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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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이 떠나고 나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나는 램프를 꺼내놓고 노트를 읽었다.
한참을 읽다보니 천각룡의 페이지가 나타났다.
천각룡의 생태나 그 특징에 대해서만 나타나 있었는데
어떻게 성장하고, 무엇을 먹고 어떤 곳에서 서식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일개 개인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현재 남은 자료 치고는 상당했다.
읽다가 멈칫한 부분은 날개의 부분이었다.
[천각룡의 알은 주변의 마력량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차이를 보이게 되고,
여기서 부화에 필요한 최소 마력 요구량을 달성하게 되어야 알이 부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충분한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경우 날개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날개가 형성되지 않은 개체는 무리에서 배척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 날개는 성장기가 지나버리고 나서는 회복되는 경우가 없다.
날개가 없는 개체는 마력을 모으는 일이 원활하지 않게 되어 브레스를 사용하지 못한다.
날개는 단순히 비행의 목적 외에도 용에게 마력을 원활히 순환시키는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마력은 비늘을 통해 흡수되고 날개를 통해 관리된다. 정확히는 날개와 이어진 뼈와 장기를 이른다.
그러나 일부 개체에 따라서는 자연적인 마력이 아닌 정제되었거나 적성이 부여된 마력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적인 경우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성장기 혹은 유아기에 지속적으로 마력에 노출될 경우
그 마력에 적응해 진화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날개와 비늘을 비롯한 각종 부위가 강해지고
일반적인 개체의 천각룡에 비해 더 강한 마력을 지니게 된다.
알에서 한 차례 껍질을 통해 여과된 마력으로 부화하는 것과,
직접 받아들인 마력을 통해 스스로 필요한 부분을 진화시키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진화하는 과정 중의 천각룡은 자신의 주변을 얻은 마력으로 두르고 천천히 흡수하게 된다.
이는 알 내부에서 마치지 못한 진화를 개체 스스로가 원하게 되어 둥근 고치를 형성하게 되는데,
스스로 방어 및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경계체계를 해제한 것이다.
이때는 모든 위협에 매우 취약해지며 도중에 고치가 파괴될 경우 개체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천각룡이 스스로 고치를 짓고 진화를 선택하는 것은 야생의 개체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고치로 진화를 하는 와중에 많은 에너지를 요구로 하기 때문에 진화 이후 먹이를 공급받지 못하는 경우
3일 이내로 아사할 수 있다.]
나는 다시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어제보다 더 커진 고치가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고, 안에 비치는 그림자는
삐삐가 어제보다 더 통통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걱정 안해도 되겠지?"
내가 할 일은 그동안 이 아이를 지켜주는게 전부라는 의미였다.
나를 믿고 가방 안에서 진화를 택했다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좋은 친구로서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조금 더 읽어보기로 했다.
[천각룡은 날개가 없는 개체를 알에서부터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알에서 느껴지는 마력량을 보면 알 수 있다.
날개가 없는 개체는 무리에서 버려지고 혼자 남겨지게 되기 때문에
맹수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알이 워낙에 튼튼하지만,
마력을 다룰 줄만 안다면 알이 부화할 정도로만 적은 마력을 모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각룡 자체의 소재가 워낙에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밀렵꾼에게 노획당해
암시장에 몰래 팔려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알 자체가 귀하기 때문에 잘 없지만
개중 부화한 천각룡의 관리를 소홀히 하다가 어린 개체를 방치하고 통제되지 않은 개체가
사고를 친 기록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삐삐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팔린 알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새끼를 낳는 용족이나 알을 애지중지 관리하는 용족들과 다른 천각룡만의 특징적인 점이
알을 배척한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매정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날개가 없는 개체는
철을 따라 원거리를 비행하는 천각룡무리에 낄 수 없으며 하나의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많은 개체가 함께 발목을 잡혀야 한다. 또한 마력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몸에 저장되는 마력을 통제하지 못해 자칫 비늘이 무르거나 과하게 단단해지는 경우 또한 있다.
비늘에 한정한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뼈가 물러지는 경우나 뿔이 물러지는 경우에는
생활이 어렵거나 뿔이 기형적인 모양으로 자라 한평생 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각룡은 알을 배척하고 떠나게 되는데, 알이 오랜 기간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고
알 상태로 존재하게 되면 마력을 주변에 환원하고 바스러져 사라지게 된다.
이 기간은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년까지 버틸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기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신화나 전설에 의하면 수백년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유아기에서부터 날개가 없는 개체는 지속적인 영양을 보충해
마력이 없어도 뿔의 관리가 어렵지 않도록 단순 육류가 아닌 균형잡힌 양분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
주로 키틴질의 칼슘을 위주로 하는 녹용이나, 게, 랍스타를 섭취해야 하며
사포닌이 많은 산수유, 인삼따위의 식품이 좋다.
그래서 천각룡은 유난히 사슴이나 갑각류 따위를 자주 잡아먹는다.]
"어쩐지 애가 공진단을 집어먹더라니... 많이 만들어둘걸."
대강 페이지를 넘기면서 얼마나 자세히 썼겠어? 하는 심정으로 읽었는데
정말 자세히도 써놨다.
왜 흑마법같은걸 연구한거지? 이정도면 그냥 생물학자 해도 되겠는데.
노트를 가방에 집어넣고 삐삐의 고치를 바라보며 언제 다시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그 반짝이는 고치를 살짝 쓰다듬어보고 다시 산 위로 올랐다.
꺼낸 랜턴을 한손에 들고 산길을 걸으면 바닥에 자갈이 잘그락대며 밟혔다.
아무래도 강 근처라서 그런지 반질반질한 자갈과 모래가 밟혔다.
천천히 강가를 따라 걷다보면 물에 바스러지는 탄산질감이 느껴진다.
발을 살짝 담그면 사르륵 올라오는 느낌이 영락없는 탄산이었다.
다만 일반적이지 않은 느낌이 확실했다.
일반적으로 탄산은 혀로 느끼는 정도이지, 피부에 닿아 느껴질 정도로 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르르 터지는 감각이라고 하면 어지간히 강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혹시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을 빈 포션병에 한가득 담았다.
나중에 자세히 분석해볼 수도 있으니까.
분명 산의 위에서 흘러오는 상류의 발원지에 뭔가가 있는 거겠지.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 되어 빛이 눈 위로 쏟아지면 그제서야 앞이 보인다.
나는 들고있던 랜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폭포가 산 위에서 맑은 물을 쏟아부으며
그 아래로 안개처럼 퍼지는 물보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두울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맑은 폭포를 마주하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아주 인간적인 생각을 했다.
"목욕하고 싶다."
마력을 통해서 몸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목욕의 상쾌함을 대체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을 담그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몸을 담글 기회를 발견해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간다.
빠르게 달려 산길을 올라간다.
산이 상당히 가파라지기는 했지만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등산객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표지판이 하나 박혀있었는데,
내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빛이 바래 있었다.
표지판은 있어도 올라가기 쉽도록 묶은 밧줄 하나 없어서 꽤 디디기 힘든 바위를 밟아야 했다.
사실 나야 떨어지면 조금 아프고 그만이라지만 삐삐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올랐다.
나뭇가지부터 돌부리까지 집히는건 뭐든 잡고 올라갔다.
그러는 와중에 옷이 상당히 더러워지기야 했지만
그런건 사실 아무 상관 없었다.
겨우 올라간 산 위의 폭포에 따로 잘 만들어진 뒷길이 있었다는 점만 빼면.
아니 왜 뒷길을 만들어놓고 꽁꽁 숨겨놔서 사람을 이렇게 개고생을 하게 만드는지.
그러나 결국 올라오고 나니 느껴지는 상쾌함은 분명 그 고생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보람이 있었기에 나는 불만은 잠시 접어두고 목욕을 하기로 했다.
이런 산골까지 올라오는 사람도 많이 없을 테니까.
옷가지는 벗어두고 폭포가 떨어지는 아래에 모인 샘에 발을 들이면
발끝으로 탄산이 부서진다.
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뜻을 접고 다른 인생을 살기로 했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기도 했으며
교국으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길을 꺾었고, 마운틴엘프들의 숲을 지나서
뜻밖의 거래도 한 차례 있었고, 결국 그렇게 기어이 도착한 이 연못에서 쉬면서 든 생각이
결국 어떻게든 길은 있고, 그걸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였다.
오랜 시간 틀어박힌 인생이 결국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되기까지
그 누구에게도 미리 언질조차 받지 못했다.
적응하려고 하는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저 살아가고 버티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일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져도, 능력이 있어도, 지식이 있어도
결국 그것 역시 세계의 일부일 뿐이었다.
변화하는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술이고 문화일 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평범함이 고귀해지는 것이다.
"후우..."
시원한 감각에 내뱉은 숨과 함께 바르르 몸이 떨렸다.
"하여튼 나는 물에 몸만 담갔다 하면 사람이 주책을 피워서 문제라니까."
머리를 물 속에 담그면 샘 아래로 헤엄치는 생물들이 있다.
아래에서 본 것 같은 잉어는 없어도 붕어는 헤엄치고 있었고,
독특한 수초들 사이로 헤엄치는 갈겨니떼와, 뒤를 쫒는 푸른 뿔치가 있다.
그 생물들을 보면서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눈에 강산성의 물질이 닿으면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악!!!"
빠르게 얼굴을 샘에서 빼냈지만 그래도 눈이 따끔거리는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비비며 깜빡인 후에 가방에서 급히 거울을 빼내 눈을 살폈다.
조금 붉게 충혈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참 거울을 들고 눈을 바라보다가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당황한 표정의 남자를 거울로 발견했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물 속으로 다시 잠수해야 했다.
첨벙 소리가 크게 번진다.
"저기요! 나오세요!"
아이씨...
"저기요! 그 안은 위험하거든요!
괴수가 살아요! 아가씨! 부끄러운건 알겠는데 나오세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억지로 한 팔로 들쳐메고 물 밖으로 나온 후에 고개를 돌린 채로
내게 큼직한 수건을 던져준 후에 말했다.
"왜 그런데서 수영을 해요? 다 벗고 그러면 안되는 거에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알건 다 아시면서 거기서 그러고 계시네.
여기 원래 출입 통제구역이에요. 어떻게 올라오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그... 어쩌다보니까..."
"분명히 입구 잠궜는데 어디로 오셨어요?"
"그 이 앞에 가파르긴 해도 나뭇가지 잡고 올라왔는데..."
"아니 누가 이 절벽을 기어올라요? 하 나참 미치겠네...
여긴 무슨 여행지도 아니고 관리구역이거든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아니 대체 저 절벽은 어떻게 기어오른... 아, 죄송합니다.
흠흠..."
그는 내게 성을 내며 나를 보려다가 내 몸을 보고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순수한건지 모지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화할 상대는 생긴 모양이다.
"관리가 되는 구역이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 근처에 관리를 올 만한 나라가 없는걸로 아는데?"
"이런 일은 대부분 교국이죠. 교국에서 파견나와서 이 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조지라고 합니다."
"이 샘에 뭐가 있나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폭포라고 봐야죠.
순수의 폭포라고 하는데요, 예전에 신화에서 선지자가 이곳에서 몸을 씻고
청결하게 정제되었다고 해서 그 이후로 순수의 폭포라고 불립니다."
"선지자요?"
"네. 그래서 한동안 분쟁도 심했고요.
아시겠지만 이곳이 마운틴엘프들의 숲과 맞닿아있어서
그쪽에서는 천신과 그 전령이 몸을 씻는 장소라고 해서
서로 이 구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교국 측에서는 인원으로 몰아붙인거지
그 외에는 어떤 정당성도 없었거든요.
사실상 관리도 엘프들이 하던걸 빼앗은 것 뿐이고.
순수니 뭐니 하면서도 분쟁지역이라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한거죠.
종종 이곳에도 저 엘프놈들이 쳐들어와서 시위하다 가고 그럽니다."
"시위를 한다고요?"
"시위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종종 샘물도 떠가고, 폭포에 몸도 담그고 하다 가죠.
교국에서 파견나온 인원들이 교대로 감시하기야 하지만 늘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런 정도는 그냥 유도리로 넘겨주고 하는거죠.
그거 일일이 막아서 득될 것도 없으니까요.
이걸로 사람도 죽고 했으니까요. 이쪽도 사실상 면목이 없는거죠.
분쟁도 있었고 사람도 죽었는데 이제와서 구역 뺏어놓고 구경만 하라는 것도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아까 괴수라는건?"
"아, 괴수요? 이야기가 좀 긴데 괜찮으십니까?"
"시간이야 차고 넘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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