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미리타엔의 대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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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들어."
조용한 복도에는 투덜대는 목소리만 울린다.
새초롬한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모습을 하고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서
플로라는 가만히 자신의 앞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미리타엔의 대공이라고 불리는 세 명이 그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요?"
먼저 입을 연 것은 데레코즈였다.
다들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사이에 과감하게 첫 수를 던진 것이었다.
"왜 이 나라는 내가 아무리 이미지 개선을 하려고 해도 매번 잔인하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도덕성이 없다느니 떠드는거야? 그러니까 미리타엔에 정착하는 사람이 적은거아냐?
말해봐. 내가 분명히 경제도 그렇고 제도도 그렇고 이전에는 유래가 없을 수준으로 발전을 시켰는데.
야만적인 국가라는 타이틀. 이게 여전히 우리 미리타엔에 꼬리표로 따라붙었어.
너희는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어?"
엔시온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분명 아무 감흥도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이 나라는 무령인 에리아의 영향으로 조금씩 천천히 인식을 바꾸고 있었으니까.
내정으로 썩어버린 정치인을 갈아엎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느긋하게 진행되더라도 머지 않은 미래라고 생각하던 그녀였지만
눈 앞에서 플로라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에 괜히 어딘가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하나?'
그런 생각이 그녀의 가슴에 남았다.
그런 그녀가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게비디가 말했다.
"아무래도 문화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미리타엔에 존재하는 콜로세움은 미리타엔의 내수시장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흥입니다.
잔혹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콜로세움이 존재하는 이상,
잔인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씻을 수는 없겠지요."
그 말에 데레코즈도 동의를 표했다.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그 꼬리표로 인해서 이제껏 미리타엔이 손해를 본 적이 있었습니까?
무력으로 강탈하고 힘으로 찍어눌러 원하던 바를 쟁취하는 것이 과거부터 전해져온 미리타엔의 방식이었습니다.
외교상에서도 도드라지는 문제는 없었으며, 세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강국으로서 미리타엔 제국이 존재하는데
이제와서 굳이 그 잔혹성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여쭙겠습니다."
그 말에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플로라는 애니를 안고 말했다.
"그래 사실 나도 어쭙잖게 도덕을 챙기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우리 미리타엔 출신 인원이 타국에 나가서 미리타엔 출신이라고
대우받지 못하고 차별적인 시선으로 소통에 제한이 생기는거.
그게 싫은거야."
게비디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참았다.
그냥 솔직하게 에리아 무령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삼키며 말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거지."
플로라가 그렇게 말하면 가만히 있던 엔시온이 입을 열었다.
"미리타엔과 아직 교류가 없었던 이종족 문화권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는건 어떻겠습니까.
남부에는 유레크로스가 가로막고 있다지만 동부와 북부로는 아직 길이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레크로스나 엠페레스에서 아직 시도하지 않은 점만 따져도 도전 가치는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한다면 이미지의 탈피에 좋을 것이고
혹 수틀려 무력으로 진압해 종속시킨다고 해도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합니다.
때마침 유레크로스와의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은 아직 벼려진 상태입니다.
더욱이 유레크로스에서 피해 수복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미리타엔을 공격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도 유효합니다.
임의로 별동대를 편성하거나 중직에 있는 인물을 일시적으로 보냈을 때,
타국에서의 견제가 없다는 점은 이익입니다."
엔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플로라가 말했다.
"그럼 아직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종족을 복속시키는걸 우선적인 목표로 하자는 거야?"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미리타엔의 특성상 즉시 콜로세움을 건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콜로세움과 연계된 사설 도박과 연구소, 공장의 상품 출하까지 전부 손볼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황제꼐서도 현재 연구소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으시리라 판단했습니다."
"그 말대로야."
연구소를 함부로 건드리면 그 때야 말로 정말 에리아의 돌아올 장소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꼴이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 플로라의 결정을 앞당겼다.
"그러면 누구를 담당자로 내세워야할까?"
"그 건이라면 이미 적임자가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엔시온이 다시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으면 플로라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고 물었다.
"무령이 그걸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무령은 지시한 국가로 즉시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현재 각국을 여유롭게 배회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더욱이 현재 위치를 찾아 황명을 전달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게된다.
어... 잠깐, 뭐야? 우리 쪽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이 없어?"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잠시 펴고 고민하다가 왕좌에 다시 앉았다.
애니의 털을 골라주면서 말했다.
"야, 가서 누구 보낼지 적임자 추천해와. 각자 두명씩. 출발."
플로라는 더 이상 무의미한 회의를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엔시온이 물었다.
"그 말씀이신 즉슨, 아직 교류가 없는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이미지를 개편하시겠다는 뜻으로
제 계획을 채택하셨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겠네."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를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야, 그리고 자꾸 나한테 혼기니 뭐니 하면서 개소리하는 애들 싹 모아서 콜로세움에 쳐넣어.
자꾸 같잖은 애들 모아서 황궁으로 보내는 것도 한두번이지.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애들을 짜증나게."
"처리하겠습니다."
게비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알현실은 조용히 또각또각 들리는 구둣발소리만 울렸다.
"새로운 팀이라...꾸려볼 필요가 있겠군."
그날 콜로세움에는 꽤 많은 수의 남성이 들어왔다.
귀족들이 제각기 거금을 들여 자신의 독자를 빼내달라고 연락을 하기도했고
경호원을 붙이거나, 노예를 사서 아들의 대신 참전시켜달라거나 하는 이야기들도 오갔다.
그때마다 게비디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원래같으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너무나 유능한 킬레리들 탓에 결과가 바뀌었다고 해도 좋았다.
황궁으로 간 편지를 모아 수합하고 분류해서 귀족을 분류하고
이들의 동선을 파악해서 잡아오는 것이 킬레리들에게는 너무 간단했다.
그래서 게비디와 플로라의 예상보다 많은 인물들이 우르르 모인 것이다.
어차피 죽나 사나 별 차이도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길게 보지 않아도 곧 죽을 이들이다.
콜로세움이 아니더라고 어차피 또 혼기를 들먹이며 플로라 혹은 엔시온에게 찾아갈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에 굳이 여기서 잘라내지 않아도 금새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걸 굳이 경고할 의리는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챙긴 돈으로 에리아의 연구소나 가게를 지원하는게 더 유리하리라 판단해서
게비디는 적당히 이들을 풀어주고 그 결과를 플로라에게 별도로 보고서로 정리해 올렸다.
플로라는 독단적인 게비디의 행동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별 이야기 없이 수긍하고 넘겼다.
혼기를 들먹이며 찾아온 귀족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한둘이라면 그냥 처형하고 넘기려고 생각해서 게비디에게 위임했던 것이었으나,
이 인구가 정말 모조리 처형당해버린다면 이후 직무를 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플로라는 포기하고 따로 공문을 만들어 거리에 붙이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게비디에게도 차후에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은 남겼다.
이 때문에 결국 플로라는 합법적으로 콜로세움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모였고,
더불어 형벌로서 콜로세움의 범위가 늘어나게 되었고. 플로라의 모진 명령과 처분에
미리타엔의 이미지는 더욱 가혹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플로라가 다음은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는 탓에 게비디도 이전보다 더 엄격하고
깐깐하게 콜로세움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콜로세움의 난이도는 점차 올라갔다.
그러나 게비디는 자신의 권력이 늘어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굳이 보고하지 않았고
플로라는 마력 적성에 의해 가학이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가혹하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으므로
결론적으로 왜 가학적인 국가라고 불리는지는 모르는 채로 미리타엔은 점점 만만히 볼 수 없는 국가로 자리잡아갔다.
덕분에 이 이미지를 진정으로 탈피하길 바랐던 엔시온 플라이트는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 의견을 채택한다고 했는데. 분명히 이 미리타엔을 조금 더 평화로운 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하겠다고 했는데.
왜 점점 더 가혹한 처사를 거리낌없이 행하는가. 그리고 나는 명백히 이 현상을 고깝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왜 황제에게 한마디 첨언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엔시온의 고민은 생각보다 상당히 비틀린 방향으로 귀결되어 버렸는데,
플로라가 화를 내고 귀족들을 본격적으로 쳐내는 것을 바라보며 동시에
콜로세움의 관리에 하나 둘 박차를 가하는 게비디의 모습과 이를 보고 만족스러워하며
귀족들을 그 사지로 몰아넣는 플로라의 미소를 보았고.
날마다 플로라에게 어설프게 구혼하던 귀족들이 하나 둘 제 풀에 꺾여 지치는 것을 보면서
엔시온은 저들이 플로라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황제께서는 잘 해보려 하신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제도 모르는 저들이 자꾸 황제를 자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가학성이 자꾸 나라를 좀먹는 거야...
내가 막아야 한다.'
황제 플로라는 몰랐지만 자신의 열렬한 팬 하나가
자신의 혼사길을 진심으로 틀어막겠다고 다짐해버린 순간이었다.
이후 플로라에게 청혼하거나 혼인 관련 문제로 먼저 입을 여는 귀족은 사라졌다.
플로라의 가학적 처사와 더불어 엔시온의 정신적인 고문을 견딜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앗다.
엔시온은 교활하고 치밀하게 주변 관계를 하나씩 쳐내고, 이어서 그가 의지하던 기반을 차례로 무너뜨려갔다.
황제에게 섣불리 혼인의 화두를 꺼냈다가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입은 열리기도 전에 꾹 틀어막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스스로 모든것을 자포자기할 때가 오면 음흉한 미소를 띄고
어디선가 나타난 데레코즈가 위로의 말을 건네며 밥이라도 한끼 들고 기운내라는 말을 한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이들에게 데레코즈의 이미지는 점차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포의 존재였다.
황제가 보내는 마지막 만찬이라느니, 먹은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괴소문들 역시 은연중에 퍼져가고 있었다.
이를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요식사업에 뛰어든 데레코즈는 몰랐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플로라의 비혼이 곧 미리타엔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일종의 미신이 생겨났다.
뭐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행동이 제일 두려울 수도 있는 법이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좀 정리된 이후로는 플로라도 화를 많이 내지 않았고
콜로세움에도 여유가 생겼으며, 엔시온 대공도 조용했다.
공포의 존재였던 최후의 만찬을 전하는 대공 데레코즈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활기를 찾은 귀족들을 보고 데레코즈도 만족하며
이제 위로는 필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미리타엔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건 대공들과 황제였지만
정작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이들 뿐이었다.
젤렌지가 사라지고 하리지는 강제로 조용해진 상황에 크레마르는 자신보다 더한 황제와
대공들을 보고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진 '가짜 광기'에 불과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물론 제일 신빙성있는 이야기는 데레코즈와 모종의 결탁을 위해 그를 찾아간 크레마르가
1주일간 데레코즈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미쳐버렸다는 주장이었지만
데레코즈 입장에서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식곤증(?)으로 졸고있는 이를 잠시 재우고,
일어날때쯤 식사를 제공하며 일주일간 대접한 것 뿐이었다.
일주일째 되는 날에는 영문도 모르고 벌벌 떠는 크레마르가 부쩍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그, 자네는 일주일이나 여기 있었는데 집에는 안가도 되나?"
라고 물었더니 꽁지빠지게 도망쳤을 뿐이다.
데레코즈는 자신의 음식이 여러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찾아준다는 점에 보람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 이 요식업계에서 점차 점포를 늘리며 규모를 확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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