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74화 (174/303)

〈 174화 〉 삐삐 그리고 발레리아

* * *

뼈의 저택으로 가겠다고 결정은 했지만 그게 어디 있는 건지,

어떻게 가는 건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로서는 우선 길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순서라는게 있는 법이니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일에 휘말린 나로서는 꾸준히 쉬어주지 않으면 의욕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했고, 지금은 삐삐도 데리고 있었으니 한번 재정비가 필요했다.

삐삐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기에

나는 숲의 초입에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미리타엔의 상담소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상담소로 돌아온 느낌이다. 미리타엔에서 느껴지는 살짝 풋풋한 매연냄새와

거리에서 느껴지는 지저분한 노예들의 악취 따위가 살짝 섞인 공기에는

진한 커피향이 섞여있다. 최근 들어서는 커피보다 포션의 수요가 더 많다지만

그래도 커피는 매일 새로 내리도록 말해두었다.

"무령님? 오셨어요?"

또 한번 발랄해진 목소리. 발레리아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더 생활감이 있었다.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저야 늘 잘 지내죠."

얼굴에 확연히 드러나는 웃음기. 그리고 부드러운 눈매로 살갑게 짓는 눈웃음은

이전의 킬레리에게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전의 딱딱한 말투가 지금은 둥글게 바뀌어 있었다.

"오늘은 영업 안하고 있었어?"

"네, 오늘은 영업을 하루 쉬었어요. 몸이 조금 안좋은 것 같아서요."

"아, 그래? 잘했어. 몸이 안좋으면 쉬어야지."

"감사합니다. 사실 쉬어도 될까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아까 게비디 대공께서 오셔서 쉬라고 하시기에..."

"게비디가 그랬다고?"

"네. 분명히 [너는 이제 내 소속의 킬레리가 아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네가 쓰러지면 더 걱정하실게다.

지금의 너는 내 노예가 아니라 그분의 친구 아니었나?

무령님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잘 말씀드릴테니 앞으로 이틀간은 쉬어라.] 라고 하셨네요."

"확실히 센스는 있다니까. 앞으로는 네가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쉬어야 할 날에는 쉬어도 괜찮으니까 건강을 먼저 챙겨."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가게를 좀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발레리아. 혹시 뼈의 저택이라고 알아?"

"뼈의 저택 말인가요? 네. 들어는 봤어요. 학회에서는 지속적으로 흥미를 보이는 곳이에요.

고대부터 내려오는 연구의 상당수가 거기 집약되어 있다고 하던 것을 들었어요.

분명 원래 명칭은 마법 연구회 모임이었을 거에요."

"마법 연구회 모임... 그렇구나."

발레리아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를 가만히 살피다 물었다.

"아,식사는 하셨나요? 지금 준비할까요?"

"아냐, 먹고 왔어. 고마워. 너야말로 병원은 다녀왔고?"

"네, 단순 과로라고 하더라구요.매장에서 판매중인 포션을 마실 수는 없어서

그냥 좀 쉬는 쪽으로 결정했어요."

나는 가방을 열어 RIC­9호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거 마시고 좀 자면 괜찮아질거야.

포션은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꺼내마셔도 돼.

내가 직원 복지를 해 줄수 있는 것도 딱히 없는데 그런 거라도 해야지."

"하지만 이미 제 몫으로 많은 돈을 주고 계십니다."

"난 월급도 안 줬던 것 같은데?"

"하지만 관리비용의 대부분을 저에게 넘기셨잖아요.

가게를 유지보수하는 비용만 남기면 나머지는 저에게 주시겠다고."

"그랬지. 그거 너 가져도 돼. 나 이상하게 얼마 전부터 내 몫으로 나오는 월급이며

지원금이 상당히 늘었거든."

"그거 아마 지원금이나 월급이 아닐거에요."

"무슨 소리야?"

"황제께 총애를 받으시는 거에요."

"아, 그렇다고는 하더라.

아무래도 내가 연륜이 있다보니까. 인적자원으로서의 가치도 보장되었다고 하고.

마녀로서 살아온 세월이 길다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점은 이해하는데..."

"....."

"왜? 이거 아냐?"

"맞아요..."

나는 소파에 앉으며 그녀가 조용히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 정도면 분명 알면서 일부러 저러시는거야."

뭐가 더 있나? 하긴 플로라에게는 개인적으로 해준게 좀 있었으니까.

나는 가방을 열어 안에서 삐삐를 꺼냈다.

"어구 무거워... 너도 잤냐? 야. 나한테 다 맡겨놓고 아주 잘 잔다 너?"

삐삐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 깨우면 안될 듯 싶어 일단 소파 옆자리에 놓아두었다.

아마 잠에서 깨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싶어서 이불을 덮어주고 나는 조용히 상담소를 나왔다.

아무래도 삐삐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발레리아에게 맡기는 편이 제일 확실하겠지만 과로로 쉬는 사람을 어떻게 일을 시키겠는가.

나는 서점에 가서 간단한 책부터 하나씩 구입했다.

미취학 아동들이 읽기에 적합한 그림책부터 동화, 그리고 교육에 관해

귀족 자녀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서적까지 모조리.

그리고 삐삐가 쓸 수 있도록 작은 노트도 함께 챙겨 샀다.

혹시 삐삐가 좋아할지 몰라서 애견샵에 들러 장난감도 몇개 샀다.

그리고 다시 상담소로 돌아왔는데, 왠지 상당히 난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녀왔ㅇ... 뭐야...?"

사방에 삐삐가 날린 비늘이 박혀있고, 소파를 물어뜯어놓은 삐삐가 빼애앵 하며 울고있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난장판을 피웠고 차마 말리지 못한 발레리아가 어떻게든 삐삐를 소파에 앉혀둔 모양이다.

"무령님...! 이 용이 상담소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날개로 보아 천룡종인것 같은데 비늘이 단단해서 뚫을 수 없습니다!

총이나 칼에 흠집도 나지 않는 경도와 강도를 지니고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 힘으로는 일단 잡아는 뒀는데 처리는 역부족입니다.

직접 해결하셔야 할 문제 같습니다!"

그 말에 삐삐도 고개를 홱 돌리고 나를 보더니 자기를 잡고있는 발레리아를 힘으로 풀어내고

와락 뛰어 내게 안겼다.

"삐이익...!"

발레리아도 당연히 놀라서 호신용 단도를 빼들고 내게 달려오다가 펑펑 우는 눈으로

내 얼굴을 연신 핥아대는 삐삐를 보고 뭔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그... 무령님, 상황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다시 딱딱한 말투로 돌아간 발레리아는 그만큼 이 상황이 뭔가 싶었나보다.

"어... 그게... 새 식구야..."

"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나는 마치 잘못한 아이가 부모 앞에서 혼나면서 잘못을 고백하듯이

고개를 푹 떨구고 삐삐와 나란히 앉아서 발레리아에게 관계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발레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하아... 어쩌겠나요. 무령님께서 데려온 아이인데.

다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히 교육이 필요해 보이기는 하네요.

그래서 책도 사오셨다고 하니까 오늘부터 바로 교육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하...하하... 일단 가게부터... 정리 할게요..."

발레리아는 피곤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령님, 이 비늘은 어떻게 할까요?"

"모아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삐삐를 따로 앉혀두고 말했다.

"삐삐야."

"삐이..."

"무서웠지?"

"삐..."

나는 삐삐를 안아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다음부터는 내가 걸어준 호출 마법을... 아... 이것도 가르쳐야 하는구나..."

일단 교육이 잡혀 있어야 뭐든 추가적으로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말을 멈추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릴때 가르쳐야지..."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하루에 6시간씩을 삐삐의 교육에 투자했다.

뼈의 저택이고 뭐고간에 일단 삐삐를 가르쳐야 했다.

"자, 이건 숫자야. 1이라고 하는거고, 하나라는 뜻이야.

여기 커피콩 보이지? 한개 있는거야."

"삐!"

"야! 먹어버리면 어떡해! 그러라고 준거 아니야!

다시, 자 이게 하나고. 1이라고 하는거야. 그럼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

그럼 뭐야? 이게 2라고 하는거야."

"삐삐!"

"아니 두개 있으니까 하나 먹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낼름 주워먹으면 안돼!"

그렇게 3일이 지났을 무렵 삐삐는 6살 정도의 언어는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단점이 있기야 했지만.

삐삐 스스로도 생각한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그 결과 삐삐의 언어 모듈은 상당히 큰 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뇽!"

"무뇽이 아니라 무령이에요 삐삐. 무령님은 지금 연구를 하고 계시니까

방해하지 않기로 해요. 대신 제가 책을 읽어드릴게요."

"시러..."

"사탕도 줄게요."

"....죠아!"

삐삐는 어떻게든 발레리아와 친해지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상담소는 내가 일주일간 쉬겠다고 공지하고 가게 앞에 안내문을 붙였다.

그랬더니 게비디나 플로라로부터 내가 미리타엔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귀신같이 듣고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이냐며 연락이 왔다.

그러나 게비디는 너무 무섭게 생겨서 삐삐가 놀랄까봐 지금은 바쁘고,

나중에 찾아가겠다고 이야기했고, 플로라는 이제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바빠서 잘 오지 못한다고 했다. 어차피 플로라만 불렀으면 게비디가 서운했을 것 같아 부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삐삐에게 소개는 시켜줘야 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조금만 더 크면 소개시키기로 했다.

발레리아는 삐삐에게 날마다 책을 읽어주었고 도서관에 데리고 갈 수 없는 삐삐를 위해서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해 주었다.

덕분에 발레리아는 자신도 날마다 독서할 여유가 생겨 좋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무령의 유일한 상담소 직원인 그녀가 도서관에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과연 네리M모귀드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그녀였기 때문일까

아이의 교육에도 상당한 강점을 보인 발레리아는 삐삐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단 한번의 화도 내지 않고 삐삐를 가르쳤다. 응석을 받아주는 법도 알고, 과감히 거절하면서

말을 듣게 만드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발레리아는 낮 시간에는 삐삐를 가르쳤고, 삐삐가 낮잠을 잘 때나

밤에 해가 지고 나서는 삐삐를 교육하는 방식에 대해서 내게 특강을 했다.

상담소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인간을 만나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언어가 다채로워지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능숙해진 그녀였고,

삐삐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 처음으로 들은 '이모' 소리에 들떠 하루종일 웃는 걸 보고

상당히 유순해지고 인간다운 면모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강의하는 모습에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걸 보면 또 그런건 아닌 것 같다.

역시 아무리 풀어져도 발레리아는 발레리아였다.

시간이 상당히 지나고 마침내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 가게를 열 때에는

이미 삐삐가 상당 수준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데 더불어

화장실의 배변 훈련을 포함해서 혼자 책을 읽는 법, 삐뚤빼뚤하지만 글을 쓰는 법을 익혔다.

용종이 지능이 낮은 종족도 아니거니와 몸에 좋은걸 잔뜩 먹고 자란 삐삐는

생각보다 지능도 높았고 이해도 빨랐다.

다만 그에 대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 건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삐삐의 성격은 상당히 새침떼기 귀족 아가씨같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까칠한 플로라와 같은 시건방진 느낌이 살아있어서

키우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라면 발레리아가 요 작은 악동을 너무 귀여워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내가 기르는 아이라는 말에 자신 나름대로 계급 체계를 잡아버린 것인지

상급자를 대하는 것처럼 삐삐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귀족 아가씨와 하녀. 교육을 담당하고 행동교정도 해 주지만

그 성격을 교정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다시말해...

와장창!

"삐삐, 차가 마시고 싶으면 저를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혼자 차를 내리지도 못하면서 찻잔을 엎으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말하는 발레리아를 두고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깜빡거리다가

모르는 척을 하고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다가 홱 돌아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발레리아는 엎어진 찻잔을 정리하고 홍차를 다시 내려서 삐삐에게 가져간다.

삐삐는 나쁜 아이는 절대 아니었지만 아직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 뒷처리를 도맡아 하며 묵묵히 가게일을 병행하는 발레리아에게

나는 더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삐삐! 너 이리와! 또 발레리아 괴롭혔어?!"

그러면 삐삐는 금새 방에 들어가서 폴짝 뛰어 발로 문을 꼭 붙들고 막는다.

그리고 날개에서 비늘을 쏘아 문을 잠근다.

매번 같은 패턴이었고, 매번 간단한 해주 마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로 날개를 접고 말한다.

"미아내..."

늘 문을 여는걸 봤으면서 매번 잘못하면 방에 들어가서 문부터 잠근다.

종종 내가 없어서 문을 못 여는 날에는 발레리아가 대처한다.

"안나오실거에요 삐삐?"

"시러!"

"혼 안낼게요."

"거짓말!"

"안되겠네요~ 오늘은 무령님께 삐삐가 문을 잠가서 혼자 주무셔야한다고 해야겠네~"

하면 삐삐도 혼자 자는건 싫은지 문을 열고 나온다.

"삐삐도 가치 자!"

그럼 결국 삐삐는 반성의 의미로 발레리아가 빌려온 두꺼운 책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소리내어 읽어야 했다.

발레리아는 일부러 도서관에 다녀올때 삐삐가 읽기 힘든 정도의 책을 한 권씩 빌려왔다.

그걸 보통은 자기가 읽었는데, 삐삐가 잘못할때마다 그걸 읽게 시켰다.

삐삐의 발음개선에 더불어 모르는 단어가 나올때마다 삐삐가 발레리아를 붙잡고

"이거 모야?"

라고 물어서 삐삐의 어휘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듣고보니 그럴싸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러다가 만약 책을 다 읽었는데도 삐삐가 다음 책을 빌려오기 전에 사고를 치면,

삐삐의 공책에 그걸 쓰게 시킨다고 했다.

삐삐는 아직 마력을 다루는게 서툴어서 삐삐가 앞발을 내밀면

발톱에 발레리아가 잉크를 살짝 묻혀주는 식으로 공부를 시킨 모양이다.

종종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잉크를 꺼내달라고 할 때가 있다.

나는 어지간한 학교 교사보다 발레리아가 압도적으로 우월한 교육자임을 확신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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