇거리던 손을 다시 조심스레 내린다.
그 손은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콩 콩 내리치는 것으로 끝났다.
즉시 그 자리에서 10퀴트를 지불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여자.
그리고 책이 흰 곰의 여자에게 넘어가자마자 여자는 물건을 받아들고
그 위로 마시던 술을 붓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여 태워버렸다.
당연하게도 그 광경을 보고 린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너... 너 이 미친년이!!!"
음성 변조기를 뜷고 나오는 날카로운 음성은 분명 그녀였다.
"뭘 이런 책을 10퀴트나 주고 사려고 해? 내가 한번 읽어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고 흰 곰은 유유히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린은 화를 삭이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옆에 앉은 남자가 위로해주며
조용히 안아주고 있었다.
린은 그 품에 안겨 등을 토닥토닥 받으면서 흐느꼈다.
린이 조금 진정된 후에 그는 린을 안아들고 조용히 경매장을 떠났다.
'남자들은 저렇게 안는걸 좋아하나? 저게 분명 공주님 안기였던가 하는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에스트로도 그렇고 체헤게도 그렇... 아...!!'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그제서야 알았다.
내 손 앞으로 기어들어온 얇고 가느다란 끈을 쥐고 나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경매장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대치중이었다.
상당히 싸늘해보이는 흰 곰가면을 썼던 여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린을 안은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뒤로 다가가 물었다.
"체헤게...?"
남자의 시선이 분명히 나를 돌아보았다.
낯선 얼굴. 하지만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그의 얼ㄱ...어...?
체헤게가 어떻게 생겼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흐린 영혼체와 로봇으로 인상에 남아버려
그 얼굴이 이제 더는 생생하지 않았다.
남자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나서 린을 안은 그대로 둘은 입을 맞추었다.
나는 눈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 우리 이만 갈까?"
"그래.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야."
"혹시 힘든건 아니지?"
"당연하지. 이젠 별로 신경도 안쓰여."
그 말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안돼...! 체헤게...!!"
그는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네가 아는 체헤게는 영혼뿐인 마녀사냥꾼이겠지.
그런 사람은 이미 죽었다.
난 피드 린이야. 더는 이런 식으로 날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누구 마음대로 사라지려고!"
흰 곰의 여자가 빠르게 칼을 빼들어 그들을 공격하면 그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사르르 사라져버리고 만다.
흰 곰의 여자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서 나를 바라보더니 묻는다.
"덕분에 다 잡은 사냥감을 놓쳤어. 넌 누구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엘라 세리타인. 미리타엔의 에리아 무령이야."
멈칫 그녀의 손이 멈춘다.
"그렇구나. 네가 오빠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나는 젤라토. 새로 성제가 된 사람이야.
내가 누군지는 알거라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닥 부딫히고 싶지 않네.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때가 되면 그때 반드시 박살내줄게."
"아... 내가 너한테 무슨 실수라도 했던가?"
"그냥... 마녀는 죽어야 해... 악은... 존재해선 안되니까..."
"그런것 치고는 상당히 여유로운데? 살려보내면 어쩌려고?"
"지금은 나도 신경쓸 짐덩이가 있어서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거리의 인파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체헤게가 그렇게 떠났다는 건 알았는데 기어이 린에게 붙었다니.
내게 그를 구속할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분명 서로를 의지하고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들린 말은 아들... 아들이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지... 나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이런 일로 일일이 좌절할 수도 없고 무너져서도 안된다.
다만 나는 알아내야 한다. 그게 내 임무니까.
나는 그렇게 숨을 고르고 다시 발을 뗐다.
그렇게 얼마 쯤 걸었는지 모를 때가 되어서야
나는 엠페레스의 가로수길에 도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