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이전과는 다른
* * *
아침에 눈을 뜨면 고소한 빵굽는 냄새가 났다.
먼저 일어난 발레리아가 버터를 발라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식탁에 앉으면 어느새 작은 스툴을 머리로 밀고 온 삐삐도 폴짝 뛰어 그 위로 올라앉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발레리아는 후후 웃으며 준비한 토스트를 접시에 하나씩 올려주었다.
"무령님, 오늘부터는..."
"그래, 너도 좀 쉬어야지. 오늘 가게는 내가 볼게."
발레리아는 휴가를 받았음에도 삐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아마 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녀의 쓴 웃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이게 제 일이니까요."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발레리아는 삐삐를 살짝 안아들었다.
"삐삐, 같이 책 읽으러 갈까요?"
"사탕!"
"사탕 줄게요."
"죠아!"
삐삐는 사탕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다.
분명 미리타엔으로 건너와서 산해진미라고 할법한 음식이며 몸에 좋은건 되는대로 사주는 중인데
정작 사탕이라면 좋다고 받아먹으니 서운할 수밖에.
여튼 자리를 정리하고 삐삐는 발레리아에게 맡겼겠다, 나도 오랜만에 가게를 돌보기로 했다.
가게의 창문을 열고 점포 문을 오랜만에 열었다.
먼지가 얼마 생기지도 않은 걸로 보아 발레리아가 매일 청소한 모양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안내문을 떼고 있는데 그 잠깐의 순간에도 사람들은 내 움직임에 주목한 것일까
금새 웅성이며 사람들이 상담소의 소식을 보고 갔다.
합법적으로 희귀 포션을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일까.
가게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리고 개점 준비가 끝나자마자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여자가 한명 가게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무령님..."
"무령이라뇨. 저는 그냥 사장일 뿐이에요. 손님과 사장으로 만났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머리를 옆으로 땋아 늘어뜨린 여자는 가게에 들어와 묻는다.
"안녕하세요. 혹시 럼블러 위니는 파시나요?"
"럼블러 위니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료였다.
"네. 요즘은 럼블러 위니를 파는 곳이 잘 없더라구요."
"만들어 드릴수야 있죠. 어려운건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드실 건가요?"
"네. 럼블러 위니.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럼블러 위니. 언제부턴가 잘 팔지 않게 된 음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정뱅이로 유명했던 위니라는 남자가 즐겨찾는 메뉴였다고 했다.
우유, 에스프레소, 시럽, 꿀, 탄산수를 전부 같은 비율로 넣고 올리브유를 한 티스푼 추가하는 음료.
만드는 법만 들어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이 음료는 당연하게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럼블러 위니.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자주 마셨거든요."
"좋아했던 사람?"
"죽었어요. 콜로세움에서요."
"아..."
"약했거든요. 네. 너무 약한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는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굳이 그곳에 도전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 아마 자기도 각오 했을 거에요."
"콜로세움에 도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요?"
"아마 저를 위해서였을 거에요."
나는 그녀의 앞으로 완성한 럼블러 위니를 내밀었다.
그녀는 럼블러 위니를 받아들고 잠시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럼블러 위니를 입으로 가져갔다.
세 모금 정도 마셨을까,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다시 내게 물었다.
"역시 참 맛은 없어요. 그렇죠?"
"그런 편이죠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하려고 여기 왔는데, 더 복잡해진 것 같네요."
"저런. 적어도 편하게 있다 가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녀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편하게라... 저는 이 나라에서 3년을 지냈답니다. 단 하루도 이곳에서 편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제껏 늘 그 사람이 죽지 않기를 걱정해야 했고, 이제는 죽은 후에 빈자리를 그리워해요.
물론 콜로세움이 그런 곳이니까, 그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은 거잖아요. 그렇죠?"
"네. 어렵죠. 그리고 아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도 없겠죠.
분명 누군가는 잘못이 있었겠죠.
다만 그걸 모르게 만들어버리는게 저 콜로세움이니까요."
"달콤한 말로 포장해 놓았지만 결국 그 끝은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은 바보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어요.
절 위해서였죠. 당시 저는 취재를 위해 온 미리타엔에서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어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팔려나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저를 구매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그 곳으로 뛰어들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말이죠."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그리고 정말 거짓말 같이 그는 이겼어요. 어떻게 이겼느냐고 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요.
다만 가끔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방에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은 기억에 남네요.
그 뒤로 그는 홀린 것처럼, 어쩌면 등떠밀린 사람처럼 이따금씩 혼자 방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저와 있는 시간이 적어져도 저는 그가 바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그 사람을 검은 망토라고 불렀어요. 유명인이 된 거였죠.
그러니까 그런 전화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일 테구요."
"그래도 두분이 꽤 긴밀하신 관계같은데요?"
"그렇죠. 몸을 섞은 사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로는 한번도 못 했지만요."
"그 날이라고 하시면 콜로세움 우승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날마다 수척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늘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점차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변해갔어요.
그의 맑았던 눈은 탁해지고 더는 날 바라봐주지 않았죠.
폭언, 그리고 사과의 반복이었어요. 마치 조울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요.
가구를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날도 있었죠. 물론 무서웠어요.
하지만 저 사람도 아프니까. 그냥 조금 힘들어서 그런거겠지 하고 넘겼어요.
그래도 그가 날 사랑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는 단 한번도 절 때리지 않았거든요."
"수척해질 정도면 분명히 많이 힘들었을텐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척하다고 표현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종종 각혈을 하고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걱정을 했어요. 약을 늘 달고 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내조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가 행복해지도록,
금새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나중에 꼭 돈을 벌어서 이 나라를 뜨게 되면 결혼하자고 약속했던 사이니까요.
저는 콜로세움에 대해 잘 몰라요. 끔찍함에 제대로 한번 본 적도 없고요."
"그런 사람도 있죠. 이 나라가 이상한 거에요."
"분명 콜로세움 우승 경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한번이지만요. 두 번은 참전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게 정상이었겠죠.
분명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그리 쉬운건 아닐테니까요."
"원치 않은 참전이기도 했고요."
"왜 그렇게 괴로운데도 계속되는 걸까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안도감 때문에 그런것 아닐까요?
자기 일이 아니니까. 링에서 싸우는 이들이 내가 아니니까.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 콜로세움은 그저 구경거리의 일부로 전락하고 말아요."
"그게 본성이겠죠. 저는 기자 일을 하고 있어요. 교국에서 왔죠.
저도 많은 죽음들을 보도해 봤고, 또 그 만큼의 처절함을 많이 지켜봤어요.
얼마나 처절하고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해도 매스컴을 거치고나면 가십거리가 되어
그저 물어뜯기는 것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게 인간의 본성일까요?
모든 인간이 결국 그저 쾌락 하나에 도덕성을 버릴 수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닐...거에요."
나는 잠시 침묵하고 숨을 골랐다.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손님과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라고 말해줄 자정작용을 할 사람이 남아 있으니까요.
다만 이 미리타엔은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환경이니까.
그래서 다들 이곳을 떠난 것 뿐이에요. 이곳은 신을 버리고, 신이 버린 곳이잖아요."
체헤게가 들으면 웃을 이야기다.
물론 나도 그런 자정작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나야 흥미 본위로 이곳에 남았으니내가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저는 복수를 생각했어요. 그 사람을 죽인 사람을 찾아내 죽이겠다고.
그런데... 못할 것 같아요. 이게 맞는 걸까요? 나도 똑같아지는게 아닐까요?
나는...난 어쩌면 좋죠...?"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주륵 흐른 눈물이 테이블 위로 한방울 톡 떨어지면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뭐라도... 한마디 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 손님을 응원해요. 그렇지만 그건 당신의 복수를 부추기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살아가면서 겪을 일들을 이겨내기를 응원한다는 거에요.
물론 그게 복수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도피일 수도 있을거고요.
그 모든 과정에서 힘을 내길 바라고 살아갈 의지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무령님은 참 좋은 사람이군요."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저 응원 말고는 해줄게 없네요.
이 미리타엔의 시스템으로 득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보니."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럼블러 위니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내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좀 힘이 나네요. 얼마죠?"
"5페킷입니다."
그녀는 돈을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던 발레리아가 말했다.
"매일 오던 손님이시네요."
"매일이라고?"
"네, 가게 문 닫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늘 와서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시고는 진정효과가 있는 차를 주문하곤 하셨어요.
오늘은 어떤 차로 달라고 하시던가요?"
"어... 럼블러 위니."
"럼블러 위니요? 이상하네. 한 번도 그런걸 시킨 적은 없었는데."
"저 손님 알아?"
"네, 이름이 아마 하이디였을거에요."
"그래?"
상담소 업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인파는 몰렸지만
그들 대다수는 일주일간 시판이 통제된 포션의 구매자들이었고
두어시간에 한 번씩 정말 상담소를 찾은 사람이 들어오곤 했으니까.
일 중간중간에 시간을 내서 연구소의 업무를 처리하면 꽤 효율이 좋았다.
새로운 포션의 개발에도 힘을 실을 수 있었으니까.
이번 주에 만들어야 하는 약품 목록을 흩어보았다.
회복약 10세트, RPHC188 3세트, TLA770A 5세트, 자극형 신경 억제제 2세트,
투척용 부식물약 5세트, 근섬유 자극제 5세트.
"회복약은... 어디보자, 부작용 없고... 아니 왜 이 새끼들은 '먹거나 바르시오'라고 써 있는데
굳이 이걸 혈관주사로 써서 실려가는거야? 미친놈들인가 진짜? 과다 복용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
아니 지들이 무슨 마녀야 뭐야? 까딱하면 죽으면서 왜들 그리 부주의해? 아니 좌약은 또 뭐야?아악!! 아아악!!!
RPHC188? 이건 분명히 내가 2세트 이상 주문 받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진짜 이건 또 어느 세월에 모아! 내가 괜히 말한게 아니란 말야, 이건 못해! 못한다고! 담당자 누구야!
누가 주문을 이렇게... 후우... 조만간 게비디 불러서 이야기하던가 해야겠네.
자극형 신경 억제제? 이건 뭐 아는 거고. 전시에 공포심을 순간적으로 억제하고 흥분을 고취시키는 약품.
분명히 부작용으로 과다복용시에 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었고...
말이 신경억제제지 마약이잖아 이것도. 쫄아서 못 싸우는 애들 전장으로 들이민다고 별 짓을 다하네.
괜히 오늘 손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찜찜하단 말이야?
부식물약은 뭐 넘어가고, 근 섬유 자극제... 이거는 뭐 날마다 먹는거 아니면 괜찮을거고.
가격도 더럽게 비싼데 진짜 뭐 이런걸 맨날 사서 먹는 사람이 있다고 5세트나 만들라는 건지 정말.
아니 구매자들 확정은 나고 시키는거야? 어휴정말 이래서 누구 밑에서 일하는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설마 누가 이런걸 날마다 먹어? 몸 생각도 하고 그래야지. 뭐 아무튼 이번주 할당량은 이정도인가?
신약 개발할 시간은 넉넉하게 있는 것 같네. 빨리 끝내고 삐삐랑 놀아주러 가야겠다!
자, 만들어볼까!"
그렇게 하루가 또 뉘엿뉘엿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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