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삐삐 실종?
* * *
아침에 가게를 열면서 삐삐를 발레리아에게 맡겼다.
이제 내가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꽤나 익숙해진건지 삐삐도 날개를 파닥이며 인사를 했다.
"무뇽 안뇽!"
아침인사다.
뭐 그런다고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긴 한데 그래도 발레리아는 아침인사가 중요하다며
삐삐에게 인사를 어떻게든 가르쳐 놓았다.
"삐삐, 무령님은 맞지만 무령이라고 부르면 어떡해요.
에리아라는 이름이 있으신데 이름으로 불러야죠."
삐삐는 지그시 발레리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마마 안뇽!"
나는 그 순간 벙 쪄서 멍하니 서 있다가 삐삐가 내게 다가와 내 다리에 두 발을 얹고 서서야
겨우 방금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를 이해했다.
"나... 오늘 출근하지 말까?"
"오늘은 확실히 날이 일하기 적합한 날이 아닌 듯 싶습니다."
해가 쨍쨍하고 맑은데도 일하기 싫어진 우리는 괜히 삐삐를 안아주고 쓰다듬기를 반복하다가
"으아 일하기 싫어어...."
"저도요...."
라고 말하며 가게를 열었다.
"발레리아 오늘 쉬는 날 아니었어?"
"그럴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가게에서 발주한 물건들을 오늘 가져다 준다고 하셔서
물건을 받으러 다녀오는 김에 오랜만에 게비디 대공을 뵈러 다녀오겠습니다."
"게비디? 뭔가 일이 있었나?"
"전해드릴게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 잘 다녀와. 그럼 삐삐는 어쩌지?"
"삐삐에게는 혼자 잘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만일을 위해서 안전캠을 달아두었으니 괜찮을겁니다.
뭣하면 조금만 걸어나와도 바로 무령님이 보이니까요."
"하긴, 거리상 3m도 채 안되는데. 다녀와."
"네. 다녀올게요."
가게를 열면 오늘도 어김 없이 가게 오픈 2시간 전부터 진을 치고 있던 포션 구매자들이 한바탕 소동을 치룬다.
발레리아도 이건 따로 자판기를 도입해야 할 것 같다고 의견을 주기는 했는데
자판기는 아무래도 누가 뜯어버리거나 들고 날랐을때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팔기로 했다.
포션 구매자들이 사그라들 쯤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그 혹시 저를 기억하시려는지 모르겠군요...하하..."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들어온 남자는 과거 내게 인색한 모습을 보였던 미리타엔 길드의 접수원이었다.
"기억력은 좋아서요. 그래서 어떤걸로 드시겠어요?"
"히이익! 무...무령께서 그리 말을 높이시면..!"
"그냥 손님과 점주라고 생각하세요.
괜히 여기서까지 계급장 달고 장사하면 서로 골치가 아프지 않을까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레모네이드를 한잔..."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거야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 해서 바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오늘 찾은건 다름이 아니라 길드의 의뢰를 하나 받아주십사 이렇게 왔습니다.
모험가들에게 여러 모로 부탁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탁?"
"예, 얼마 전에 상부로부터 내려온 명령중에 미리타엔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타국의 종족이나 혹은 그런 국가를 찾아오라는 의뢰가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만, 점점 해결되지 않자 의뢰에 걸린 포상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사실 의뢰 난이도 자체는 어렵지 않은 편이지만서도
미리타엔이라는 국가 이미지가 워낙에 나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리타엔에서 오직 한 명 온화하고 자비로우며 대외적으로 명성이 높은 무령님이 계시기에
미리타엔에 돌아오신 지금 감히 말을 꺼낸 겁니다."
"의뢰에 걸린 비용이라고 하면..?"
"네, 벌써 3캐럴이나 되는 금액이 걸렸습니다."
"그 정도면 개인이 건 의뢰는 확실히 아니겠네요.
내용도 그렇고 아마 미리타엔에서 자체적으로 건 것 같은데.
목적이 뭔지 밝혀졌나요?"
"아뇨,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뢰 내용에 추가로 보이는 부분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경우 무력으로 복속시켜 미리타엔으로 편입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적혀있어서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 및 국력 강화의 목적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또 얼마 전에 유레크로스와 전쟁을 하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아서
아직 길드 내 상점만 해도 군 관련 물자가 많이 남았기도 하고요."
"그게 길드까지 흘러가는구나. 몰랐네요."
"유착관계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그... 서로 돕고 산다는 느낌이 있잖습니까."
"아... 그나저나 그럼 길드는 지금 누가 보고 있는 거죠?"
"아, 접수원은 많습니다. 저야 지금 출장 명목으로 나온 거니까 문제될게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어디로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보고하고 나온 거라서요."
"아... 예..."
그는 짐짓 고개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가능하시면 이 의뢰를 받아주실 수 있으실지 여쭈러 왔습니다.
무령님께서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좁은 식견을 가진 이들보다 자유로울 것이고
모험가들보다 품위를 가진 섬세함을 보여주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뭐 하는건 문제가 안되는데..."
"해 주신다는 겁니까?!"
"참... 처음 봤을때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으윽... 그건... 봐주십시오... 안그래도 그것 때문에 월급이 반토막이 났습니다...
나름 간판 접수원의 입장이었는데 이젠 후배들에게도 무시받는 입장입니다..."
"노예로 던져지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아...."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영업용이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맞습죠. 목숨 부지한데 감사해야 하는건 알고 있습니다...하하..."
그 가식적인 웃음에 나도 픽 웃음을 보내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했다.
부디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던 그가 가게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레리아가 한 손에 묵직해보이는 박스같은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위로 쌓인 종이 상자 여럿과 맨 위에 놓인 연녹색 포장의 선물상자.
누가 보더라도 게비디가 보낸 선물은 저것이겠거니 할 수 있었다.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높게 쌓인 상자의 탑에서 그녀는 중심을 잃지도 않고 마치
앞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정적으로 걷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상자를 하나씩 내려놓으며 재고정리를 하고 물류창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 상자는 뭐야?"
"아, 저도 아직 내용물은 몰라서요."
"그래?"
나는 연녹색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상자에는 편지로 보이는 카드와 꽤나 고급으로 보이는 아동복이 들어있었다.
카드를 열어보면 그곳에는 게비디가 친필로 쓴 편지와 더불어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웃는 오크의 그림이 있었다.
[그간 편안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게비디입니다.
일주일이나 가게를 열지 않으셨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로 독자적으로 조사하려다가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은데 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서점에서 다량의 아동용 교육서적을 구입하셨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발레리아가 도서관에서 아동용 서적을 대출하는 것과 사탕을 종류별로 사 모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짧은 식견으로 보아 아마 아이를 기르시는게 아닌가 하여 예쁜 옷가지를 몇 벌 골라 넣었습니다.
아이의 성별을 몰라 둘 다 넣었습니다.
저를 가게에 부르지 못하시는 이유를 대략 알 것도 같습니다.
상황에 여유가 생기시면 불러주시지요.]
"참 직업이랑 다르게 사람이 센스가 좋아.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속이 깊고 말이야..."
내가 그런 소릴 하고 있으면 발레리아가 말했다.
"확실히 부정할 수 없죠. 왜 저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도 한답니다.
나쁜놈들 사이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 누구랑?"
"미리타엔의 손님들이죠. 가게에 찾아주시는 분들이요.
비록 방식이 투박하시고 평생 봐오신게 그런 것들이라 과격하신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참 뭐랄까 모순적인 부분이 있으세요."
모순적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들리기도 오랜만이었다.
"물류 정리는 끝났네요. 이제 삐삐 책을 좀 읽어주러 가야겠네요."
"맨날 책만 읽어도 돼?"
"우선 언어체계를 확립하고 나서 나머지 교육이 들어가는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그리고 이미 간단한 산수 정도는 병행하고 있습니다."
"애가 수학을 좋아해?"
"아뇨, 엄청 싫어하죠..."
"어휴..."
"그래도 맞출때마다 사탕 한 개씩 주고 있어요.
그러면 열심히 하더라구요."
"걔는 사탕 안질린대?"
"저는 그렇게 초보가 아니에요.
사탕을 메이커별로, 종류별로, 맛 별로 사다 두면서
질리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어요. 그리고 초콜릿과 곰젤리도 있답니다."
"역시... 발레리아 선생님..."
발레리아는 후훗 소리가 나도록 웃은 후에 삐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무...무령님...! 삐삐가 없어요!"
"뭐?"
"삐삐가 방에 없어요!!"
"카메라는? 캠이 있다며!"
발레리아는 바로 캠을 확인하러 갔고 나는 즉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걸어두었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무령님, 삐삐가 나간건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방을 나가서 가게 안을 잠시 배회하다가 사라졌어요!"
"이상하네, 내 마법으로 봐도 가게 어딘가에 있다고 나와...!"
"죄송합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님이 한명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런걸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둘 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가게를 잠시 닫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까딱해서 연구소로 향하기라도 했다면 큰일이니까.
아니, 거리로 나가기만 해도 이목을 집중시킬게 분명하다.
도무지 어떻게 봐도 최악이면 최악이지 좋은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삐삐는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령님, ㅈ..죄송합니다.."
"아냐 네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못본게 더 크지. 하... 뭐지... 어떻게 나간거야?
일단 난 저 손님을 보내고 올게. 계속 찾아줄래?"
"그럴게요."
"삐삐야..."
나는 기운이 전혀 나지 않은 채로 손님을 맞았다.
내 표정이 전혀 진정되지 않은 상태라는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 드시겠어요?"
"...."
"손님?"
"표정...아파?"
손님은 꽤 어려보이는 여자였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 눈만 깜빡거리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사탕 머글래?"
나를 향해 뻗은 손에는 딸기맛 사탕이 하나 있었다.
"삐삐가 이거 좋아하는데... 하아... 고맙습.... 어?"
내가 다시 꼬마 손님을 바라보면 왠지 머리 옆에 쫑긋 솟아 말린 무언가가 보인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없었는데.
내가 놀라서 그걸 손으로 건드리면 마치 스위치마냥 뒤에서 노란 꼬리가 뾱 솟아오른다.
"...!"
"마마, 아파?"
"삐삐야...?"
그제서야 본 어린 소녀는 금발에 흰 피부를 하고 있었다.
아직 어딘가 엉성해서인지 머리에 양뿔이 생기고 꼬리가 나와있는 아이.
그건 분명 삐삐였다.
"마마 일 힘드러?"
나는 냅다 카운터에서 나와 삐삐를 끌어안고 가게문을 닫았다.
"발레리아!!"
"네 무령님..!"
바로 대답하고 달려온 발레리아는 내 품에 안긴 삐삐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삐삐야."
"응?"
"이거 어떻게 했어?"
"반짝해서 간질간질 하면 대!"
멍하니 서있던 우리 둘을 벙 찌게 한 대답이 나오고 얼마 지나서 삐삐가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미아내... 삐삐 잘모태써?"
"아냐, 아냐 삐삐 잘했어."
나는 삐삐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언제 가져온건지 발레리아는 카메라를 가져와서 삐삐의 폴리모프폼을 찍기 시작했다.
삐삐는 나처럼 선명한 금발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고, 아직은 어린 아이같았다.
가만 보니 옷은 내가 주로 뒤집어쓰고 다니던 쥐색 후드였다.
옷장에 든게 그게 전부니까 제 딴에는 꺼내 입고 나온 거겠지.
폴리모프를 한 상태는 기본적으로 소녀였지만 집중이 풀리거나 당황하거나 하면
종종 뿔, 날개, 꼬리 따위가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꽤 놀랐다.
그래도 외모가 상당히 예뻤다. 귀여움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옷이라고는 쥐색 후드 하나만 걸쳐입고 나와도 귀여웠겠지.
그 작은 쥐색 옷도 아직 커서 바지나 치마는 입지도 않았는데 몸을 전부 덮는다.
덕분에 어디가서 부끄러운 꼴로 돌아다니는 일은 막아낸 모양이다.
질질 끌려서 발 밑으로 늘어지는데, 아마 그게 삐삐의 동선을 제한한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걸었던 인식 저해 주술이 걸려있다보니 삐삐가 옷이라고는 그것만 입었다는 것도,
머리도 노랗고 작은 여자아이임에도 그게 삐삐라는 것도 모르고 눈앞에서 헤맸다.
결국 나는 가게를 닫고 삐삐에게 게비디가 보낸 옷을 입혀보게 되었고,
발레리아는 도서관에서 드래곤과 폴리모프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흩어보고 정리하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