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상황정리
* * *
화려한 백색광이 산개한다.
마치 그물처럼 넓게 뻗어 그대로 숲 전체를 덮으며 내려앉는 마력에
조지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 그 빛의 출처가 경계초소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 발길을 돌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엘프? 혹은 붉은 아가미 수렁톱니? 잘은 모른다.
차라리 초소에 기대 길 잃은 그 여자를 지키는게 더 나은 판단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일 모레면 성연이 와서 붉은 아가미 수렁톱니를 정리해줄 테니까.
그러나 그는 초소 감시자였다. 폭포를 감시하고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마침 운 나쁘게 그가 근무하던 중에 이변이 생기기야 했으나 결국 그의 미숙이라고 자책하고
다시 엽총을 들어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조지는 작게 마른 침을 땅에 뱉었다.
다시 바라보니 왠지 흰 빛에서는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퍼져나가는 부드러운 따스함에 그는 주먹을 다시 쥐었다.
오늘은 분명히 그 괴물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초소로 달렸다.
조지를 초소로 달리게 한 그 빛은 단연 그의 눈에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마운틴엘프들의 마을에서도 화려한 백색광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고
그 방향이 순수의 폭포 방향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낸 그들의 눈에는
그 빛이 마력이라는 것 역시 또렷히 보였다.
그리고 의견이 잠시 충돌하는가 싶더니 엘프들은 금새 의견을 모았다.
당연하게도 그 중심에는 시도라가 있었다.
"천신님께서 계시를 내려주신거다... 이 긴 기다림의 끝을 고하시는게야...
무기를... 들어라...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꾸나."
"예 장로님!"
"비열한 인간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건가!"
시도라는 그들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전사들은 대기하고, 젊은이들과 여자들은 남아서 마을을 지키거라.
우리가 모두 패배해 전사하게 되면 마을을 부탁한다."
마운틴엘프는 중립을 수호하던 종족이다.
먼저 검을 들지 않았고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 자에게 활을 겨누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수탈당하던 그들을 변하게 만든 것은 주변 환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인간을 믿지 않고 신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마지막 보루를 빼앗긴 그들에게 나타난 백색 마력은 전설로만 내려오던
그들의 신앙심에 마지막 남은 반기를 들게 했다.
엘프들은 물밀듯 숲을 헤치며 초소를 향해 달렸다.
더 정확하게는 순수의 폭포로 향했다.
그곳에 모든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천신이 계실테니까.
숲을 가로지르고 바위를 뛰어넘은 엘프들은 초소를 앞에 두고 빛의 근원을 찾았다.
폭포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빛은 폭포가 아닌 초소에서 뻗어나온다.
"이곳에서 빛이...?"
시도라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숨을 죽여 말했다.
"저 안에 천신님이 계신다. 이제껏 인간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분명 우리에게 그랬듯 천신님께서도 저들에게 속고 계신 것이겠지.
우리는 이 땅을 빼앗기고, 폭포도 빼앗겼다. 이제 저들이 우리에게서 신을 빼앗으려 한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더는 이 땅위에서 무엇도 빼앗길 수 없다!"
마운틴엘프들이 단검을 들고 초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도라의 말에 그들은 결의를 다지고 철조망을 움켜쥔채 그 틈으로 기어오른다.
이들은 이미 이 초소를 기점으로 폭포를 되찾으라며 서로를 고무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 시..시발 뭐야...?"
탕 소리가 처음으로 울리고, 엘프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허공으로 공포탄을 쏜 조지가 말했다.
"여러분 어쩐 일로 오신건지 모르겠지만 돌아가세요.
공포탄은 처음 한발 뿐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더 늦으면 돌이킬수 없을거라고요."
그 사이에서 시도라가 걸어나와 말했다.
"고맙네. 자네는 확실히 우리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
하지만 우리도 마지막을 걸고 온 걸세.
그 활에 화살이 몇 발이나 들어가겠나?
우리 엘프들을 모조리 쏘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또다시 누군가의 남편을 죽이고 오랜 슬픔을 가슴에 묻게 하겠나.
찢어져 상처가 남고 고름이 남을 가슴이 엘프들 뿐만은 아닐걸세.
잘 생각하게. 그리고 그 총을 내리게."
조지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총이 기어이 선두로 기어올라가는 철조망 끝의 엘프를 향한 순간
시도라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더러운 놈들... 우호적인 척. 깨끗한 척. 결국 그렇게 총을 들고 우리를 탄압할 거라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를 배신할 생각을 품고 언제까지 숨길 수 있었을리도 없지."
"다시 경고합니다. 내려가세요. 물러나라고 경고했습니다!"
"자네는 자네 할 일이나 하게. 그때 까지 살아나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은.
돌격!!"
엘프들은 기어이 멈추지 않고 철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이 총성이 울렸다.
탕 하는 소리가 울리고 힘없이 한 엘프의 팔이 늘어진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철조망에 오른쪽 다리를 걸친채로 뒤로 쓰러져 떨어진
젊은 엘프의 죽음이 그들에게 불을 지핀 것인지 엘프들이 기어이 철조망을 넘어
그 내부에서 잠금쇠를 풀어버렸다.
문이 열리고 엘프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조지는 확성기를 내던지고 도망쳤다.
초소의 문을 벌컥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미 그 안에는 아까 본 여자는 온데간데 없다.
"이런... 그래도 제때 도망은 갈 줄 아는 여자였군."
그는 즉시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에 일일이 잠금장치를 채웠다.
그리고 본부로 연결되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긴급 상황, 현재 16번 성역 순폭지역 경계 감시 초소에 무장 엘프 집단 대거 습격.
지원 바람. 다시 한번 전합니다. 16번 성역 순폭지역 경계 감시초소, 무장 엘프 습격.
인원 알수 없음, 지원 바람."
언제 뚫릴지도 모르는 철문을 단단히 부여잡은 조지는 그나마 저 엘프들이 가진 무기가
단검과 활 뿐이라는 점에 감사했다.
이들은 결코 이 단단한 철문을 때려부술수 없을 테니까.
설령 죽더라도 자신이 맡은 임무는 다해야 했다.
절대 과거 수 차례의 조약으로 손에 넣은 조약 체결 문서는 사수해야 했다.
겨우 숨을 고르며 끌어안은 엽총의 온기를 느끼던 조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쾅 소리가 나고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린다.
"으악!!"
"저건 또 뭐야!!"
"붉은 아가미 수렁ㅌ...으악!!"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알게 된 것은
그 괴수가 기어이 이곳까지 내려왔다는 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라는 의문이 계속 남는다.
비가 오던 날에는 종종 뭍에서도 오래 돌아다니기는 하던 녀석이다.
하지만 비도 오지 않는 지금, 족히 5분이 넘는 이 거리를 저 괴물이 걸어내려왔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기대어 있던 철문이 우그러진다.
찌그러진 철문에 난 틈 사이로 그 괴물의 붉은 아가미가 슬쩍 비쳐보였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미 엘프들은 한차례 그 괴수와 맞붙은 상황같았다.
널브러진 엘프들은 검과 활을 들고 어떻게든 그 괴수에게 대응하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장로님! 마력이 통하질 않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인간들은 이런 것도 만들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 아니다... 이건... 마운틴엘프의 마력이다..."
"도망쳐라! 이건 이길 수 없다! 마력을 소모하지 말고 물리적으로 공격해라!
공격해서 빈틈을 벌리고 그 사이에 퇴각로를 확보해라!"
"이런게 어디서 나온겁니까!"
엘프들은 단검을 들고 어떻게든 그 거대한 수렁톱니를 막아보려 했지만
접근하지 않으면 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짧은 단검을 가지고 괴수를 막는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게 그들이 날카로운 지느러미의 가시에 무참히 찔려 피를 흘리며 퇴각하고 있는 모습에
조지는 총을 조심스레 겨누었다.
그 커다란 괴수의 눈을 노리고 총을 발포한다.
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괴수가 날뛰기 시작하면 조지는 초소의 문을 열고 외쳤다.
"여기로 피해요! 이 안까지는 저 놈도 못 들어올 겁니다!"
그가 외친 목소리를 들은 엘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도라를 데리고 그 안으로 피신했다.
겨우 네닷명의 엘프만 겨우 초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로님, 뒤는 부탁합니다. 저희는 저 괴수가 마을로 흘러가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그런.... 부탁한다..."
구겨진 철문이 삐걱이며 닫히면 그제서야 시도라가 허탈감에 한숨섞인 말을 내뱉었다.
"기어이 이 문을 이런 식으로 열고 들어오게 되는군."
"어쩔 수 없었어요."
"난 그런다고 널 용서하지 않는다. 네가 죽인 아이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였다.
생선구이를 좋아하고 나무타기를 잘하던 아이였지."
"그러니까 철책도 그렇게 잘 기어올랐겠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도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했나?! 여기까지 와서 해보자는건가?"
조지는 당황해 뒤로 물러섰다.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저 괴물이 알면 안됩니다.
목소릴 낮추세요."
"그럼 방금 그 소린 대체..."
구겨진 철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금방이라도 부서질듯 너덜너덜하게 흔들린 철문너머에서 한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 거대한 수렁톱니를 한쪽 발로 짓밟은 채로.
흩날리는 금발이 조금 젖어있었다.
유난히 발랄해보이던 옷은 어디가고 회색빛의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을 꺼내입고 있었고,
몸에서는 유백색 마력으로 인한 빛이 연기처럼 스멀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나다."
"자...자네는..."
"그 잠깐새를 못참고 여길 습격했다고? 엘프는 진짜 볼수록 안되겠네.
다 나와. 거기 우리 애 자고 있으니까 애 자는 앞에서 목소리 높이지 말고.
싹 다 죽이기 전에."
어버버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걸어나온 것이 조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에리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 혹시 죄송한데, 이 물고기 우리 애를 좀 먹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ㅇ...예...?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대답하면 에리아는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그 큰 수렁톱니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그제서야 다시 바라본 수렁톱니는 단 한번의 일격에 죽어있었다.
등 위쪽에서 그대로 뚫린 거대한 구멍. 말 그대로 파인 흔적이었다.
예리하다고 해야 할지 두껍다고 해야할지.
무언가 무력으로 이 두꺼운 피부를 억지로 뚫어낸 것이었다.
머리 뒤쪽부터 심장까지 이어지는 곧은 길은 바닥 아래까지 파여있었고
파인 바닥에는 검붉은 수렁톱니의 피가 고여있었다.
겨우 숨만 붙어있는 엘프들과 멍하니 서서 눈만 꿈뻑이는 엘프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벌벌 떨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괴수를 사냥한건 이 여자가 분명했다.
조지는 겨우 목 뒤로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게 강하신줄 모르고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군요..."
"아니에요~"
웃는 모습이 그렇게 천진해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리아와 조지가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시도라가 멍한 표정으로 걸어나와 엘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무슨 일이 있었나...?"
시도라가 심한 암모니아 냄새에 한 손으로 코를 쥐어막고 바닥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엘프를 붙들고 물었다.
반쯤 실성한 것 같은 엘프들은 뭐라고 알아듣지도 모를 소릴 중얼거릴 뿐이었다.
결국 그나마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엘프들을 찾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가... 하얗게 해서...ㅇ...아아... 빙글빙글..."
"강합니다... 도망을 쳐야...."
"정말이냐?"
"그...어....어버버... 그 여자....쿵.... 으아아...."
"그...그러니까... 하늘에서 번쩍 하더니... 그 천신님의 빛이.... 쾅하고...
그러더니... 저 괴물이 쿵 하고 기울어졌고, 피가 펑 하고 터져나오더니...
저 여자가 걸어...나왔습니다...."
대략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종합한 이야기는
단 한번에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지더니 수렁톱니를 그대로 관통해 뚫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대체... 설마..."
시도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천....신님.... 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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