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63화 (163/303)

〈 163화 〉 천신

* * *

숲은 상당히 넓어서 분명 뒤를 돌아보고 떠났음에도 한참을 걸어도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울창한 숲 탓에 나는 숲 가운데를 빙글빙글 돌 수밖에 없었다.

지리에 밝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장소만 몇 번째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마운틴 엘프의 마을에서 삐삐 밥이라도 먹이고 돌아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러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면 어린 마운틴엘프가 하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마운틴엘프는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다가 총총 걸어와 말을 걸었다.

"어른들은 이상해요. 사람들을 싫어하고 오래된 석상에 날마다 기도를 해요.

오늘같은 날은 처음이었어요. 이건 분명 누나 때문이죠?"

"너는...?"

"내 이름은 애플팝이에요. 마을에서 제일 어린 마운틴엘프고요."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거니?"

"그 도마뱀을 더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 삐삐 말이니?"

"응. 말하는 도마뱀은 처음 봤어요."

나는 삐삐를 조심히 들어올렸다.

어느새 토끼 정도로 통통한 크기가 되어있는 삐삐는...

어? 뭐야? 얘 왜 이렇게 커졌어?

"삐삐야 너 혹시 또 뭐 먹었어?"

"삐?"

"아니구나..."

잠깐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사이에 덩치가 너무 커져있다.

"숲의 동물들은 다 커요. 근데 그 도마뱀은 특히 더 커요."

"숲의 동물들이 크다?"

내가 그 아이를 바라보며 물으면 애플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숲에서는 더 커요."

우리 숲에서는 더 크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삐삐의 성장과 관련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 숲에서 자란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빛을 띄고 있었고,

삐삐의 성장은 그것과 비교해도 더 크다는 의미였다.

아마 짐작하건데 원인은 하이엘프들의 페마르와 본질적으로 같을 것이다.

결국 마력을 담은 대지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아라카스트에 거주하던 하이엘프의 마력은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엘프임에도 그저 오래 나이를 먹으면서 쌓인

사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마력을 다루기보다는

그저 낙수효과처럼 쌓이는 것이었고, 그래서 고갈 위기도 머지 않았다.

그러나 마운틴엘프는 그 마력을 본인들이 유지하기로 결정해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마력의 순도나 질이 뛰어날 것이다.

아마 이 엘프들을 통제하던 시도라는 하이엘프의 작태를 어느정도는 인지하고 있겠지.

인간과 교류하는 것이 마력을 지키는데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라카스트의 엘프들은 마력을 페마르라는 수단으로 팔아치우고 있었으니.

거기서 내가 삐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내게 빌린 마력이니 어쩌니 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천신의 전령으로서 천각룡이 주로 엘프들에게 한 일은

마력을 빌려주는 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애플팝은 내게 계속 말했다.

"숲은 변해요."

"숲이 변한다고?"

"마력을 다루지 않으면 몰라요."

나는 다시 애플팝에게 물었다.

"마력을 다루지 않으면 모른다는게 무슨 소리야?"

"이거 말하지 말랬는데."

이미 다 말해놓고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상대는 아직 어린 아이다.

나는 조금 더러운 어른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삐삐를 살짝 안은채로 다시 물었다.

"쓰다듬어볼래?"

"진짜?"

"응."

애플팝은 삐삐의 등을 쓰다듬어보면서 헤벌레한 표정을 지었다.

삐삐도 아마 아이의 손길은 그렇게 크게 싫지 않은 듯 거부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긴장해서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마력을 다루지 않으면 모른다는게 어떤 의미야?"

다시 물어보면 애플팝은 우물쭈물하면서도 결국 입을 연다.

마운틴 엘프들은 지맥에 흐르는 마력을 임의로 조작해서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외지인이 마운틴 엘프의 마을을 찾을 수 없도록 한다고 했다.

"마운틴 엘프의 마을은 아까 그 축제하던 곳 아니었어?"

"아니에요. 나 거기서 안살아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마을의 위치는 다른 곳에 숨겨져있다는 의미다.

내게 마을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서

아까 삐삐를 넘겼더라면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마운틴 엘프가 숲에 사는게 이상하다 했다.

숲에서는 마력을 흘려 울창한 미로를 만들고, 들어오는 이들은 헤매게 만들어서

자신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하..."

나는 애플팝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날 도와주는거야?"

애플팝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아! 나 안 도와줬어요. 도와주면 어른들이 혼난댔어요."

"그래? 그럼 안 도와준걸로 하자."

"네."

"이제 가봐. 너무 오래 있으면 혼나겠다."

"안녕!"

애플팝은 그렇게 말하고 뛰어가버렸다.

나는 그제야 쪼그리고 앉아있었던 다리를 폈다.

저릿한 감각이 올라오는게 느껴진다.

"삐삐야, 갈까?"

"삐!"

대충 알았다.

삐삐는 내 어깨 위에 올라와있는 동안에 내가 마구 끌어올린 마력을 흡수하고

그걸 받아들여서 성장해버린 것이었다.

순수함의 포션을 먹여서 기반을 다진 후에 환단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얼떨결에 마력을 대량으로 주입해버린 것이었다.

"이게...육아...?"

생각해보니 얼떨떨하다.

삐삐의 뿔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잘 하고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계속 걸었다.

숲은 넓어서 다양한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튀어나오는 야생동물들을 마주하며 삐삐도 상당히 즐거워보였는데,

나중에 가서는 야생동물을 바라보며 내게 '삐이 삐' 하며 말을 걸기도 했다.

나는 그게 흥미로워서 동물들의 이름을 가르쳐주곤 했다.

"삐이!"

"응, 저건 여우야."

"삐삐!"

삐삐는 여우를 보자마자 신이 난 듯 여우를 따라하려는지 꼬리를 위로 세우고

비늘을 귀처럼 세운 후에 덩치를 부풀려서 내게 과시했다.

내가 그걸 보고 픽 웃으면 자기도 신이 나는지 삑삑 울다가 다시 내 품에 안겼다.

길을 걸으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삐삐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신의 전령이라는건, 천신이라는 상위 존재가 있다는 의미아냐?'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의도적으로 머리를 저어 털어버리며 다른 생각을 유도했다.

어떻게 금방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는 했다.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큰 강에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한쪽 다리를 푹 담가

축축해진 신발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주변에 놓인 큼직한 바위에 앉으면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가 엉덩이를 받쳐준다.

안그래도 오래 걸어다니느라 지쳤을 것도 같아서 삐삐를 살짝 어깨에서 내려주면

삐삐도 신이 나서 강가에 달려가더니 물을 마시면서 찰박거린다.

"확실히 그래도 마력 관리를 잘하기는 했네. 어딜 가서 앉으나 편안한걸 보면."

나른함이 몰려오기도 해서 나는 삐삐에게 말했다.

"삐삐야."

"삐이?"

"물놀이 재밌어?"

"죠아!"

"그래? 그럼 난 좀 여기서 잘테니까 삐삐는 혼자 좀 놀고 있어.

알겠지? 무슨 일 있으면 깨우고."

"삐잇!"

나는 삐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마법을 걸었다.

워낙에 천각룡은 튼튼하니까 죽을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간단한 계약을 맺고

위급할때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호출용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생명의 가호도 걸어주었다.

이정도면 안심이지.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바위에 누워 눈을감으니 졸음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처럼 한방울 두방울 잠이 내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를 적시는 것처럼 나른해진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리는 그 비는 멈추지도 않고 내리 퍼부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푸른 하늘에서는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비가 내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냐... 아무것도..."

낯선 사람. 하지만 익숙한 느낌. 이젠 이런 상황 자체가 지겨울 정도다.

"네가 말한대로 되어가고 있어."

"뭐가 말이야?"

"모든게 다. 결국 인간도 엘프도 오크들도, 전부 서로를 배척하고 있어."

내 말을 들은 낯선 사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결국 이렇게 되어야 했다는걸.

이게 맞는거야. 그렇게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뭐가?"

"분열을 의도하고 일부러 종족을 나눌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그래야 우리는 기도하게 되니까.

그래야 우리가 마력을 놓지 않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천신님이 우리를 봐주실테니까.

그렇지 시도라?"

"그...런가...?"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린... 그렇잖아. 마운틴엘프는 중립을 지키는 종족이었어.

우리 대에 들어서 선조들이 이루신걸 허사로 돌릴 수는 없는거야.

언젠가는 기회가 또 있겠지."

"기회? 기회일까? 과연 그런 날이 또 올까?"

"그럼... 물론이지. 난 그 날을 위해서 이 땅을 마력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거야."

이건... 시도라의 기억인가?

손을 앞으로 흔들어본다.

내 손이 아닌, 회백색의 손이 흔들린다.

적갈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나는 그저 상황을 따르고 있었다.

"말라세... 분명 마력은 언젠가 고갈되고 말거야.

그러면 우리는 오크를 더는 이길 수 없어.

지금의 저항도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패배하고 숨어야해?"

"숨어서 기다리면 분명, 반드시 천신님께서 도와주실거야..."

"말라세, 나는...."

"시도라... 천신님이 언제 우리를 져버리신 것 봤어?

지금도 순간일 뿐이야. 언젠가 다시 전령님께서 돌아오실거라고."

"아니야 말라세. 넌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어.

천신님은 이미..."

짝 하고 울리는 어쩌면 청명한 소리.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아가있다.

뺨을 맞았다. 꿈이라서인지 고통은 없지만 불쾌하다.

"말라세...넌...."

"아냐, 미안해 시도라. 우리 조금 진정하고 다시 이야기하자."

"넌 날 사랑하긴 하는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시도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닥쳐. 난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대체 천신님이 뭐라고 너는 매번 그렇게 집착하기만 하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래. 아니겠지. 네 눈에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그만하자 이제. 너도 나도 서로 믿지도 못하는 상황에

무슨 종족간 화합이니 이야기를 꺼낸 내가 병신이었어.

현실감이 없는 동떨어진 이야기나 하고 있던건 나였네.

넌 늘 맞는 말만 하지. 그렇잖아? 내가 주제넘었네. 맞지?"

"그 말이 아니잖아 시도라!"

눈 앞이 잠시 흐려진다.

돌아온 시야에는 작은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병신."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는 나무 밑동에 손을 얹은 채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병신이..."

툭 떨어지는 눈물이 앞을 적신다.

시야가 흐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단검을 그루터기에 박아놓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말라세..."

"이젠 가야 해 시도라. 말라세도 산의 곁으로 돌아갔을거야."

"산의 곁? 개소리 하지 말아요. 죽은 사람이 그런다고 돌아와?

당신이 오크에게 남편을 잃어봤어?"

"시도라...!"

"아니...아니에요... 이 마을은... 마운틴 엘프는 왜 매번 숨어야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 그저 천신만 기다리는거죠?"

"시도라..."

"난 천신이 싫어요."

"얘! 지금 그게 무슨...!"

"이거 봐! 사람이 죽었는데 너희는 천신만 찾지!

이 개새끼들. 그러고도 너희가 사람이고 엘프야?

동료가 죽었다고! 그런데 산의 곁이니 천신이니 좆같은 소리나 하고있고!"

주변의 모든것이 하얗게 흐려진다.

텅 빈 공간. 오직 흰 여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천천히 선명해지고

거대한 나무가 보인다.

밑동에 작은 단검이 박힌 나무는 파릇파릇한 잎을 드리우고 있다.

"오크는 침략을 멈추지 않아. 하이엘프는 인간들처럼 썩어버렸어.

개새끼들... 다 죽여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마운틴엘프는 그마저도 못하는 종족이야.

그 좆같은 중립은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어. 무능의 증거였지...

이제 나도 모르겠다고. 차라리 천신만 기다리는 저 병신같은 마운틴엘프가...

내 전부가 된 것 같아. 나... 내 뒤로 자라는 저 어린 엘프들을 책임져야 해.

환상뿐인 변화는 됐어. 이 작은 평화만 지킬 수 있게 해줘...

일상이 변하지 않도록... 그 천신님이... 이런 나라도 받아줄까..."

다시 눈 앞이 흐릿해진다. 천천히 정신이 들면 어느 새 잠에서 깨어 있었다.

푹 젖은 등이 축축하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서 가방에서 커피를 꺼내 마셨다.

다 식은 커피였지만 마실만 했다.

"후우... 끝까지 사람 맘 싱숭생숭하게 진짜..."

대지에 마력과 함께 섞인 기억이었다.

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마운틴엘프의 고질적인 성격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걸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을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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