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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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가 마력이 충돌하는 가운데서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은빛 그리고 잿빛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어간다. 마법사, 그리고 마녀의 치명적인 약점은
모든 공격을 '마력'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마력이 사라지고 나면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스스로 늘 자각하지 않으면
정작 마력이 사라진 후에는 대처할 수 없게된다.
포션과 부적을 상시 가지고 다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삐익!"
삐삐가 쏘아날린 비늘이 각 하나씩 날아가 마카와 시도라의 이마를 때린다.
따악 소리가 나게 맞은 후에 비늘은 바닥에 떨어졌다.
삽시간에 정리된 현장에서 어안이벙벙한 것은 조지 뿐이었다.
나는 시도라를 돌아보고 그녀가 아직 숨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위태로운 상황임을 깨달았다.
아니, 아마 내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느꼈으리라.
"시도라, 마을로 돌아가. 이야기 끝나면 부를게.
우선 야르누프의 장례라도 치러줘."
시도라는 한척 더 헬쓱해진 얼굴로 기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이제 어떻게..."
"정말 변하려고 하는거라면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일단은 회복에 전념해."
"고맙습니다..."
시도라가 숲속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마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왜 저 귀쟁이들을 놓아주신거죠? 이건 기회였다고요."
"너 죽었을거야. 삐삐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 말에 마카도 잠시 멈칫 하더니 삐삐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내게 옮긴다.
"죽는다고요? 제가요? 그럴리가 없죠."
"잘 봐. 지금 이 숲 전체가 마운틴 엘프의 마력으로 덮혀있는데
마력과포화 상태가 될때까지 끌어올린 마력이라면 분명 마력중독으로 죽을거야.
너같은 큐브에 의존하는 형태의 마법사는 더더욱."
"큐...큐브가 어때서요...?"
"자기 마력의 통제도 아직 잘 못하면서 큐브에 각종 마법을 집어넣었다는건
스스로의 마력회로는 아직 단련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용량이 크지만 약하다는 의미지. 그런 경우는 잘 없지만 만일,
자기보다 더 많은 마력을 체내에 받아들이게 되면 간단할 정도로 무너져버려.
마운틴엘프가 공유하는 마력적성은 확실히 강하지 않아.
하지만 수천년간 내려온 마력량 하나는 무시할 수 없지."
"그게 무슨...? 제가 배운 이론에는 그런 이야기 없었다구요!"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거지. 편하다고 바로 땅에 심지 않고 모내기를 준비했는데,
모를 옮겨 심기도 전에 논은 이미 말라 가물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모가 죽어버려요!"
"모만 죽을까?"
"네...?"
"아마 너 정도의 마력량이면 모가 한두개가 아닐거야.
준비한 모판이 수백판이라면? 수천판이라면?"
"모는 죽어버리고... 땅은...양분을 뺏겨서..."
"알면 됐어."
마카는 삐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삐삐는 내 뒤로 와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할건 다 해놓고 무섭다고 벌벌 떠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작은 용은 왜 멀쩡한거죠?"
"용의 몸은 튼튼해서, 마력 회로가 인간보다 훨씬 질기거든.
일단 마력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용할 수 있어.
그나저나 이제 네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는데, 조지씨.
아직 오늘자 순찰 안 도셨죠?"
"네...? 네! 그렇습니다!"
"느긋하게 돌다 오세요."
"그...그러죠..."
조지를 순찰 명목으로 보내버리고 나서야 나는 삐삐를 무릎 위로 앉히고 마카에게 말했다.
"차 좋아해?"
"이게 지금 무슨...하아.... 네. 좋아해요."
"녹차로 준비해줄게. 여기 초소에 녹차가 좀 많이 남거든."
나는 녹차를 준비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리가 마련되고 나면 나는 삐삐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엘프에게 그렇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뭐야?"
"그런 적 없어요."
"그걸 지금 나한테 믿으라고? 누가 봐도 감정적이었잖아.
무슨 이유인지 들어줄테니까 말해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마카는 테트라큐브를 손 위에서 회전시키면서 입을 닫았다.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면 그제서야 눈 끝을 살짝 올려 나를 바라보고
다시 큐브를 반대로 회전시킨다. 그러기를 몇 분쯤 지났을까,
무거운 입이 열렸다.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오늘 실수를 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일단 일 이야기부터 좀 할까?
교국에서 엘프들을 싸그리 정리하라고 한 건 알겠는데
재량껏 살려보낸다는 걸로 타협을 좀 하고 싶거든."
"살려보낸다?"
"이제껏 교류를 단절시키던 자존심을 한겹 내려놓았다고 하니까 말이지.
혹시 모르잖아."
테트라큐브의 회전이 돌연 멎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오르그는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교국측에서 파견된 저는 임무를 완수할 필요가 있어요.
여기서 만약 저 엘프 부족을 살려두게 되면 차후에 성연으로서 제 평판도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평판을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는 사성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사성은 모험가에요.
각 분야의 최고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모험가는 의뢰를 받아 살아가는거 아시잖아요?
의뢰 수주를 위해서 완벽한 일처리는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엘프에 대한 적대도 그게 원인이야?"
"그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는 결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과민반응을 한 건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교국에서는 이번 일로 순수의 폭포를 확실히 자국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하고 있어요.
물론 억지라는 것은 알고있고요. 너무 억지죠. 자국민도 아닌 사람이 잠시 들어갔다는 이유로
타국의 영역을 강제로 침범해 강탈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교국의 사람들은 이 폭포를 얻어내려고 하고 있어요.
이건 단순한 종교적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죠."
"하나 더 있다?"
"이 순수의 폭포에는 엘프들이 말했던 것처럼 천신이라는 신이 온다는게 맞는가봐요.
그래서 교국 입장에서는 이 폭포를 빼앗음으로 인해서 엘프들의 종교적 기틀을 없애려는 거에요.
종교를 물리적으로 견제한다고 보면 되겠죠. 만약 이 폭포의 통제권을 교국이 완전히 얻는다면
분명 폭포 옆에 신전을 비롯한 각종 선전물을 늘어놓을 거고요.
그렇게 되면 엘프들은 자신들의 성역을 눈 앞에서 빼앗기게 되는거죠."
"그렇게 하면 무슨 이득이 있죠?"
"신자 확보 아닐까요? 잘은 몰라요. 분명 아르간티아는 유일신이에요.
하지만 그건 현재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한 것이고, 다른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다르말록이 봉인당하기는 했어도
아직 소멸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는 거슨 다시말해 언제 유일신 체제가 깨질지 모른다는 거죠."
"유일신 체제가 깨져?"
"그렇게 되면 교국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교국은 여지껏 교회의 총본산으로서 작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기반이 되는 교회가 흔들리게 되면, 혹은 적으로서 신이 등장하게 되면
교국의 막강한 권력은 사라져 버리겠죠. 분명 아르간티아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간티아는 경전에서 늘 자신은 하나의 인간이라고 했어요.
자신 외에 다른 의지할 곳을 찾아내라고. 그리고 인간 본연의 힘을 기르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교국은 아르간티아의 유일신 체제를 의도적으로 강화하려고 하고 있어요.
다른 신을 배척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정감이나 의지와 같은 구원적 의미보다
때로는 신자 그 자체에 조금 더 의미를 두는게 아닐까 싶어요.
교국이 지금 바라는 것은 과연 아르간티아 신의 숭배일까요,
아니면 그 신을 등에 업고 누리는 권력과 부일까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마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마신 녹차잔을 내게 되돌려주고 말했다.
"저는 분명 무령님의 말대로 엘프를 혐오합니다.
이제껏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지금은 이유를 알려드릴 수 없네요.
만약 알아내시게 된다면 그때는 절 좀 더 이해하실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 엘프도 싫어하지만, 교국 그 자체도 싫어해요.
다만 엘프가 교국보다, 아주 조금 더 싫을 뿐이에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 마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앞에 두고
순순히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폭포를 차지할 가치는 없어 보이네요.
제 상대로 엘프부족까지는 게획에 있었어도 마녀와 용은 없었거든요.
계획이 너무 많이 틀어져 버렸어요."
"나도 이제 곧 여길 떠날거야."
"떠난다고요?"
"그래."
"엘프들은 어쩌시려고요?"
"내가 쟤들 살아가는걸 신경써줄 필요는 없지.
알아서 잘 살아가지 않을까. 자기들 입으로 변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다만 길 정도는 제시해 줄 수도 있고."
"여전히 종잡을 수 없네요."
"누가, 내가?"
"네. 이제 어디로 가시거죠?"
"몰라. 발 닿는 곳으로 가 봐야지. 이 근방에서 가까운 나라는 어디지?"
"엠페레스겠죠 아무래도. 하지만 이미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엠페레스는 들러서 오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럼 차라리 뼈의 저택으로 가보시는건 어때요?"
"뼈의 저택?"
"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저택이에요. 사막 가운데 우뚝 서서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왜 거기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다만 뼈가 여기저기 널려있다고 해서 뼈의 저택이에요.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연구하는 장소임에도 그 용도가 뭔지 거기 있는 이유가 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건물이에요. 하지만 분명한건 확실히 흥미로우실 거라는 거죠."
"흥미롭다고?"
"거기에는 읽어볼 수 없는 언어로 쓰여진 책들이나 보고서 따위가 어지럽게 널렸거든요.
마치 고대부터 존재했던 연구처럼요. 지금 각국 언어학자들이 열심히 분석중인데도
고작 전체 내용의 2%를 겨우 해석했다고 하더라고요.
현재는 사라진 개념이라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도 많이 있다는 것 같고요."
"거기 사람은 있고?"
"마침 거기서 오랜 시간 연구를 하고 계시는 제 스승님이 계세요.
학계에서도 나름 잔뼈가 굵으신 분인데, 학계에서도 그 저택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거든요.
아마 만나게 되시면 마카의 소개로 왔다고 한마디 정도만 하시면 될 거에요.
버나드 오 마티도스 라고 하는 분이신데, 나름 유명한 학자세요. 마법 연구도 오래 하셨고요.
체내 마력량이 워낙에 적어서 마법사의 꿈을 접게 되셨지만 그 연구량과 지식에서는 따라갈 사람이 얼마 없죠.
음 제가 아는 사람을 뽑으라고 해도 아마 멀로이 교수님이나 전성기때의 닥터 플래터 정도일까요?
과거에는 멀로이 교수님도 종종 거기서 만나뵙고 그랬는데 최근 들어서는 뵌 적이 없어요."
"너도 갔었어?"
"저도 학계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까요. 저 이래 뵈도 성연인데요?"
"아, 그랬지 참. 내가 보기에는 좀 다 고만고만해서."
"그 말이 거짓말이나 허세가 아니라는걸 알아서 그런지 더 재수없네요."
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방에서 작은 스크롤을 꺼냈다.
"재미 없어졌네요. 가볼래요. 생각해봤는데, 엘프들을 박멸하겠다고 거길 또 가는 것보다
그 얼굴을 안보는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네요. 얼굴을 보면 정말 다 죽여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생각이 변하기 전에 빨리! 저는 가볼게요. 후... 다른건 아니에요. 그냥 테트라 큐브의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아, 상부에는 미리타엔의 에리아 무령의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고 보고할거니까각오하시는게 좋을거에요."
"아, 알아서 해. 어차피 그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날 별로 안좋아하거든."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좀 죄책감이라는게 덜하네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씨익 웃어보이며 이를 드러내보였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놀리려고 한 것 같다.
어차피 내가 거절하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그게 또 베스트 플랜이기도 했다.
현상은 변하지 않으면서 실패에 타당한 근거를 들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천진해보이는 얼굴 사이로 어딘가 씁쓸한 웃음이 살짝 섞여 있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잠깐 그 표정을 보고 침묵하고 있으면 어느새 삐삐가 꼬리로 내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그래, 삐삐야. 여기도 너무 오래 있었다 그렇지?"
"삐!"
"이제 슬슬 여기서 일도 마무리하고 내려가자. 이제 우리도 뼈의 저택으로 가봐야지."
"삐?"
"삐가 아니라 뼈. 뼈의 저택이라고."
"시러."
"그래, 그럼 삐의 저택으로 하자. 그럼 됐지?"
"죠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