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82화 (182/303)

〈 182화 〉 그녀와 그녀

* * *

"오늘도 술을 마실 생각인가?"

피드 린이 그렇게 말하고 세실 린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빼앗는다.

"하하...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난... 이제 부하들을 잃었어요.

레드, 그린, 블루, 오렌지, 옐로, 퍼플, 핑크, 브라운 모두 이제 죽었다고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니에요. 그런 방법은 없어요..."

피드 린은 세실 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우리는 이제껏 해 온 대로 인간답게 하면 돼. 우리는 성인도 아니고

완벽한 초인도 아니야. 비겁하고 더럽다고 욕을 들을 지언정

유리한 방향을 찾아봐야지. 안그래?"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니야, 그런건 신경쓰지 마."

"그래도 자꾸 두려워져요... 왜 우리는 완벽하지 못한건지...

신에게 의지했던 과거가 자꾸 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어..."

"결국 그 신이 해 준게 뭐가 있지? 상황을 바꾸는건 언제나 너 자신이었다."

"불안정한 존재에게서 완벽을 찾으려고 한게 잘못이었네요...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이미 답은 알고 있잖아. 말해봐. 잘못된건 뭐지?"

"...."

세실 린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다 대답했다.

"이 세상이 잘못되었어요.... 잘못된건 세상이에요..."

그렇게 대답하고 세실 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주저앉아있으면 먼저 간 부하들에게 면목이 없겠네요.

후우... 화이트? 그녀를 찾아가죠."

"그녀라고 하시면...?"

"제인 반 데어믹스. 생쥐굴의 여왕을 만나러 가자는 거에요."

"그렇게 하시죠."

화이트는 채비를 하고 금고를 열었다.

세실 린이 지금까지 벌어두었던 자본이 그곳에 있었다.

테팔레스 화산 근방 지하 광에서 얻어온 보석들과 금 따위를 팔아 번 돈이었다.

이제 눈에 띄게 줄어 이대로라면 3달 정도의 생활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아가씨..."

화이트는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결정하신 일이라면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화이트는 마녀의 권총을 집어들고 마른 목을 적셨다.

그리고 세실 린, 피드 린에게 각 두 자루씩의 권총을 넘겨주고는

남은 총을 블랙과 나누어 든 후에 나머지는 금고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최근에 블랙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마녀는 지금 엠페레스에 없다.

세실 린과 피드 린이 혼란을 마주할 요소는 미리 차단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마치고

화이트는 짧은 심호흡 후에 세실 린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걷기 시작하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무렵, 또 하나의 저택이 보였다.

일부러 위상거울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정보 하나, 허점 하나가 큰 실책으로 돌아올 테니까.

이쪽의 패는 하나라도 더 감춰두는게 효율적이다.

세실 린이 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면 잠시 후에

나이가 지긋한 집사 하나가 나와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신지요?"

"반 가문의 가주를 만나러 왔어요."

"저희 아가씨 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다음번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오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아가씨께 일정을 여쭤보고 돌아오지요."

"린이 왔다고 전해줄래요?"

그렇게 말하면 집사의 시선이 그녀를 천천히 내려본다.

날카로워진 시선의 끝,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여쭤보고 돌아오지요."

노집사가 슬쩍 주변을 바라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표정을 지우고

아무 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선 세실 린은 주머니에 든 권총을 한 손으로 계속 잡고 있었다.

그건 분명 긴장의 표출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대신 잡아준 피드 린이 슬쩍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야

그녀의 긴장은 천천히 풀려왔다.

그리고 노집사는 그제서야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야 뭐 몸 쓰는 일 말고는 젬병이니까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군."

"그러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피드 린은 빠르게 권총을 꺼내 저택 1층의 창을 향해 발포했다.

총알 대신 날아간 마력탄이 옅은 바람소리를 내며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창문을 부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철퍼덕 소리를 내며 사람이 쓰러진다.

"피드...?"

"조심해라. 저쪽에서도 우리를 그다지 환영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

창문을 보면 창틀에 걸친 채로 엎어진 남자 하나가 작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일반적인 권총과는 형태가 달랐는데 아마 마취총이나 기타 약물을 투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서로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니겠군."

얼마나 지났을까, 집사가 돌아와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지요. 아가씨께서 만나뵙자고 하시는군요.

아, 그리고... 저건, 저희측에서 처리하지요. 저희가 지시한 사항이 아닙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집사는 매몰찬 목소리로 말하고 죽은 남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상당히 삭막해보이는 느낌이었다.

집사는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했고,

그곳에는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자와 늙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또 오신 모양인데. 난 이만 가봐야겠어."

"그렇게 하시던가. 그런데, 정말 가봐도 되겠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텐데.

신문사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너무 이슈거리에 관심이 없네.

감자가 거의 다 익어가는데 말이야."

"됐어. 이미 나는 줄을 바꿔잡았으니까. 그리고, 이제와서 돈에 미련도 없고.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나?"

"늘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살 건가 모건?"

"내가 여기서 더 뜨거웠다면 경찰로 일할때 순직했겠지.

내가 여기서 더 차가웠다면 48년 전에 에드먼드를 따랐을거고.

난 이게 편해. 그리고, 미적지근한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확실히..."

늙은 여자는 옅게 웃어보이며 대꾸했다.

"너는 그런 농담을 잘도 내 앞에서 하는구나. 여전한데?"

"뭐, 죽이고 싶다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 늙어 죽어가는 여자를 죽여도

별 보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너만 탓할 일도 아니지.

난 아직도 에드먼드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까."

"네가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무력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너니까 그런 소릴 할 수 있는 거다.

너와 나는 서로 이해할 수도 없고, 같은 부분도 없잖나?

아, 둘다 이 나이 먹도록 처녀 총각 딱지 못 뗀건 똑같군."

"미친새끼."

"나는 이만 가보려네. 새 손님은 부디 좀 더 잘 대해드리길 바라네."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나이든 여자, 제인 반 데어믹스는 세실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서 앉아. 오랜만이구나 아가."

"더러운 년."

"하아... 오늘은 유난히 그 말을 많이 듣는구나.

뭐, 들을 짓을 워낙에 많이 했으니까 익숙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첫 인사가 그런 말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단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아냈죠?"

"거의 없어. 산부인과를 포함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봤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가는 일도 얼마 없고 말이야.

서로 과열될 것 같은데, 시원한 아이스티라도 마시고 시작할까?"

"네 잔 주시지."

피드 린이 그렇게 끼어들었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다니. 상당히 예의가 없는 꼬마구나.

뭐, 좋아. 들었지 버틀러? 네 잔. 가져와줘."

집사는 그 말을 듣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다시 제인은 피드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피드린이구나. 그래, 만나서 반갑네.

겉보기에는 별로 특별할게 없어 보여서 더 흥미로워."

"특별과는 거리가 먼 일반적인 인간이니까."

제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린채로 그의 말을 긍정했다.

"그래 그래... 네 말이 맞구나. 그래서 말인데,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뭐지?

그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넣어둔 총을 보면 대강 짐작은 간다만."

"이건 호신용이에요. 물론 저도 당신을 죽이고 싶기야 하지만,

이제 당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당신에게는 죽음보다 삶이 더 괴로울 거라고 하더군요."

제인의 눈썹이 그 순간 꿈틀거렸다.

"어떤... 어떤 개새끼가 그래...?"

"어머, 맞았나요? 그걸 알려드릴수야 있는데,

그 룰이 그렇잖아요? 계약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정보의 출처는 묻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버틀러가 어느새 아이스티를 네 잔 쟁반에 담아 들고 돌아왔다.

제인은 아이스티 네 잔을 손님에게 대접하고 자신은 차가운 냉차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하아... 그래, 출처가 중요한건 아니니까.

감정소모로 중요한걸 놓칠 수야 없지. 뭐 그래도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니었나?

그래서 결국 너도 다르말록의 교단을 한번 뒤집어 엎었으니까 말이야.

색깔놀이 하던 친구들 복수는 했잖아? 뒤에 저 둘은 아직도 살아있었나봐?

그래도, 색깔놀이는 이제 못하겠네."

"여전히 말을 함부로 뱉으시네요. 확실히... 자기 가치가 있는 사람은 다르다 이건가요?

아무튼 저도 거래를 하러 왔어요. 뭐 아시겠지만 당연히 어디가서 드러낼 일은 아니고요.

확실히 일처리 해 주실 수 있으시죠?"

"당연하지. 그나저나 너 아직도 가치에 집착하고 그러니? 참...

신도 믿고 어디 사는 마녀도 믿었다가 이제는 남자도 하나 끼고 나타나서는...

줏대가 없구나. 그 지지대가 빠졌을때 네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궁금하네.

난 나 말고 아무도 안믿어. 내가 보고 들은 것만 믿지."

그 말은 피드 린에게 막혔다.

"계속 그렇게 입을 놀려서 좋을게 없어. 순순히 부탁한 거나 해 주지 그러시나?"

"어머, 뭐 얼마나 둘이 서로를 아끼는지 모르겠지만, 날 죽인다고 협박하면

내가 눈 하나라도 깜빡할 것 같아? 내가 죽으면 과연 누가 더 아쉬울까?"

세실 린은 피드 린의 손을 살포시 잡아 말리고 다시 제인에게 말했다.

"여전하시네요. 부탁할건 두 가지에요. 하나는 도르테우스의 제단을 찾아달라는거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알려달라는 거에요."

"이건... 꽤 재밌는 제안이네. 너희를 추적하는사람이라니. 그런게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다 알면서 그렇게 시치미 떼지 않아도 될텐데요."

"흠.. 그래. 그 댓가로는 뭘 줄 생각이지?"

"뭘 원하시죠?"

"피드 린. 그 남자의 정보를 원해. 솔직히 말해서 조사에 착수한지 3일이나 지나서

이 정도로 정보가 모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분명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은 기록은 있는 네가 어디로 아이를 숨겼는지도."

"아예 하나도 모르는군요. 좋아요. 아이는 버렸어요. 필요 없었거든요.

그리고 이 남자는 제가 해외에서 찾아온 몰락한 귀족 자제에요.

매일 몸은 섞었는데 원치 않게 덜컥 생겨버려서요. 처리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안그래도 저는 바쁜 몸인거, 아시잖아요?"

"꽤나 자연스럽고 능청스레 연기를 하는구나.

네가 아기를 버렸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너의 동선을 파악한건 2일 전이고 그 부근은 이미 조사를 마친 상태야.

그리고 몰락귀족의 자제중에 저런 남자는 없었어. 더욱이, 귀족은 저렇게 총을 잡지 않아.

저건 총을 많이 다뤄본 사람의 자세야. 아니, 단순히 그걸로는 모자라겠구나.

그래, 사냥꾼이 쓰는 그립이지."

"확실히 만만히 보긴 어렵겠네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몰락귀족이라고 했지, 언제 정계에서 물러났는지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는 몰락 귀족의 자제니까요."

"대체 그런 거짓말까지 하면서 지킬 이유가 뭐야?

음, 아니... 아니지. 그래, 그걸 알아내는게 내 일인가?

그래, 별로 영양가는 없었지만 우선 도르테우스의 제단 정도는 조사해주지.

네가 이걸 내게 맡긴다는건,

내가 네 목적을 어느정도 조사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 것이기도 하니까."

"하... 저도 생각같아서는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알아, 색깔놀이를 못하게 되니까 팔 다리 다 잘리고 거리에 내던져진 거겠지."

"다 알고 있다는 게 이렇게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군요."

"그런거야. 아, 뭐 대단한건 아닌데, 혹시 그거 아니?"

"뭘 말이죠?"

"널 추적하는 사람은 한명 뿐이라는걸.

다른 사람들은 전부, 그 옆의 남자를 쫒고있단다.

아, 이건 서비스야. 값은 받지 않을게."

"....."

"그럼 이만 돌아가 주겠어? 나도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져야겠는걸?"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낡은 파이프를 꺼내 담뱃잎을 넣고 불을 지폈다.

"후우...."

뿌연 연기가 흐릿하게 퍼져갔다.

파이프에 새겨진 사슴의 무늬에 검게 때가 탔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그걸 닦아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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