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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64화 (164/303)

〈 164화 〉 아직 못다한 일

* * *

눈을 뜨고 커피로 목을 달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삐삐야~! 이제 가자!"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삐삐...야?"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강가로 달려갔다.

삐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근처에서 놀라고 했는데.

곧바로 위치 추적용 마법을 발동하고 느껴지는 마력을 따라 뛰었다.

분명 아직 멀리가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애타게 불렀다.

"삐삐야! 얘! 삐삐야!!"

마력으로 바짝 강화한 신체로 한참을 달려도 삐삐의 위치는 아직 멀 뿐이다.

설마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린건 아니겠지?

한참을 달렸을까, 나는 마운틴엘프의 축제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마을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미 엘프들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삐삐의 위치는 분명히 이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이..!"

순간 열이 확 뻗쳐서 마력을 모았다.

그때였다.

"삐이?"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면 엘프들이 떠난 곳에서 여유롭게 과일을 먹고있는

통통한 도마뱀이 있었다.

어째 더 커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너 여기서 뭐해?"

"삐이...?"

"너 내가 분명히...! 아니다... 아니야... 걱정했잖아.

왜 여기서 과일을 먹고있어..."

"삐삐..!"

돌아보면 고기도 먹은 모양이다.

어째 채소에는 한입씩 베어문 흔적은 있는데,

그 이상 먹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다시 삐삐를 들쳐 안았다.

이제 상당히 무게가 나가서 어깨 위에 얹어놓기도 어렵다.

원래 용이라는 애들이 이렇게 금방 크는건지, 아니면 우리 애가 우량아인지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어서 걱정이 된다.

삐삐는 내 어깨 위로 올라오려고 엉금엉금 기어올랐다가 이제 내 어깨보다 크기가 커져서

거기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시 주르륵 미끄러지듯 돌아왔다.

그래도 좀 커져서인지 이제 내려오는걸 그닥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몇 번 떨어져 봤거나.

자란 뿔은 양처럼 둥글게 말려 앞으로 향하고 있었고,

비늘은 조금 더 단단해져있었다.

내가 삐삐를 안아들면 삐삐는 졸린지 꾸벅꾸벅 눈을 꿈뻑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삐이이..."

그리고는 스스로 가방에 쏘옥 들어가버렸다.

아무래도 자기 스스로 판단하기에 내가 삐삐를 안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강을 따라 상류로 천천히 걸어올라가기로 했다.

상류에는 분명 마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강 상류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물고기들은 언제라도 삐삐가 먹을 수 있게끔

몇 마리 잡아올려 비늘을 떼내고 조심스레 내장을 빼내 씻은 후에

발화부로 불을 지펴 훈제로 굽기 시작했다.

삐삐가 유독 많이 먹으니까 그만큼 준비하겠다고 하나 둘 잡아올리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8마리나 낚아버렸다. 하나같이 크기가 상당해서인지 굽는데도 오래 걸렸다.

붕어나 잉어 따위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훈제로 만들다가 한마리 구워 먹었더니

상당히 맛이 좋았다.

삐삐도 한마리 줄까 생각해서 가방을 살짝 열어보면 삐삐는 온데간데 없고

몸을 둥글게 만 삐삐 정도의 크기인 고치가 있었다.

고치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삐삐의 비늘과 유사한 색의 구체화된 마력이

가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깨우지 말라는 의미겠지?"

나는 적당히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 옆에 생선을 차곡차곡 쌓았다.

가방이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게 만들어져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삐삐가 생선에 깔렸을 것이다.

생선을 굽는 냄새가 노릇하게 퍼져 주변에서 산짐승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너구리, 여우 같은 짐승들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살쾡이도 몇마리 기어왔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주춤주춤거리기에 내가 먹던 생선을 조금씩 나눠주었다.

상당히 잘 먹는 모습에 만족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먹던 것 이상은 나눠주지 않았다.

우리 삐삐 먹일걸 줄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그제서야

하나 둘 돌아가는 동물들을 보며 나도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다시 발을 재촉한다.

강을 따라 오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숲을 끼고 그 뒤로 산맥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산맥을 따라 마운틴엘프들이 사는 것 같다.

숲보다는 산을 따라 길을 걷는 모양새가 되었고, 숲이 끝나갈 무렵 보이는

산등성이와 능선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조금 높은 곳에서 둘러보면 어차피 이 주변에는 마을은 고사하고 쉴만한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운틴엘프의 영역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어느새 송골송골 맺히는 구슬땀이 흐른다.

산속에서 살던 옛 생각이 난다.

밤이 찾아오고 발화부로 작은 불을 비추고 그 앞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주변을 물색해서 찾아낸 최적의 장소였다.

적당히 강을 따라 식수가 공급되기도 했고,

생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나무열매가 많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주변 바닥이 적당히 평평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다 싶어서 자리를 잡으면 금새 귓가에서 벌레 소리가 들린다.

밤의 산은 상당히 벌레가 많이 꼬인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나를 질책하듯

엥엥대는 벌레를 한두마리 잡아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력탄을 산개했다.

"에이 씨, 발악하지 말고 그냥 곱게 죽어라 좀 제발!!"

아무 곳으로나 퓽퓽 던져대는 마력탄은 팡팡 터지며 벌레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악!"

거기에 이질적인 목소리가 섞인 것은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 누구 계시나요?"

"아, 아닙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아뇨, 계셔도 괜찮아요."

어둠 속에 묻혀 멀리서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향해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면 작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오늘 밤만 같이 좀 보내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남자는 타박타박 내 앞까지 걸어왔다.

두꺼운 옷을 여러 겹 껴 입은 모습이 그냥 보기에도 더워보였다.

거기다가 두꺼운 장갑에 목도리, 마스크까지 둘둘 두르고 있어서

사실 조금 어색해보이기도 했고, 머저리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왜 나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안 더우세요?"

"아까 물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좀 추워서요. 벌레도 많은 것 같고요."

"아... 그러시다면 할 말은 없는데...혹시 생선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이런 추레한 몰골을 하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 나는 맘에도 없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뭐라도 좀 챙겨 먹어야 겠다 싶을 정도로 어디가 모자라 보여서였다.

"괜찮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이 산에 계시는 건가요?"

"아, 저는 이 산에서 연구할 게 있어서 잠시 올라왔다가 하산할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아... 그러시구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데릭 브라이어 로드원이라고 합니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언데드 데릭...?"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목도리를 둘둘 풀기 시작했다.

"이미 아시는군요. 뼈만 남은 상태로 다가가면 두려워하실까 생각해 나름 가려봤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그래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리아씨."

그렇게 말하며 그가 목도리를 다 풀고나면 목도리는 휘릭 풀리더니

발목에 사르륵 감겨 형태를 바꾸더니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그리고 두꺼운 의복은 마치 실타래가 풀어지듯 산개하고 너울너울 흩어져 긴 로브로 늘어졌다.

그 안에서 뼈만 남은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내 앞에 앉았다.

"다시 소개하죠. 최초의 탈주자 데릭 브라이어 로드원입니다."

"날 보러 온건가요?"

내가 표정을 구기며 그렇게 말하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거짓말을 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양해를 구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저한테요?"

"보시다시피 저는 뼈만 남았습니다. 이제 뼈의 강도와 경도에 강화를 거듭해

반 영구적으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만,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마력을 받고 싶다 이거죠?"

그는 고개를 또 한번 가볍게 끄덕였다.

"상당히... 오래 찾아다녔습니다."

"목적은 그거 하나가 전부인가요?"

"목적이라고 하심은?"

"생명의 마력을 받고 싶어하시는 이유가 뭐죠?"

"영혼과 뼈. 이 두가지만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살과 근육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요.

물건을 들고, 음식을 섭취하고 인간으로서 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느끼고 싶을 뿐입니다.

지금 저는 감각이 없으니까요.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냄새를 맡는 일도 할 수 없어요.

시각 역시 마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대화는 전음으로 유지되고 있고요."

"마력탄을 맞았을 당시 통증은 있으셨던 것 같던데요."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인지할 수는 있습니다.

인지와 느껴지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것이니까요.

'악'이라고 말한 부분을 솔직히 알려드리면

그냥 살면서 학습한 결과물을 순간적으로 도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래요?"

"이 몸으로 살면서 뼈가 부러질 일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아플 일도 잘 없었거든요. 가끔은 그냥 편히 죽을것을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후회하시는건가요?"

"그렇죠. 네 후회죠. 하지만 분명 그냥 죽었다면 지금보다 더 후회했을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건 다 해 보는 중이죠."

"도르테우스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언젠가 돌아갈 겁니다.

그래도 그 전에 아직 할 일이 있거든요.

저의 이름을 아신다면 아마 어느정도는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로드원입니다. 죽을 상황에서도 살아날 하나의 길을 찾는 사람이죠.

모든 일을 바라본 자로서 다른 로드원들에게 해 줄 말이 아직 남았거든요.

그 이후로는 그래, 도르테우스를 상대로 협상이나 해볼까요."

나는 이 어처구니 없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가득찬 것 같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의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네메시스가 아닌 곳에서 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차원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이상하고 골치아플거란 말이 이런 의미구나...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마력을 조금 양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거절하면요?"

"생각이 바뀌실 때까지 설득하겠습니다."

그때 느껴졌다.

이건 진심이라고.

진짜로 나를 끝까지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쪽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하는게 좋다.

"그 대신 저한테 해 주실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음..."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더니 팔을 쭉 길게 뻗고서 로브 소매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이건 어떠십니까?"

"이게 뭔데요?"

"그 가방 안에서 잠들어있는 오래된 씨앗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뼈마디 뿐인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가 노트를 펼쳐보면 그 안에는 천각룡을 비롯한 용의 생태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이건 뭐죠?"

"아르간티아 초국이 존재하던 당시에 용이 비교적 지금보다는 자유로웠을 때

몇 자 적었던 겁니다."

"잘도 우리 아이를 찾으셨네요."

"전 눈이 없으니까요. 마법으로 눈을 대체하게 되면

종종 가려져 있어도 생명반응이 보이거든요.

기능만 따지면 눈보다 더 좋습니다. 감성이 없어서 그렇지."

"감성이 없다?"

"어떤 색인지 구별은 가능하지만 색 자체를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붉은 사과를 보고 붉다고 말하는 것과 텍스트로 [붉은 색]을 나타내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런 면에서도 감각의 부재가 아쉽다고 봐야겠죠."

"거기 잠깐 서 계세요."

나는 그의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었다.

하나씩 갈래를 엮어넣으면서 마법의 방향성, 세기, 위력, 순도를 조절한다.

마법진의 개요를 간단히 풀어 설명하면 곧 한겨울의 눈싸움과 같다.

세기는 던지는 힘의 세기, 위력은 던지는 눈덩이의 크기, 순도는 얼마나 순수한 눈인지를 정한다.

굳이 더 따지자면 그날의 날씨, 풍속, 컨디션, 팔의 건강 상태, 시력 따위를 고려하겠지.

마법진은 그런 부분을 부차적으로 설정해서 눈을 던지기까지의 과정이다.

이윽고 마력을 흘려넣으면 뼈를 감싸듯 퍼져나가는 온기에

데릭은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음... 우흐흐흐.... 익숙하군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감각입니다.

간질간질하다고 하나요? 참 따스하군요..."

마력은 그의 몸을 관통해 지나간다.

"고맙습니다. 비록 마력이 남지는 않은 모양입니다만, 감각을 느낀건 오랜만이군요.

약속드린대로 그 노트는 드리겠습니다. 요긴하게 쓰시길 바라지요."

"기다려요. 지금 그 몸은 이전과 다르니까. 간단히 설명 정도는 해드릴게요."

"그런..가요?"

"생명력은 확실히 담겼습니다.

그 뼈안에요. 이전의 혼과 뼈로 구성되었던 몸에 생명이 새로 생겼다는 말이에요.

아마 지각을 구성하는 부분이나 감각기관은 정상적으로 작동이 가능할 거에요.

물론 상시 소모하는 마력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요.

마법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기능한다는 말이에요."

"오... 고맙..습니다. 이건 상당히 큰 성과가 있었네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무엇이든지요."

체헤게를 알아요? 라는 말이 목 바로 아래서 턱 멎는다.

이제 물어서 뭐하게 싶은 생각이 꾹 틀어막는다.

이제는 피드 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텐데.

"로드원의 두번째 탈주자라고... 알아요?"

"......"

그는 말이 없었다.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 그 녀석을 네메시스로 보내고 도르테우스를 만나러 갈겁니다.

그 때문에 아직도 도르테우스를 바로 만나러 가지 않는 거지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그 진동하는 사령술의 냄새와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 사이에서

비릿하게 풍기는 정의 냄새를 맡았으니까요.

저 같은 놈을 둘 씩이나 만들면 안되잖습니까."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제 후손이니까요.

제 핏줄을 이어받은 거겠죠.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제가 선조님으로서... 혼내러 가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뒤로 돌아섰다.

"이 시간에 가시게요?"

"저는 눈이 없으니까요. 시력이 있어도, 마법으로 보조할 수 있습니다.

대낮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지요."

"안녕히...가세요."

그는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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