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화연출판사
* * *
"네. 화연 출판사입니다."
또 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내가 잘못 건 것이 아니길 바랬다.
"여보세요?"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지금 장난해?
전화를 몇 번씩이나 걸어가지고 지금 뭐하자는건데?
할 짓이 그렇게 없어? 끊어 이 새끼야!
한 번만 더 해 그냥 확 영업방해로 신고할테니까!"
두 번째로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세 번째로 다시 전화를 걸기가 너무 어려웠다.
정말 아니라면? 내가 진짜 영업방해를 하고 있는거라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화연 출판사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삐삐와 발레리아가 독서하는 방을 찾았다.
내가 노크를 하고 발레리아를 부르면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한참 동화를 읽고 있는 삐삐와 옆에서 단어를 설명해주는 발레리아가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나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 혹시 화연 출판사라고 알아?"
"화연출판사요? 네 알죠. 주로 학계에서 출간하는 논문들이나 학술자료를 엮는 출판사입니다."
"츕판사?"
"출판사에요 삐삐. 책을 만들고 찍어내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책 만드러?"
"네. 책을 만드는 곳이에요."
"시러...."
"책이 얼마나 유용한건데요?"
"그래두 시러..."
나는 그 둘의 만담아닌 만담을 바라보다가 픽 웃고는 다시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아무튼 있는 곳이라는 거지?"
"네."
나는 전화를 걸기 전에 멈칫 전화기를 든 손을 멈췄다.
그래, 딱 한번만 더 걸어보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엔시온이 나를 속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의 수화음이 들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화연 출판사입니다."
나는 또 한번 침묵했다.
그러자 저 쪽에서도 입을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처럼 침묵속에 분위기를 떠 보는 사이,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주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
바뀐 분위기, 그리고 익숙함에 속아 대답할 뻔했지만 엔시온은 그렇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두번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전화주신 분 성함과 목적을 말씀해주셔야 저희가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
"아, 나 이거 어디서 자꾸 새는 건지 모르겠네.
지금 전화건 번호에서 8을 모두 3으로 바꾸시고 4를 모두 7로 바꾸신 후에
그 번호로 다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종이에 적힌 번호를 알려준대로 고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면 그냥 끊으려고 했는데,
전화를 받자 마자 저쪽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미리타엔의 에리아 무령님.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상단의 특성상 타인에게 함부로 노출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니는 즉, 상대가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인내심이 있으며
또 얼마나 진중한 자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테스트? 너희가 나를?"
그 순간 가시돋힌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주제넘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것 같은 언행에 솔직히 화가 났기 때문이다.
"저희는 이 방식이 무례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고객께는 무상으로 원하시는 정보를 단 한번 어느 것이든 조사해 드리고 있습니다.
정보의 가치는 그 정보가 어떤 정보이냐에 따라 갈리기 마련입니다.
그 가치를 묻지 않고 무조건 의뢰를 수주한다는 것은 저희로서도 상당히 큰 리스크임을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그럼 바로 요구조건을 이야기하면 되나요?"
"이야기를 나누실 마음이 생기신 것 같군요.
장소를 지정해드리면 그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시간은 오늘 밤 12시 30분 어떠십니까?"
"이쪽으로 와 주실수 있겠죠? 정보상이라고 하셨으면 제 가게 정도야 아셔야죠."
"하...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지요. 그럼 이만."
전화는 끊어졌다.
결국 이어진 연락에 살짝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바람을 쐬려고 가게 앞으로 나갔다.
이미 노을이 지는 하늘은 오늘 저녁도 이제 슬슬 막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류해백, 그리고 정보상단.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화이트와 세실린.
연관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것들이 나로 인해 묶여돌아가고 있었다는 점이
나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무령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느새 내 뒤에 다가와 묻는 발레리아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삐삐랑 둘이 먹을래? 오늘 손님이 한 분 더 오실 것 같아서.
돈은 줄테니까 외식하고 와."
"알겠습니다. 그럼 후드는..."
"응, 입히고 데리고 나가."
잠시 기다리면 삐삐는 쥐색 후드를 입고 나왔다.
다만 폴리모프가 되지 않은 용 그대로의 상태로.
"삐삐, 폴리모프를 해야 밥을 먹을 수 있어요."
"폰니모푸?"
"반짝반짝해서 간질간질한거요."
"아! 반짝반짝 간질간질?"
"네."
"시러!"
삐삐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마도 꼬기 먹어?"
"아니, 오늘은 이모랑 둘이 다녀와. 삐삐 할 수 있지?"
"시러... 마마두 가..."
"안되겠네요. 제가 포장해오겠습니다. 가게에서 같이 드시죠.
삐삐의 폴리모프를 상정해두면 손님이 오시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겁니다.
오히려 외식보다 안전할 수도 있고요."
"그래, 그럼 부탁좀 할게."
"네, 금방 다녀올게요."
발레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상다히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삐삐는 그런 발레리아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이모 오디가?"
"이모가 고기 사온대. 집에서 같이 먹자."
"마마두?"
"나도."
"죠아!"
"그럼 삐삐도 반짝반짝한거 해주면 안될까?"
"반짝반짝 간질간질?"
"응. 그거."
"죠아!"
삐삐는 폴짝 뛰어서 날갯짓을 하다가 파닥이는가 싶더니
풀썩 착지했다. 후드를 두른 삐삐는 어느새 금발 여자아이로 변해있었다.
꼬리도 날개도 확실히 감춘 모습이 그 짧은 새에 많이 늘었다 싶었지만
머리 양 옆으로 솟은 작은 뿔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인데 괜찮겠지.
나야 삐삐가 용이라는 걸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후드도 있는데 그렇게 쉽게 알아보진 못해.
나는 삐삐를 데리고 가서 게비디가 보내준 옷을 입혔다.
생각보다 화사한게 잘 어울렸다.
"아이고 이쁘다~"
"삐삐 이뻐?"
"응. 너무 이쁘다."
삐삐는 싱글싱글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발레리아는 골탕면과 수육을 사서 돌아왔다.
"골탕면이네?"
"네, 삐삐가 먹기에 좋을 것 같아 사왔어요."
"삐삐가 먹기 좋다는건 어떤 의미야?"
"사골을 바탕으로 하는 것도 있고, 드래곤 관련 서적을 찾아보니까
비늘과 뿔의 강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음식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아직 어린데 뼈를 먹일수는 없어서요."
"칼슘이 필요한건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삐삐가 멸치를 그닥 안좋아해요.
멸치볶음을 사다 먹여봤는데 퉤 뱉더라구요."
"꼬기 어디...?"
삐삐는 사온 음식을 하나 하나 풀어보더니 수육을 발견하고 삐이잇 하는 소릴 내며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으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먹고들 있어. 금방 이야기하고 올게."
"다녀오세요."
나는 가게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
상당히 젊은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무령님. 화연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아, 그럴 것 같았네요. 안쪽 방으로 오시죠."
남자와 나는 안쪽 방으로 따로 이동했다.
아까까지 삐삐가 독서를 한 흔적이 남아있다.
바닥에 펼쳐져 구르는 동화책과, 그림을 그린 색연필 따위가 널브러졌다.
"아이를 키우시나봅니다?"
"밖에서 밥 먹고 있는거 못 봤어요?"
"아, 그 아이가 여기서 사는군요."
"다 아는거 아니에요?"
"아무리 정보상이라도 그렇게 폐쇄되어 틀어박힌 상태에서는 모르지 않겠습니까.
물론 짐작 정도야 하기는 했습니다. 최근 도서관의 대출 목록을 보면요.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의뢰하고 싶다는 내용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주세요."
"그건 또 흥미롭군요?"
"뭐든 다 된다면서요. 처음 한 번은."
"그렇기야 합니다만..."
"어차피 금방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정보를 의뢰하시는 이유는...?"
"이유를 알아야 하는건 아니지 않아요?"
"그 말대로군요. 참... 저희를 테스트 하시는 겁니까?"
"아뇨, 테스트 목적은 아니었지만 방금 그 말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깎이기는 했네요."
"하...하하.... 실언을 해버린 모양이군요."
"조사 결과가 제가 아는 것과 다를 경우에는 어떻게 보상하죠?"
"그렇다면 아마 무령님께서 틀리신 경우밖에 없을 겁니다.
정보상단은 실수같은건 하지 않으니까요."
"기대해보겠어요."
남자는 수첩에 내가 의뢰한 내용을 적어두고 다시 내게 말했다.
"의뢰 내용은 이게 전부인가요?"
"아뇨, 피드린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물더니 대답했다.
"이건 꽤 비싼 정보군요. 요즘 찾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얼마면 되죠?"
"돈으로 받지 않습니다. 정보에는 상응하는 정보의 교환, 혹은 정보의 창출 뿐이죠.
가치있는 정보를 가져다 주시거나, 아니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원하는 쪽으로 말이죠."
"정보를 만든다는 말은, 의뢰를 받으라는 이야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고객에게 받은 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돌려드리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반드시 5대5의 구조로 대등한 관계 속에서 거래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과정중에 고객님께 해가 되지 않는 부차적인 정보를 더 얻어낼 수 있으니
그 정보로 부가적인 수입을 보는 저희로서는 이득이지만요."
"그렇다는 건, 상대를 배신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정보상과 고객간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거죠?"
"네, 정보를 어떤 식으로 얻어내든, 그건 관여할 바는 아니니까요.
속았다. 라는 느낌이 들더라도, 계약에 없는 내용이라면 저희는 굳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면, 서로 손해가 되지 않는 한에 정보의 출처는 묻지 않는다.
그게 규칙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뭐,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신다면
출처 정도야 팔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만은..."
"흥미롭네요."
"그러나 납치, 감금, 협박을 비롯한 행위는 일절 금지됩니다.
정보상단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니까요.
정보상단의 차후 영업에 방해가 되는 행위 역시 불가능하십니다.
상단에서는 이런 사건에 대비한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비밀이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 비치는 옅은 마력. 나는 그와의 대화중에 그 마력식을 분석했다.
답은 간단했다. 병렬의식군체 마법. 아마 정보상단의 최상단에 위치한 누군가가
그 아래 상인들에게 일제히 병렬의식군체 마법을 걸어 서로 가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문어발 식으로 그 아래로 피라미드 구조로 뻗어나가는 것이리라.
분명히 보이는 병렬의식군체의 마법을 역추적하면 최상단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간 관리자는 허브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최상단 관리자 하나가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테니까. 아마 뇌가 타버릴정도의 정보량을 가지고 있을테니까.
오히려 기록물로 보관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의 뇌를 허브로 정리해 필요한 정보를 마법으로 뽑아오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한 명의 기억이라면 왜곡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지만,
수십, 수백명이 같은 정보를 기억한다면, 누군가가 왜곡하거나 잊더라도 금방 집단지성으로
정확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흔히 아는 사람을 통해 몇 다리만 걸치면 세상 사람들 모두를 안다고 한다.
중복되는 인원을 배제한다고 하면 생각보다 훨씬 적은 인원으로 거의 모든 사람의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이 마법체계를 건드리면서 티나지 않게 역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라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미 이 남자와 대화하면서 나는 이 남자의 이름을 포함한 인적사항,
정보길드의 중개역을 상당히 많이 캐냈다.
"일단 현재로서 저희 상단에서는 피드 린을 조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조사가 완료되면 정보를 드리지요. 요구사항은 그 때 다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령님."
"그래요, 조심히 살펴 가세요 세오르씨."
그는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하하... 이거 방심할 수 없는 분이시군요."
"그리고 다음번에는 당신 말고 중간관리직을 불러주세요."
"... 대체 어디까지 아시는 겁니까?"
"그런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그렇잖아요?
서로 손해를 보지 않는 이상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정보의 출처는 묻지 않는다.
맞죠?"
"하....하하.... 과연 두려운 분이시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